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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82화 (685/733)

<제382화>나한테 이러지마라

라파엘이 트레베로에 도착한 것이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에게 알려지게 된 경위에 관해, 누군가는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설명할 것이었고, 다른 누군가는 그 셋, 정확하게 말하면 아리아드네와 라파엘의 취향이 지극히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우연과 필연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일이었다.

“우리, 기분전환 하러 가지 않을래?”

“응? 기분전환?”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고 트레베로 시내로 데이트를 나갔다. 결혼까지 하기로 한 김에 알폰소는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었다.

일정을 비우고 경호도 물렸다. 본인이 함께 있으니 소대쯤 보내지 않는다면 위험할 일도 없었으니까. 모자 달린 망토를 뒤집어쓴 건 그저 최소한의 예의였다.

언젠가 국왕에 즉위해 왕과 왕비가 되면 다시는 이렇게 트레베로에 올 일도 없을 것이고,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전에 아리아드네에게 귀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구체적인 데이트 장소는 아리아드네가 골랐다. 그녀가 가고 싶다고 한 장소는 트레베로 성벽 안쪽, 고서적을 파는 상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라파엘?”

라파엘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아리아드네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애인 앞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던 옛 친구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는 사실을 한 틈 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순간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알폰소의 눈치를 보았다.

그대로 쓱 자리를 옮겨버렸다면 마주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만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를 귀신같이 들어버렸다.

그는 외알안경을 낀 채 코를 들이박고 있던 귀한 고서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약간 벌리고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리 양⋯⋯?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극한의 어색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죄지은 건 없지만 뭔가 엄청나게 잘못한 기분이었다.

라파엘은 지금 이 상황에서 조금 다른 것을 보았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궁정 예법에 맞는 에스코트가 아니라, 진짜 팔짱.

그들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고 알폰소의 팔꿈치가 아리아드네의 가슴팍 근처에 딱 닿아 있었으나 둘 중 누구도 그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라파엘은 어딘가 둘 사이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그 의심에 기름을 끼얹은 건 알폰소였다. 그는 선량한 미소를 띠고 두 팔을 벌린 채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라파엘!”

알폰소가 라파엘을 얼싸안으려고 했다. 라파엘은 옛 친우가 걸어오는 근접전을 얼마 안 남은 운동하던 가락으로 간신히 피했다.

성황청에 투신한 이후로는 검술연마를 하지 않았는데, 그는 내일부터는 다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알폰소! 여기서 둘이 뭐 하는 거야?”

호위도 붙이지 않고 몰래 놀러 나온 일을 말하는 거였다.

“안전하게! 응? 안에! 응? 실내에! 기사단에 둘둘 둘러싸여서!”

라파엘이 따발총처럼 쏘아붙일 때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 “그거, 라파엘한테 부탁하자.”

- “응? 그거라니?”

- “추기경 예하께 부탁드리기는 조금 그랬는데, 라파엘이라면 믿을 수 있어.”

아리아드네가 명시적인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자 알폰소는 라파엘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라파엘. 부탁이 있어.”

그는 몸을 수그려서 라파엘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파엘은 불에 덴 듯이 펄쩍 뛰어올랐다.

“뭐?! 결혼?!”

“쉿!”

아리아드네가 황급히 끼어들어 라파엘을 말렸다.

“아직 비밀이에요!”

알폰소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생각해봤더니 사실 우리 둘이서 혼인서약서를 쓰고 성직자의 인가만 받으면 되니까. 나머지는 다 그 외의 사정이더라고. 그래서 우리끼리 지금 조촐하게 해 두려고.”

알폰소는 허리를 굽혀 아리아드네의 볼에 뽀뽀했다.

“나중에 정말로 성대하게 해 줄게. 몰래 결혼하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두 마리의 바퀴벌레가 눈꼴신 짓을 하건 말건, 아니 도리어 그 꼴이 보기 싫어 집중하느라 라파엘의 머리는 맹렬하게 돌아갔다.

어딘가 다른 곳에 신경을 분산시켜야 했다.

“아니, 잠깐만.”

뭔가가 번득했다. 아까 느꼈던 애매한 위화감의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라파엘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하나씩 헤아려 보았다.

“아직 라리에사 대공녀 일도 해결이 안 됐고 국왕 폐하의 허락도 없잖아?! 지금부터 서둘러야 하는 이유라고는⋯⋯.”

라파엘은 말을 하는 도중에 본인이 스스로 깨달았다.

저 새끼가 뭔가 책임질 일을 했으니까 서두르는 거지. 그거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는 입을 가렸다.

“니들 잤⋯⋯!”

“쉬이이이이이잇!”

기겁한 아리아드네가 달려들어 라파엘의 입을 막았다. 트레베로는 일상생활에서도 라탄어를 써서 에트루스칸 어를 알아들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런 걸 헤아릴 계제가 아니었다.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돌진을 가볍게 피하고는 되레 아리아드네의 양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그는 동화책에 나오는 친오빠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리 양, 잠깐 소리 듣지 말아요.”

그리고는 얼굴을 완전히 뒤집었다. 천사에서 악귀처럼 변하는 순간 변신이었다.

“알.폰.소. 데 카를로! 너 양심이 있어 없어?!”

남들에게 들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눌렀지만, 그 안에 있는 스타카토 질책은 알폰소에게 정확하게 전달됐다.

“와 씨 성황청 숙소는 숙소마다 벽에 십자가 걸려 있을 텐데 그 밑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알폰소는 웃으며 몸을 뒤로 뺐을 뿐이다. 라파엘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질타했다.

“어? 어? 그런 짓 하고 싶었어? 벽에서는 곤이, 협탁 위에선 성모상이 내려다보시는데 그런 짓 하고 싶었어? 어? 어?”

약이 두 배로 오른 라파엘은 혓바닥 공격 끝에 아리아드네의 귀를 막은 손 중 하나를 빼서 알폰소의 어깨를 짝! 때렸다.

“아야!”

하지만 돌덩이 같은 근육에 자기 손만 아팠다. 상상이 하늘까지 치달아 올라갔고 라파엘은 이를 악물고 울부짖었다.

“이 돌덩이 같은 몸뚱이로 아리 양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야아아아아.”

그 와중에 손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났다.

나 내일부터 운동한다. 운동해서 어디다 쓸진 모르겠지만 기필코 운동한다.

“나더러 주례 서라니 넌 양심도 없어 이 개XX야⋯⋯.”

“하하하. 미안.”

사죄의 표시인지 알폰소는 라파엘이 때리는 손을 한 대도 피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분에 차서 알폰소의 어깨를 한 대 더 쳤지만 손만 더 아팠을 뿐이다.

“아야야⋯⋯.”

* * *

필리프 4세는 숙소조차 잡지 않고 곧바로 루도비코 법황을 알현하러 왔다.

보통 실무자가 미리 군주의 도착을 알리고, 숙소 등 동선을 완벽하게 세팅하고 난 뒤에야 만나는 장소 등 의전의 미세 조율을 거쳐 정상 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특이한 경우였다.

덕분에 루도비코 법황은 새로 생긴 자기의 늙은 후계자, 데 마레 추기경을 어디 서재 같은 데에 홀로 둔 채 필리프 4세를 만나러 와야 했다.

“무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따스하게 맞아 주셔서 이루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필리프는 법황에게 몹시 깍듯했다. 마치 무언가 부탁하러 온 사람처럼.

필리프 4세는 루도비코 법황이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말랐고, 까칠해 보였다. 법황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도 누가 본다면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왜소하다 하겠지.’

죽기 직전이니 당연한 것을.

법황은 갈리코의 국왕, 필리프 4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소? 이렇게 급히 오신 걸 보니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 같네만.”

필리프 4세 역시 바로 핵심으로 접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에겐 시간이 많이 없었다.

“탁 까놓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성하, ‘알레망 법’에 대한 대사면을 내려 주십시오.”

알레망 법은 사생아의 상속을 금지하는 교회법이었다. 증여세나 상속세*가 없는 중앙대륙에서 알레망 법은 의외로 재산적 측면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죽기 전에, 혹은 유언으로 사생아에게 현금이나 농장 따위를 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신분에 부착되어 내려가는 작위, 그리고 작위의 최종 진화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왕위계승권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랐다.

법황의 눈가에 까마귀발 같은 주름이 짙게 잡혔다.

“내가 왜 그걸 해야 하지?”

알레망 법 대사면이 있게 되면 정해진 기간, 그러니까 특정 연도라거나 1101년부터 1113년까지 사이 등 법황이 정한 임의의 날짜에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사생아라도 적자와 똑같은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런 짓을 해 버리면 중앙대륙에 피바람이 불 것이야.”

여왕이라도 있는 나라라면 복잡해진다.

사생아라서 계승권에서 배제된 아들이 나타나 ‘내가 적자이니 나에게 왕관을 내놓아라.’라고 주장하면 여성의 승계를 금지하는 살리카 법보다 더 앞에 있는 알레망 법 덕에 왕위를 계승한 여왕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다.

다행히 현재 중앙대륙의 주요 국가 중엔 여왕을 모시는 나라는 없었지만, 귀족의 작위를 가지고도 똑같은 일이 수태 일어날 거였다.

“왕위계승순위가 숱하게 바뀔 거고.”

사생아가 왕위를 계승한 적자보다 나이가 더 많아 장자 우선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직계 자손이 끊겨 사촌이 왕위를 계승했거나 한 경우에도 난리가 날 게 틀림없었다.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날 테지. 이런 다툼이 어떻게 해소되게 되겠나. 결국에는 힘이야.”

군사력이 있는 자, 혹은 군사력 있는 자를 등에 업은 자가 군주가 되고 작위를 얻을 것이다. 정당한 권리자는 밀려날 것이고.

루도비코 법황은 정당한 권리자의 보호도 보호였지만 지금 혼란해진 중앙대륙을 감수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중앙대륙은 안정되어야 해.”

그래야 예사크에 대군을 파견할 것 아닌가. 제4차 십자군 전쟁이 목전에 있었다. 등 뒤가 불안하면 전쟁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잊게나.”

법황의 거절에, 필리프가 흰자를 희번들하게 빛내며 답했다.

“맨입으로 달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에게선 어딘가 절박한 냄새와 동시에 체념의 향기가 풍겼다.

“피사리노를 드리겠습니다.”

피사리노. 갈리코 왕국과 에트루스칸 왕국에 맞닿아 내륙에 갇힌 트레베로가 끝없이 염원하던, 갈리코 왕국 소유의 항구였다.

[작가의 말]

현대적인 의미의 상속세 제도는 1894년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상속세의 원형과 비슷한 것은 학설에 따라 각각 1796년, 1694년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저 두 가지는 오늘날의 상속세 내지는 증여세와 아주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 중 배경은 위보다 약 3-400년 이른 시점으로, 세금 제도가 현대적으로 발달하기 전입니다.

상속‧증여세가 아직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인두세와 토지세, 그리고 부수적 세원으로 활용되는 관세만을 세금 제도의 큰 틀로 삼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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