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4화> 예상치 못한 정체
외드 대공이 파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의 갈리코 국왕 승계 제의를 필리프 4세에게 폭로해버릴 거라는 알폰소의 말에, 라파엘은 멍해진 표정으로 알폰소를 한참 바라보았다.
“⋯⋯옮나?”
“무슨 소리야.”
“아니, 외드의 제안을 필리프한테 일러바쳐서 외드를 날려버린다니. 네가 할 만한 생각이 아닌데. 이건 아리 양이나 할만한 생각인데!”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넋 놓고 중얼거렸다.
“⋯⋯하면 옮나?”
“라파엘!”
그 순간 아리아드네가 던진 쿠션이 라파엘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실망이에요!”
아리아드네는 다음 쿠션을 들고 라파엘에게 덤벼들려 했다. 알폰소가 그런 아리아드네를 껴안았다.
그는 몸으로는 말렸지만 입으로는 말리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모를 소리를 했다.
“쟤가 수도원에 처박혀 있다 보니까 저래. 인간이 고상함과 멀어지고⋯⋯. 저열해지고⋯⋯.”
라파엘은 기겁해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 아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는 빽 소리를 질렀다.
“사.랑.하면 옮냐고!”
라파엘이 또박또박 읊은 문장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쿠션을 들고 알폰소와 실랑이하다가 그 자리에서 뚝, 동작을 멈췄다.
라파엘은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아이 씨, 음란 마귀 씐 사람이 누군데 지금 나한테 저열하다고! 그것도 커플로 씌었네!”
아리아드네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고 알폰소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 진짜 수도원 들어갔더니 음란은커녕 로맨틱도 다 얼어 죽었는데⋯⋯. 건전하기 짝이 없게 하루에 여섯 시간씩 묵상하면서 살았는데⋯⋯. 저열하단 소리나 듣고⋯⋯.”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감싼 채 생각했다.
‘아⋯⋯. 죽고 싶다⋯⋯.’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에게 수모를 당할 때도, 레오 3세의 목표물이 되었을 때도, 엘코의 이간질로 곤란을 겪을 때도 안 해 봤던 생각이었다.
‘마룻바닥으로 스며들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아리아드네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불타오르지만 수치스러운 일에는 약한 타입이었다.
라파엘이 빽빽거리고 알폰소가 뭐라고 대거리하는 소리가 밖에서 윙윙 울렸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라파엘이 침착한 톤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알폰소.”
천만다행으로 라파엘은 화제를 돌렸다. 사실 아리아드네가 땅을 파는 걸 보고 돌려준 거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지르고 나면 외드 대공과의 사이가 정말로 악화하는 것 아닌가?”
알폰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대놓고 협박하는 거니까.”
라파엘은 인상을 찡그렸다.
“외드가 너에게 그렇게 거절당하고 나면 가만히 있겠어?”
라파엘은 권했다.
“지금 당장 파혼하려고 들지 말고, 에둘러 말해서 당분간 미뤄두는 거 어때.”
“라파엘.”
알폰소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고언은 고맙게 받겠어. 그렇지만 그건 내 선택지 밖에 있어.”
그는 더는 아리아드네를 복잡한 상황에 내던져 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온전한 확신을 줄 것이었다.
만천하에 공표하는 결혼식과 왕자비의 관을 지금 당장 주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효력 있는 법률혼은 그가 아리아드네에게 당장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었다. 그러려면 라리에사가 치워져야 했다.
“그렇지만 알폰소.”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내가 외드라면, 너한테 ‘파혼을 공식화하지 않으면 필리프에게 모두 공개하겠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네가 국왕에게 입을 놀리기 전에 필리프를 빨리 죽여 없앨 것 같단 말이지.”
필리프가 제거된다면 갈리코 국내에는 외드밖에 없었다.
그는 어디선가 사촌을 조달해 허수아비 왕을 세울 것이고, 외국인을 앉힌 후에 갈리코 왕국의 실권자가 될 것이다.
“결국엔 필리프 사후에는 외드가 권력을 잡을 수밖에 없는데, 외드가 너 때문에 급하게 쿠데타로 몰리게 되면 너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게 될까?”
그러나 알폰소는 여유 있게 답했다. 그도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
“그 부분은 필리프 4세가 해결해 줬어.”
알폰소는 씨익 웃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이 통과된다면 후계자는 필리프의 사생아가 될 테니, 외드 대공이 그 누구를 데리고 오더라도 사생아가 앞이야. 필리프와 그 사생아가 외드의 섭정을 용인하겠어?”
알폰소의 생각에, 외드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알레망 법이 통과되면 사생아가 친정하겠지.”
이게 알폰소가 체자레 공작을 자신의 입지를 위협할 수 있게 만들 알레망 법 대사면 이야기를 듣고도 동요하지 않은 이유였다.
알폰소는 체자레 따위에겐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었고, 그보다는 아리아드네가 훨씬 중요했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대사면 날짜만 맞으면 네가 좀 더 편하게 운신할 수 있기도 하고.”
알폰소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다. 이마에 닿는 그의 입술은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하기 전에 입 안을 한번 깨물어야 했다.
“그게⋯⋯.”
아리아드네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생아 쟝’이⋯⋯. 어려.”
알폰소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어리다고?”
얼마나 어리길래?
“필리프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고 이렇게 아득바득 후계자로 세우려는 걸 보면 나름 열대여섯 살은 된⋯⋯.”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많아봤자 네다섯 살. 나이가 많을 수가 없어.”
알폰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지금 아리아드네가 하는 말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필리프 4세는 아직 나름 젊은데, 알레망 법 대사면을 받아내는 무리수를 둬서까지 계승권을 주려는 사생아가 나이까지 어리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게⋯⋯. ‘사생아 쟝’의 엄마는⋯⋯. 오귀스트 공주거든.”
알폰소와 라파엘의 표정이 약간 못 먹을 걸 주워 먹은 사람처럼 변했다. 라파엘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엑?”
알폰소는 끙, 하는 신음을 냈다.
“그래서 그랬구나⋯⋯.”
갈리코 왕국과 혼담이 오갈 때 이상했던 정황 몇 개가 비로소 맞아들어갔다.
알폰소 왕자와 오귀스트 공주는 사촌지간이라 교회법상 결혼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건 법황의 특별 허가를 득하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사상 사촌 내지 육촌 형제 사이에 법황의 허가를 받아 결혼한 사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갈리코 왕국은 한사코 오귀스트 공주를 매물로 내놓지 않았다.
라리에사 대공녀를 양녀로 입양한 다음 법황의 특별 허가를 받자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제의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갈리코 왕국을 방문했을 때 오귀스트 공주가 그를 바라보던 눈빛.
알폰소 왕자는 어려서부터 그를 호감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자랐다.
무심한 척을 하는 여자는 있어도 정말로 그를 싫어하는 여자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귀스트는 정말로 그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필리프가 그를 더 의식하면 의식했지. 오귀스트의 시선은 냉담 그 자체였다. 다 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러니까, 알레망 법이 통과가 되든 안 되든 외드는 섭정으로 그 자리를 지킬 거라는 거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그를 멈출 수 없었다.
“어쨌건 상관없어. 외드 따위가 날 어떻게 하지는 못해. 내일 당장⋯⋯.”
“잠깐만. 기다려 봐.”
알폰소의 말을 끊은 것은 라파엘이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이 통과된다면 쓸모없는 일이 되겠지만, 만일 서자의 계승 허용이 여전히 불가능하다면 말이야⋯⋯.”
아리아드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라파엘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분은 줄리아를, 정확하게는 줄리아의 남자친구를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물었다.
“줄리아가 남자친구가 있어?!”
허구한 날 어디 괜찮은 남자 없냐고 한탄하고 다니던 그녀의 친구였다.
부모님이 가지고 오는 선 자리는 다 나이 많고 못생긴 아저씨밖에 없다며, 선 안 보는 방법을 같이 궁리해 달라던 줄리아였는데⋯⋯.
라파엘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리 양한테도 비밀이었군요.”
그렇지만 나라의 명운이 목전인데 동생의 사생활 따위 중요치 않았다. 아니, 동생의 사생활을 이제까지 지켜준 것만 해도 할 만큼 한 거다.
“음⋯⋯. 갈리코 출신 귀족이에요. 자세한 건 그에게 직접 들어요.”
라파엘은 덧붙였다.
“이 상황에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거예요.”
* * *
필리프 4세가 루도비코 법황에게 ‘알레망 법 대사면’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는 알음알음, 그러나 빛과 같은 속도로 중앙대륙에 퍼졌다.
이는 기존 측근을 모두 숙청해버린 법황이 새로 들인 주변인 단속을 못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필리프가 알레망 법 대사면을 요구할 신학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프로젝트를 발주한 신학자와 그들이 소속된 수도원 쪽에서 흘러나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서자의 승계 허용을 가장 갈급하게 바라는 사람에게 아주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어머니, 들으셨어요?”
체자레 공작은 흥분으로 가빠진 목소리로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외쳤다. 공작부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네가 웬일로 나를 먼저 찾아오니.”
“‘알레방 법 대사면’ 이야기 말입니다!”
그 단어에, 루비나 공작부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알레망 법 대사면?”
알레망 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망할 교회법을 일컫는 단어다.
“너는 이제 왕의 조카라 그것과는 상관이 없⋯⋯.”
“대사면으로 알레망 법이 옳게 풀리면 저는 이제 왕의 조카가 아니라 왕의 장자가 된단 말입니다!”
체자레가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왕의 장자! 어머니의 아들이 말입니다!”
왕의 가장 첫 자식. 첫 번째 아들. 왕비의 몸에서 난 알폰소 왕자보다도 계승 순위가 높을 수 있는⋯⋯.
루비나의 눈에 탐욕이 확 스쳤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이 연도를 지정해서 나온다는 거, 알고 계시죠?”
루비나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체자레는 어머니에게 대사면의 방식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보통 축하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대사면령을 내리죠. 특정 연도나,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성령의 은혜가 내렸으니 그 기간을 대상으로 대사면령을 내린다’, 이런 식으로 지정합니다. ”
그의 눈이 야심으로 이글거렸다.
“제 생년까지 포함해서 대사면령이 내려져야 해요.”
일생에 한 번 온다는, 아니 어쩌면 만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놓칠 수 없다.
“어머니, 국왕 폐하를 설득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인식—이런 기회가 두 번 오지는 않을 거라는—은 그의 어머니도 공유했다. 루비나가 결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바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