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화> 꼴도 보기 싫지만
루비나가 꿀 떨어지는 애교를 장착하고 레오 3세를 찾아왔을 때, 국왕은 그녀의 간드러지는 목소리 톤만 듣고도 저 여자가 무슨 볼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간파했다.
“국왕 폐하아―.”
레오 3세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애교는 넣어 둬. 임자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알고 있어.”
국왕은 요새 심기가 편치 않았다. 루비나의 얼굴만 보면 이상하게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아이 참, 제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국왕 폐하가 어떻게 아셔요? 저는 단지 폐하가 뵙고 싶어서―.”
거의 30년 가깝게 한 이불 덮고 살았는데 내가 너를 모르겠냐, 라고 레오 3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겉말은 몹시 퉁명스럽게 나왔다.
“왜 그러는지 알겠고, 내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테니까 이만 돌아가 봐.”
“예? 무슨 말씀⋯⋯. 저랑 이야기 좀 해요, 폐하.”
루비나는 필사적이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체자레가 왕이 될 기회인데⋯⋯.
“아 진짜!”
레오 3세는 그만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지금 알레망 법 대사면인가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뇨!”
루비나는 자신이 간파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바로 고개를 수그리고는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임자가 무슨 말 할지 뻔하지! 우리 체자레도 포함되게 해 달라고!”
한번 화를 내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레오 3세는 거침없이 짜증을 냈다.
“시야가 좁아, 단견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해! 뭐 중앙대륙 전체의 1101년생 사생아를 내가 다 구제해야 하겠소?!”
“폐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가 봐!”
노성이 천장을 찔렀다. 레오 3세는 그녀더러 나가란 손짓을 했다.
“필리프 4세가 추진한다니 법황과 갈리코 왕이 알아서 하겠지! 떼잉!”
루비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옴짝달싹하지 않자, 레오 3세는 한 번 더 크게 성을 내며 자신이 방을 떠나 버렸다.
그렇지만 레오 3세는 루비나에게는 이렇게 까칠하게 굴었을 값에, 이번 알레망 법 대사면에 숟가락을 얹을 생각이 분명히 있었다.
그는 트레베로로 보내버린 장성한 아들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 “자치도시 ‘우나이솔라’를⋯⋯. 국왕에게만 충성하는 자유도시로 봉하노라.”
- “우리의 백성인 우나이솔라의 주민들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풍성한 금발과 떡 벌어진 어깨. 예법대로 수그렸지만, 전혀 고분고분해 보이지 않는 뒤통수.
제 피를 타고 난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예뻐하기에는 심하게 외탁한 외모와 지나친 인망.
‘운도 좋아.’
레오 3세는 이를 뿌득, 갈았다.
우나이솔라를 자유도시로 천명한 이후 그는 대영주의 왕자에 대한 민심이 급격하게 이반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영주들 사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렇지만 네가 뛰어봤자 벼룩이다. 나에게는 아직 카드가 많이 남아 있단다, 얘야.’
레오 3세는 아직까지도 알폰소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다.
적통 아들이 딱 한 명 있고, 새 왕비도 들이지 않은 늙은 왕으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왕세자를 책봉하지 않은 상태에서 체자레의 계승권이 복권되면⋯⋯. 둘을 경쟁시켜서 내 입맛에 맞는 녀석으로 고를 수 있다는 말씀이야.’
그는 자기의 잔머리에 어깨가 으쓱했다.
다 큰 아들 둘이 아웅다웅하면서 자기의 비위를 맞추려 드는 꼴을 상상하자 루비나의 얼굴을 보고 났던 짜증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뭐, 알폰소가 말을 잘 들으면 결국 그 아이를 후계자로 고르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레오 3세는 그놈이 왕위는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는 양 의기양양하게 구는 꼴이 싫었다. 바닥을 구르며 제 발에 입 맞추길 원했다.
한참을 그렇게 어슬렁거린 후에 문득 그는 배가 고프단 사실을 깨달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레오 3세는 루비나가 없어진 걸 확인하고 국왕의 쿼터에 딸린 작은 식당으로 어정어정 내려갔다.
그는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주변을 양껏 두리번거렸지만, 눈을 씻고 봐도 왕궁 안엔 예쁜 여자는커녕 젊은 여자조차도 없었다.
마르그리트 왕비 사후에 왕궁의 전권을 잡아버린 루비나가 재빠르게 사용인들을 모두 갈아버린 것이다.
“쯧.”
레오 3세는 다시금 기분이 나빠졌다. 젊고 싱그러운 아마빛 머리카락의 여자 하나가 눈앞에 어른어른했다.
그는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본인이 현재 몹시 불만족스럽다는 점 하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 * *
알레망 법 대사면을 두고 중앙대륙 전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동상이몽에 젖어 있을 동안, 케이크 줄 사람은 아주 단순 무식한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 보지.”
루도비코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알레망 법 대사면 문제를 다음 공의회까지 미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다음 공의회는 산 카를로에서 열기로 합세.”
공의회는 예삽교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돌아가며 여는 전통이 있었으나, 최근 200여 년간은 항상 트레베로에서 열렸다.
“예? 왜 갑자기⋯⋯. 거동이 힘드시지 않습니까?”
후계자로 지명되고 난 데 마레 추기경은 루도비코 법황에게 아주 깍듯해졌다. 법황도 그게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법황은 젊었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태도로 추기경에게 아주 친절하게, 타이르듯 알려주었다.
“내가 산 카를로에서 죽어야 콘클라베도 거기서 열릴 것 아닌가?”
최근 200여 년간의 콘클라베는 모두 트레베로에서 열렸다. 법황의 선종 장소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교회법에는 트레베로가 아닌 ‘법황이 선종하는 장소’에서 다음 법황 선출을 위한 모임을 가지라고 적혀 있었다.
예전에 최초의 예삽교도들이 벌판에서 양 떼를 치며 유목 생활을 하던 시절의 잔재였다.
“급작스럽게 열려야 먼 곳에 있는 놈들이 못 오지.”
루도비코는 사람 좋게 웃으며 섬뜩한 말을 했다.
“투표권 있는 놈들을 다 죽여버리는 것보단 내가 타지에서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진짜로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 데 마레 추기경의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러나 법황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둥 딴소리를 했다.
“따지고 보면 타지도 아니지. 내가 나고 자란 내 고향이니.”
추기경은 저 인간은 인자하게 웃을 때가 제일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법황의 인자한 미소를 싫어하는 추기경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루도비코 법황은 안색을 굳히고는 추기경에게 말했다.
“내가 제아무리 법황이라지만 차기 법황은 결국엔 추기경들의 익명 투표로 결정돼. 알지?”
차기 법황 선출권을 가진 사람은 80세 이하의 추기경이었고, 현재 전 세계에는 46명의 추기경이 있었다.
“공의회를 개최해서 거기에 모두의 신경이 쏠린 사이에 내가 죽으면, 재빠르게 콘클라베를 열고 차기 법황 선출을 마쳐 버려. 꼴 보기 싫은 놈들은 오지 말라고 해.”
공의회는 주교위 이상의 고위 성직자 전원에게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참석자가 추기경으로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기경의 불참을 유도할 여지가 있었다.
신학적 현안이 토론의제로 올라가므로, 신학보다 행정 혹은 포교가 주전공인 고위 성직자는 공의회 참석을 제치고 대신 자기를 대리할만한 주교 등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들겠지만, 자네가 알아서 참석자를 잘 쳐내 보게. 공의회 열거라는 공고 자체도 짧게 하고. 콘클라베 소집공고도 짧게 하고.”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법황의 유해를 트레베로로 빨리 운구해야 한다는 등의 핑계를 대면 콘클라베 소집통보를 짧게 하는 것도 정당화될 것이다.
어차피 중요한 사람이 다 공의회에 와 있으니 당신 하나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주장해도 되고.
“그런 재주 정도는 부릴 수 있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알레망 법 대사면에 관한 결정을 그때까지 미룬 것도 자네에게 운신의 폭을 더 주고 싶기 때문이야. 내 손이 안 닿는 곳에 있는 놈들은 아예 참석을 막고. 자네의 영향권 안에 있는 추기경들은 모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 어중이떠중이들은 알레망 법 대사면으로 꾀어서 득표를 모아.”
저건 다 루도비코 사후에 일어날 일들이었다. 그가 도와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새 후계자, 데 마레가 온전히 해내야 할 몫이었다.
그러나 법황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후계자가 소심하고 쩨쩨하긴 하지만 멍청한 놈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알레망 법 대사면에 대해서는⋯⋯.”
루도비코 법황은 크게 웃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어. 피사리노 항구는 탐나지만 필리프 4세는 그걸 순순히 넘겨줄 놈도 아니고. 저번 성전에 돈 대는 꼬락서니를 보고 감 잡았네.”
필리프 4세는 왕위 계승할 때 법황의 지지를 받은 후, 자신이 약조한 성전에의 금전적 지원을 2/3 토막 냈다.
“어디까지나 자네의 법황 선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어디까지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이 이교도 놈들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민초들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법황은 이글대는 눈으로 데 마레 추기경을 붙들고 아주 가까이에서 시선을 맞췄다.
“알았지, 데 마레? 꼭 예사크를 영원히 예삽교도의 땅으로 편입해야 하네.”
데 마레 추기경은 광기에 가까운 법황의 당부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성하.”
그는 성호를 그었다.
“천신의 가호가 라트갈린과 헤자즈 전역에 미치기를. 아멘.”
“아멘.”
* * *
외드 대공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복도를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됐는데⋯⋯.’
알폰소 왕자 일행의 귀국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 데 카를로는 끝내 그에게 허락의 의사표시를 내비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라고 말했던 게 본인이었기 때문에 왕자에게 약속을 저버렸다고 욕도 못 하겠고, 죽을 맛이었다.
‘약속 한 번을 끝내 안 잡아주고⋯⋯. 나쁜 놈 같으니.’
외드 대공은 ‘비밀리에 추가 회동을 한 번 더 하자’고 알폰소 왕자 측에 기별을 넣었으나, 정중하게 ‘공식 석상에서 뵙자’는 답변을 받았을 뿐이다.
오늘은 법황이 손님들을 위해 여는 고별 만찬이었다.
외드 대공은 그래서 오늘 알폰소 왕자를 따로 붙들어 확답을 받을 작정이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만찬이 무르익은 뒤에, 술이 불콰하게 취한 왕자를 잡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경황이 여의찮았다.
혹여나 왕자가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거나, 아니면 법황 옆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아서 단둘이 대화할 찬스가 나지 않으면 어떡하나.
외드 대공은 왕자를 확실하게 만나기 위해 만찬 중이 아니라 만찬 전을 노리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우연한 조우를 가장하기 위해 만찬장 앞에서 사십 분째 서성이는 중이었다. 여기는 상당히 괜찮은 장소였다.
법황의 만찬에 초대받은 사람만 이 복도까지 들어올 수 있었으므로 수행인을 모두 물리고 왕자 혼자서 나타날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반 시간 정도는 일찍 나타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하며 그는 투덜거렸다. 순전히 혼자만의 감상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감사함을 가지자.’
외드 대공이 이만큼의 운신의 폭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사실 필리프 4세의 덕이 컸다.
국왕은 트레베로에 도착해 법황 알현을 마치자마자 다시 광증이 도져 법황의 거처에 배정받은 자신의 숙소에 스스로를 가두고 나오지 않았다.
백 피에디도 안 떨어져 있는 와중에 필리프 4세가 나타날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아주 큰 장점이었다.
‘필리프를 치우고 알폰소 왕자를 등극시키는 게 최선이다. ‘사생아 쟝’이 전면에 드러나면⋯⋯. 그놈이 성인이 된 후엔 우리 집안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거야.’
그는 알폰소 왕자를 묶어둘 인질인 자신의 딸을 생각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라리에사는 트레베로에 도착하고는 알폰소 왕자를 만나러 가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피웠다.
천만다행으로 필리프가 방에 틀어박혀 버렸기 때문에 외드는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딸을 제압해서 숙소에 가둬버릴 수 있었다.
‘내 자식만 아니면⋯⋯. 어휴.’
외드 대공이 생각에 빠져 복도를 서성거리는 동안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공은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도착했나?’
법황의 만찬장으로 향하는 고풍스러운 복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오래된 떡갈나무 문이 열린 뒤 외드 대공이 오래 기다리던, 빛바랜 금발을 한 큰 체구의 남자가 나타났다.
“알폰소 왕자, 오랜만⋯⋯!”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의 우아한 여자를 에스코트하며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