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화> 라리에사 대공녀의 등장
‘저건⋯⋯!’
외드 대공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의 여자는 데 마레 추기경의 딸, 그리고 알폰소 왕자의 연인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였다.
대공은 그만 기분이 확 상하고 말았다.
자기 딸은 겉치레 부인으로 두고 내연녀로 곁에 두라고 제 입으로 말한 바야 있지만 예비 사위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외간 여자를 실제로 눈으로 보는 건 아예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외드 대공을 발견한 알폰소 왕자는 기껍지 않은 표정이었다.
왕자가 뭐라 말하려는 걸 그 옆에 있는 여자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렸다. 이 또한 대공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외드 대공은 지금 큰소리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인생은 흐르는 강물 같다는 말을 몸으로 체감하는 중이었다.
주로 삶이 강처럼 고정되지 않고 쉼 없이 변화하는 부분을 은유한 것이겠지만, 언제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는 하류처럼 폭력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면을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상한 말을 다 때려치우고 쉽게 이야기하자면, 젠장, 요소들이 너무 빠르게 바뀌었다. 상수라고 생각했던 것도 변수가 되었다.
일단 필리프가 일어나서 트레베로로 찾아온 것도 그랬고, 라리에사가 거기에 딸려온 것도 그랬다.
왕자의 옆에 팔짱을 끼고 있는 저 까만 머리 여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저 여자는 원래 정부나 하면 딱일 스펙이었다.
중앙대륙에서 가장 잘나가는 젊은 왕자의 정부를 할 정도로 빼어난 이목구비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원래 하나만 뛰어나면 시키는 게 첩인데다가—다 빼어나면 정부인을 시키지 누가 세컨드로 두겠나—묘하게 매력적인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에게 비판적인 것으로는 중앙대륙 최고일 외드 대공의 눈에도 그게 보였다.
게다가 유력한 추기경의 서출 딸. 교계에 끈을 댄다는 의미로도 완벽했다.
그런데 저 여자의 ‘유력한’ 추기경 아빠가 좀 지나치게 유력해지고 있었다.
외드 대공은 루도비코 법황의 건강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몰랐기 때문에 데 마레 추기경이 그저 루도비코 법황의 최측근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오판을 하더라도 데 마레 추기경의 상승세는 엄청나게 무시무시했다.
법황에게 착 유착된 최측근 추기경, 심지어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예삽교의 본산인 에트루스칸 왕국 전체의 성직자들을 이끌며, 고래로부터 내려온 신학 사조 중 안토니우스 파의 진전을 그대로 이은 대가다.
‘법황이 아니다뿐이지, 교계에서 직위 외엔 모든 걸 다 가진 거 아닌가⋯⋯?’
데 마레 추기경이 루도비코 법황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조만간 법황도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외드 대공은 까무러쳤을 것이다.
어쨌든 라리에사가 저 여자에 비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강점—잘나가는 아빠—가 완벽히 희석되고 있었다.
갈리코 왕위라는 대륙 최고의 당근을 들고도 굽신대야 하는 자신에 처지에 불만이 가득해서, 그러나 필리프의 칼끝에서 달아나려면 어쩔 수가 없어서 외드 대공은 얼굴 가득히 사교적 미소를 띤 채 알폰소 왕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 필리프를 치우고 진정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된다면 이런 일이 없을까.
“알폰소 왕자 저하!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로 즐거운 공교로움이군요!”
알폰소 왕자의 표정이 굳었다. 표정 관리를 못 했다기보다는 굳이 안 한 것이다.
외드 대공은 각종 욕설을 퍼부었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지금 그는 감히 싫은 티를 낼 처지가 아니었다.
“중앙대륙의 미래를 어깨에 얹고 걸으시는 기분은 어떻습니까? 법황 성하께서도 왕자 저하를 보고는 입가에 미소가 떠나시질 않더군요!”
필리프 4세가 트레베로로 입성한 뒤로 외드 대공은 뒤에서 사자가 쫓아오는 너구리처럼 굴었다.
쩔쩔매며 찬사를 퍼붓는 외드 대공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좀 안쓰러웠다.
누구보다도 객관적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도 그 평가에 십분 동감했다.
지금 외드 대공은 ‘내 딸과 결혼 할 거요 말 거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아니요’를 답으로 받아 갈 자신이 없어서 변죽만 울려대고 있었다.
그녀는 알폰소의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외드 대공을 내려다보았다.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외드 대공은 마지막 자존심을 이런 식으로 채워야 하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리아드네를 곧 죽어도 아리아드네와 눈을 맞추거나 등 그녀가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 봤자다. 좀 천천히 움직이라는 라파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폰소는 사실 오늘 외드 대공과 마지막 담판을 짓고자 했다.
알폰소는 만찬장에 나서는 왕자가 아니라 무슨 실무자 회담에 나가는 말단 관리처럼 각종 증거와 서류들을 죄다 챙겨 왔다. 아리아드네가 만류해도 요지부동이었다.
- “확실하게 끝내고 싶으니까.”
‘끝나고 만나자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루도비코 법황과 다른 손님들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잡념은 째지는 목소리와 함께 산산이 깨졌다.
“왕자님, 아니, 낭군님!”
복도 중간에 있는 쪽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남색 옷을 휘감은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못 뵌 지 너무나 오래되었어요!”
라리에사 대공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딘가 상태가 이상했다.
일단 가장 간단한 것을 지적하자면, 원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의 소유자였던 대공녀의 머리카락은 잉크로 물들인 듯이 새까맸다.
“Amore mio!”
외드 대공은 당황했고, 알폰소는 입을 약간 벌린 채 라리에사 대공녀를 바라보았다.
“Nah, mio marito!”
그녀는 사랑을 속삭이는 밀어 몇 개를 에트루스칸어로 외치며 재빠르게 알폰소에게 다가왔다.
놀랍게도 그녀의 에트루스칸 어는 썩 괜찮은 정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알폰소 왕자에게 다가서는 라리에사 대공녀는 양쪽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걷는 품새가 몹시 불안했다.
라리에사에게 시선을 뺏긴 것은 아리아드네도 마찬가지였다.
알폰소가 대공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리아드네는 그를 탓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대공녀의 모습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작지 않은 키의 그녀이지만 체중이 100리브라(약 34kg)는 나갈까 싶어질 수준이었다. 어린아이들이 보았다면 걸어 다니는 해골이라고 별명을 붙였을 것이다.
심각한 저체중은 피부나 머리카락과 같이 일견 몸무게와는 상관없는 그녀의 다른 부분에도 상흔을 남겼다.
아리아드네는 왜 외드 대공이 알폰소에게 아주 흔쾌히 후계자는 다른 여자의 몸에서 낳아도 된다고 허락했는지 바로 이해했다.
저 정도의 저체중이면 달거리도 없을 것이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흑발로 물들인 머리카락은 숱이 거의 없이 듬성듬성했다. 그 위를 유부녀들이 쓰는 머릿수건으로 가렸다.
심지어 그 머릿수건은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의 것으로, 갈리코 왕국의 여인들이 입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녀의 복식도 전반적으로, 아니, 사실 전적으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그것이었다. 대공녀는 기묘할 정도로 산 카를로의 최근 유행을 적확하게 따랐다.
그녀의 드레스는 짙은 색의 옷감을 썼고 가슴선이 깊게 패 있었다. 그리고 대공녀는 어색할 정도로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뒤뚱거리며 걸어온 데에는 일부 신발의 문제도 있었다.
라리에사가 입은 짙푸른 드레스는 노출이 많았다. 그러나 노출이 심하다고 해서 그게 야하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었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목둘레선은 과장을 좀 보태면 거의 배꼽까지 파였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건 앙상하게 드러난 뼈뿐이었다.
얼마나 말랐는지 얇고 푸석한 가죽 한 겹 아래로 쇄골뼈와 갈비뼈의 모양이 그대로 다 보였다.
“라리에사!”
외드 대공이 나서서 자기 딸을 제지하려 들었다. 그러나 라리에사 대공녀는 제 아버지를 깨끗하게 무시했다.
“너!”
아리아드네를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그녀는 원체도 인상을 쓸 때면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구겨진 말 같은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같았다.
“너!!”
라리에사 대공녀는 아리아드네에게 삿대질을 하며 그 자리에서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아직도 기억했다.
자기는 관객이고 주인공은 저 둘이었던 수선화 정원에서의 입맞춤을. 검푸른색 드레스를 입었던 저 여자를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좇던 알폰소 왕자를.
젊은 연인은 달콤하게 서로를 탐하고, 못생기고 후줄근한 자신만 혼자 우두커니 어둠 속에 서 있던 그 날을.
* * *
라리에사는 몽펠리에로 돌아와 항상 알폰소 왕자를 다시 만날 날을 그렸다.
‘나를 사랑하시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위해 완벽한 여자가 될 테니까.
수선화 정원에서의 그 여자는 말랐고, 키가 컸고, 달도 없는 밤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졌었다.
라리에사는 곡기부터 끊었다. 예뻐져야 했다. 그 여자보다도 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살을 빼는 일밖에 없었다.
달빛 아래에서 요요하게 빛나던 그 매끈한 목덜미와 잡으면 부러질 것 같던 손목을 가지고 싶었다.
두툼한 공단 드레스를 입고도 가느다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던 그 가녀린 실루엣이 갖고 싶었다.
밥은 챙겨 먹어야 할 것 아니냐는 어머니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라리에사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또래 아가씨들의 말만 귀에 콕콕 와서 박혔다.
- “너무 아름다우셔요!”
- “이번 달이 저번 달보다 훨씬 예뻐요!”
생으로 굶는 건 쉽지 않았다. 먹고자 하는—정확히는 살고자 하는—욕구에 굴복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긴 날에는 라리에사는 먹은 걸 모조리 토했다.
그 짓거리를 일 년 가깝게 하자 치아가 부식되고 침샘이 붓기 시작했다.
- “나 이중 턱이 생긴 것 같지 않아?”
여기서 ‘완벽하세요’라고 답하면 라리에사가 개진상을 부린다는 걸 파악한 라리에사의 수석 시녀가 대공녀도 수긍할 법한 해결책을 냈다.
- “살을 더 빼시면 그것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식사량을 조금 더 늘리고 먹고 토하는 일을 없애자고 말한 자기 선임이 날아가는 모양을 보고 학습한 호구지책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사크에서 날아오는 알폰소의 편지를 꼬박꼬박 받아 보던 라리에사는 그 편지에 과몰입했다.
「예사크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데, 오늘은 정말 호우가 내려. 건천(乾川) 가득 사나운 물이 흐르지만,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마른 땅으로 돌아가겠지. 이 전쟁도 그런 사막의 호우처럼 우리 인생에서 깨끗이 잊혀질 거야. 그렇지, 아리?」
알폰소 왕자의 편지에 했던 라리에사 최초의 가필은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갈리코어 해석을 써넣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거기에 자신의 감상을 덧붙이는 일도 추가되었다.
- 당신의 열병도 지나가는 한때의 호우일 뿐이랍니다.
그 여자에 대한 사랑 따위, 곧 잊게 되실 거예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라리에사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녀가 그 편지에 하는 짓도 점점 더 나빠졌다.
「아리, 우리가 마차 안에서 했던 얘기 기억해?」
라리에사는 중얼거렸다.
“기억하고 말고요. 기억하지요, 당연히.”
어느 마차 라이드를 이야기하는 건지 라리에사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왕자의 최측근이 투항하며 대공녀에게 모든 정보를 싹싹 긁어 넘겼다.
그녀는 알폰소 왕자와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연애사에 관해 논문도 쓸 수 있었다.
“당신은 수선화의 아가씨가 되라고 했겠지요.”
누구에게? 그 여자에게?
너무 거슬렸다. 한 가지만 고치면 완벽했다. 라리에사는 깃펜을 들어 가필을 덧써 넣었다.
L.
LAri. 당신의 사랑하는 LAri.
당신은 나에게 수선화의 아가씨가 되라고 했어요! 그랬던 것이 틀림없어요! 다음 날 있을 에트루스칸 왕국의 축제에서는 수선화의 아가씨를 뽑았을 것이고 왕자의 밀고꾼은 그날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고 보고했으니 그거 말고 마차 안에서 할 말이 무에 있겠어요?
- “대공녀님은 너무 아름다우세요.”
- “체중을 줄이신 후로 완벽해지셨어요.”
라리에사는 그날 건너면 안 되는 강을 건넜다.
그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는 했다.
진짜가 아닌 가짜 현실 속에서, 그녀를 지극히 사랑해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는 그녀의 약혼자, 아니 남편, 알폰소 왕자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져 가는 본인, 라리에사 대공녀.
문제는 그녀의 행복이 모두 가짜라고 꽝꽝 외치는 실존 인물이 대공녀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외쳤다.
“너!!!”
꿈결 사이를 떠다니며 살던 대공녀가 몇 년 만에 현실 세계로 돌아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