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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87화 (690/733)

<제387화> 걷잡을 수 없는 분노

라리에사는 아리아드네를 보자마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분노로 포효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대공녀는 삿대질로도 모자라서 아리아드네 방향으로 휘적휘적 움직였다. 손찌검이라도 할 기세였다.

라리에사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알폰소는 슬쩍 아리아드네 앞을 가로막았다.

실수로라도 라리에사가 아리아드네에게 닿지 않도록 팔을 들어올린 채였다.

그 모습을 본 라리에사 대공녀가 마치 창상(創傷)을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내 남편을 빼앗아 간 요부! 외간 남자한테 손을 대는 상간녀!”

알폰소 왕자와 그의 모국어로 의사소통하겠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에트루스칸 어 공부를 해 왔지만, 이 내용을 굳이 왕자가 잘 알아듣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욕은 역시 자신의 모국어로 하는 게 쫀득한 법이다.

라리에사의 폭언에, 알폰소는 아리아드네 앞을 가로막은 채로 외드 대공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하나 없는 무표정인 와중에, 한쪽 눈썹만 슬쩍 올라간 얼굴이었다.

남의 집 귀한 딸에게 험한 말 하기 전에 알아서 치우라는 뜻이었다.

외드 대공은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알폰소 왕자가 보내는 시선이 ‘당신의 제안이 후할 수밖에 없었어. 저런 걸 떠넘기려고 했나?’로 느껴졌다. 그는 라탄 공용어로 쩔쩔매며 해명했다.

“왕자.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 라리에사는 지금 잠시 몸이 좋지 않아서⋯⋯. 원래 이렇지 않⋯⋯.”

그 말을 들은 라리에사는 크게 분개했다.

“아버지! 나는 멀쩡해요! 지금 아버지마저도 내가 지금 이상하다는 거예요?!”

라리에사는 그간 어머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자기에게 하는 말이 지긋지긋했다.

너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잠시 아픈 것이다. 다시 밥 먹고 살 쪄서 건강해지자.

“나는 지극히 정상이야! 나는 행복해! 먹고 자고 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라리에사는 새로운 자신이 좋았다.

“나는 지금 예쁘다고요!”

퉁퉁했던 과거와는 안녕이다. 그녀는 더는 못생기고 뚱뚱한 라리에사가 아니었다.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마르고 어여쁜, 수잔느인지 아리아드네인지 누구인지 모를 그 이상향처럼 되어서 사랑받을 것이다.

마른 여자들은 언제나 누구에게든 사랑받는다.

자신의 새로운 몸이 주는 자신감에 힘입어 라리에사는 있는 힘껏 울부짖었다.

“너! 요망한 탕녀! 내 남편에게서 당장 떨어져!”

라리에사는 아리아드네에게 삿대질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자기 팔을 들어올려 보였다.

소매 통이 작은 대신 러플을 풍성하게 잡은 긴팔 드레스가 팔 선을 타고 주루룩 흘러 팔꿈치에 걸렸다.

앙상하게 마른—그러나 라리에사의 눈에는 가녀리고 어여쁜—손목이 드러났다.

맞은 편에 선 아리아드네는 되려 소매 끝으로 내려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품이 몹시 넉넉한 밝은 녹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라리에사는 아리아드네가 입은 드레스를 보고 순간적으로 열패감에 휩싸였다.

특별히 사람을 시켜 산 카를로의 유행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실시간으로 포착해오라고 했는데, 저 끔찍한 여자는 이미 다른 걸 입고 있었다.

라리에사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유행을 선도하고 있음을 이미 본인 스스로 자인하고 있었다.

‘쫓아가도 쫓아가도 끝이 없어⋯⋯!’

하지만 소맷단 사이로 보이는 아리아드네의 ‘통통한’ 손목에 라리에사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새로운 유행이라는 목표치가 제시되어도 괜찮았다. 라리에사는 이미 훌륭한 통제력을 발휘한 바 있었다.

그녀는 식욕을 정복했고 자기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도 해낸 나인데, 새 유행 따라잡기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전보다 덜 혐오스러웠을 뿐이다.

다만 라리에사 대공녀는 타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절대 수긍하지 않았겠지만 내심으로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실물은 그녀의 상상보다 더 군살이 많았다. 객관적으로 어떠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라리에사의 눈에 뼈와 가죽 외의 것은 전부 다 필요 없는 군더더기였고, 저쪽에는 군더더기가 참 많았다.

라리에사는 용기백배해 갈리코 어로 아리아드네의 외모에 대해 몇 가지 의미 없는 폭언을 퍼부었다.

이 와중에 외드 대공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복도의 먼 쪽 끝에서 어수선한 기운이 부스럭거린 것이다.

인기척. 외드 대공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 꼴을 타인에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 전에 라리에사를 끌고 딸의 처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건 딸을 위해서였다. 외드 대공은 아직도 자기 자식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라리에사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소문이 퍼지면 딸의 배필을 찾아주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대공은 언젠가 라리에사가 씻은 듯이 이 광기에서 낫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힘없이, 그러나 동시에 필사적으로 라리에사의 팔을 잡은 채 딸을 타일렀다.

“얘야, 들어가자⋯⋯.”

그는 자기 딸의 팔을 세게 잡지도 못했다. 힘을 줬다간 부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발⋯⋯.”

그러나 라리에사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 아버지를 거칠게 쳐냈다.

“저 육덕진 돼지를 도살하고 내 남편 곁으로 돌아갈 거예요! 난 아무 데도 안 가요!”

“대공녀!”

알폰소 왕자의 호통이 회랑을 울렸다.

도살, 돼지, 상간녀, 탕녀⋯⋯. 이건 알폰소가 참을 수 있는 선 그 이상이었다. 외드 대공에게 충분히 기회는 줬다.

인간에 대한 존중, 상대국에 대한 존중, 군주의 혈족에 대한 존중으로 참아넘길 수준이 아니었다.

“라리에사 대공녀! 아리아드네는 당신이 그렇게 불러도 될 사람이 아닙니다.”

“왕자님!”

라리에사가 울부짖었다.

“저, 저는 당신의 법적인 아내! 당신에 나에게 이러실 수는 없어!”

그녀는 더듬더듬 에트루스칸 어로 말했다. 실력이 상당히 늘었다.

어디로 봐도 아파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애처롭게 호소하는 모양은 불쌍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알폰소 왕자는 단호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는 충격받은 표정의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혼인이 성립하였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고, 나는 당신의 남편이 아니고.”

여기까지 말한 알폰소는 잠시 멈췄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리아드네는 상간녀가 아닙니다.”

“아악!”

라리에사의 째지는 비명이 긴 회랑을 울렸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결혼서약서에 서명한 주제에!”

그녀가 이 정도로 언성을 높이고 나면 발로아 대공저에서는 모든 것이 그녀 위주로 돌고는 했다.

사용인들은 ‘대공녀께서 발작을 일으키셨다!’라며 우왕좌왕했고, 베르나데트 대공비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공비는 그러면 기겁하며 무슨 짓을 했길래 애가 저렇게 흥분했냐며 보좌진을 잡았고, 뒤늦게 대공비에게 이 상황을 전달받는 외드 대공은 뭘 해서든 다 저 아이의 비위를 맞춰 주라는 의미로 못 이기는 척 손짓했다.

그러나 알폰소 왕자의 표정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는 대공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저 여자를 받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터졌다.

“당신이 필리프 4세가 거주하는 몽펠리에 왕궁에 불을 지르고 나를 탈출시켜주기 직전에, 서명하지 않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라고 협박했던 그 서류 말씀이십니까?”

외드 대공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게 그가 필리프 4세로부터 독립 루트를 걷게 했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라리에사를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든 덮어야 했기 때문이다.

“왕자, 왕자. 우리 장소를 이동해서 대화합시⋯⋯.”

그러나 라리에사가 제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저 남자는 아무 데도 못 가요!”

강박으로 체결한 계약은 무효다. 그러나 그 원칙이 알폰소 왕자의 혼인서약서에도 적용되느냐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그래, 내가 불을 질렀어. 하지만 그게 ‘강박’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공부는 네 옆에 찰싹 붙은 저 살덩어리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도 했다고! 교회법에서 말하는 ‘강박’은 강제로 팔을 붙들고 지장을 찍은 정도가 아니면 적용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동안 라리에사 대공녀는 알폰소 왕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거라면 뭐든지 했다.

자기 전체 체중의 1/3도 빼버렸는데 공부—정확하게는 법학박사를 불러 이 부분에 대해 자기가 알아듣게 설명해보라고 겁박하기—따위야 백 번도 더 할 수 있었다.

라리에사는 자기에게 차갑기 그지없는 황금의 왕자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신발에 타고 있어도 그는 그녀보다 훨씬 더 키가 컸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다른 여자가 안겨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나, 난 뭐든지 다 했습니다!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

라리에사는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왕자를 상상하며 식사를 줄이고, 왕자를 상상하며 그의 편지를 읽고, 그의 언어를 배우고, 그 나라의 풍습을 익혔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가서 서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폰소 왕자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대공비라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라리에사를 껴안을 타이밍이 이미 지났다. 초조했다.

그러나 저 남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무슨 짓이건 가리지 않고 다 하신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폰소 왕자는 완벽한 무표정으로 말했다.

언성도 높지 않았고 얼굴색이 붉어진 것도 아니지만 왕자가 몹시 화가 났다는 사실은 이 회랑에 서 있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살인 교사까지 하신 거면 무슨 짓이건 다 한 거 맞지요.”

외드 대공의 입술이 떨렸다. 대공은 슬그머니 긴 회랑의 입구 쪽 끝으로 다가갔다.

“문을 잠가.”

외드 대공이 그쪽에 있는 수사들에게 요구했다. 만찬이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이제 곧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올 때였다.

“대공 각하, 아직 도착하실 손님들이 남으셔서 불가합니다.”

외드 대공은 그 말을 듣자 더 기다리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긴 촛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공, 대공!”

당황한 수사의 만류를 무시한 채 외드 대공은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쾅 닫은 후 촛대를 문손잡이에 가로질러 끼워버렸다. 수공예 빗장이다.

“손님 같은 소리 하네.”

그 손님들의 출입을 막는 게 정확히 외드의 목적이었다. 이 꼴을 남에게 보일 수는 없다. 그는 황급히 딸의 옆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외드 대공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이미 만찬장 안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이었다.

일찍 도착한 소수의 손님, 그리고 특히, 집주인이라 손님 통로를 통하지 않고 본인 전용 출입구로 만찬장에 들어선 루도비코 법황의 존재를 그는 전혀 계산하지 못했다.

“살인 교사? 무슨 살인 교사?”

기다란 회랑의 가장 안쪽 문이 양쪽으로 척, 열리며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법황의 붉은 가대복과 순백의 소백의 위에 술 달린 파시아를 걸친 채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루도비코 법황이었다.

“추기경은 살인 교사 얘기 들은 적 있나?”

자기 친딸이 당한 이야기였지만 당시엔 아리아드네와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가 전혀 아니었던 데 마레 추기경은 눈알만 굴렸다.

“글쎄요.”

이거 누구 얘기지? 내 딸 얘기인가? 라리에사 대공녀가 누군가를 죽일 정도로 미워한다면 내 딸밖에 없는데?

루도비코 법황과 데 마레 추기경의 출연에 외드 대공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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