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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88화 (691/733)

<제388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살인 교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외드 대공이 소리쳤다. 그는 일단 잡아떼고 보는 걸 전략으로 정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탈출해야 했다. 후일은 내일의 내가 도모하겠지.

루도비코 법황과 데 마레 추기경 뒤로 구경꾼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트레베로에서 성황청의 각종 직분을 맡은 고위 성직자들과 각국에서 모여든 각 나라 실세인 추기경들, 용병대장 철갑의 바리아티를 위시한, 각국의 로열은 아니었으나 로열을 대신해 파견 나온 고위 귀족들이었다.

대륙 최고의 명사들이 웅성대며 복도에 줄을 섰다.

- “무슨 일입니까?”

- “살인 교사요? 이렇게 흉흉할 데가.”

- “아멘.”

들어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외드 대공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라리에사의 죄를 시인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외드 대공은 되레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알폰소 왕자! 형편없는 음해 따윈 그만두시오!”

여기서 까발려질 수는 없다. 만천하에 대고 내 딸의 흠을 인정하진 않겠다.

“당신이 내 딸과 결혼할 마음이 없어졌다고 해서 내 딸에 대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해도 되는 건 아니오!”

알폰소의 입가가 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외드 대공은 알폰소 데 카를로라는 인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서 결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합의하고 라리에사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으면 알폰소는 이쯤에서 일을 끝냈을 것이다.

그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한 일을 대중에게 폭로할 필요성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그간 시달렸던 것에 대한 억울함이나 감정적 과부하는 물론 있지만, 각자가 알아서 처리할 몫이었다.

알폰소 왕자가 보기엔 그건 손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 타고난 숙명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외드 대공은 한 톨도 손해 볼 수는 없다는—손해라기보다는 본인의 딸이 저지른 일의 최소한의 결과물에 더 가까웠지만—생각에 매몰되어, 혼사가 물 건너간 상황에서도 알폰소 왕자를 극한까지 비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주판을 굴렸다.

‘알폰소 왕자를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 여자와 결혼하려는, 여자에 미친 놈으로 몰면⋯⋯.’

외드 대공이 저런 계산을 돌리는 중에, 알폰소 왕자는 굳은 표정으로 허리춤에 찬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알폰소를 톡 치며 가방 쪽에 눈짓하자, 알폰소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적 앙갚음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었지, 타인한테까지 강요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알폰소도 슬슬 외드 대공의 짓거리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간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다.

이 와중에 자기 여자가 복수를 원한다면 손에 쥐여드리는 게 인지상정. 그는 자루를 떼어내 그녀에게 통째로 맡겼다.

아리아드네는 그 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특정 페이지를 펼쳐 알폰소에게 건네주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페이지를 흘긋 확인했다.

“대공.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게 공개되면 라리에사는 끝장이었다. 그는 외드 대공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대륙 공용어인 라탄어로 이야기했다.

“당신의 많이 아픈 딸을 데리고 갈리코 왕국으로 돌아가시오. 내 아내가 될 여자에게 대공이 딸 대신 사과하신다면 아픈 사람이 벌인 소동이라고 생각하고 내 묻고 넘어가겠소.”

알폰소의 마지막 아량. 아리아드네는 기분이 상하려다가, 그만 풋 웃어버렸다. 이래야 알폰소지.

그녀가 사랑한 금발의 소년은 언제나, 만인에게 친절하고 약자에게 따듯했다. 좋은 부분만 떼어내 올 수는 없었다.

알폰소를 선택한 이상 이건 그녀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런 부분까지 모두 합쳐서 알폰소를 사랑했다. 그의 온화한 눈웃음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았으니까.

반면에 외드 대공은 알폰소 왕자의 제의에 군중부터 곁눈질했다.

저걸 받아들인다는 건 이 사람들 앞에서 금쪽같은 내 새끼가 아프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외드 대공은 이번에는 라리에사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라고 할 것 같은 몰골에 잠시 흔들렸으나, 집에서 라리에사를 붙들고 두 시간씩 기도하는 베르나데트 대공비를 생각하자 다짐이 굳건해졌다.

‘나는 가장이다. 내 자식을 버릴 수는 없다.’

외드 대공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자기의 마지막 동아줄을 내버린 행위였다.

“당신 옆의 그 여자는 참으로 요물, 마녀, 남자를 유혹하는 마물이로군. 공명정대한 왕자의 눈을 이렇게까지 흐리게 만들어 결혼하기 싫다고 이렇게까지 우기게 만들다니!”

알폰소는 고개를 저었다. 갱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양피지 쪽지를 손에 든 채 루도비코 법황에게 다가갔다.>

“대륙의 영적 지도자, 예사크 땅의 해방자, 존경하옵는 법황 성하. 이런 난감한 일에 관여하시라는 부탁을 드리기 참으로 민망하오나. 이 종이를 한 번 읽어주시기를 청하나이다.”

법황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노트를 받아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데 마레 백작이 쥔 자루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알폰소 왕자가 저 종이를 안 가져오면 몰래라도 보여달라고 조를 생각이었다.

법황은 양피지를 보더니 대번에 킬킬거렸다.

“오 이런, 외드 대공은 자기 딸을 지나치게 올려치려고 하는군.”

옆에 있던 데 마레 추기경이 물었다.

“예?”

“자기 딸이 용사라잖어! 그대의 딸이 마녀에 세이렌이면 그걸 죽여서 퇴치하는 자는 용사 아니겠소!”

데 마레 추기경이 이게 무슨 소린가 감도 못 잡고 있는 동안, 루도비코 법황은 큰 소리로 책자를 읽었다.

「1027년 4월 12일. 데 마레 대저택의 하인을 매수해 시도한 ‘에트루스칸 여자’의 암살은 실패. 현지인이 사정에 더 밝으리라 생각, ‘꼬리’에게 후속 조치를 맡김.

⋯⋯(중략)⋯⋯

1027년 5월 18일. ‘꼬리’도 실패. 마차 축을 잘랐으나 대상이 조금 다치고 말았다 함. 당분간 몸을 사릴 예정.」

‘데 마레 대저택’ 소리가 나오자 추기경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

반면 일자와 목표를 들은 외드 대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라리에사가 왕자의 최측근을 간자로 포섭했다고 해서 그는 딸을 치하하고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놨을 때의 일이었다.

사고를 쳤다는 말에 아내가 딸 관리를 하기로 했는데, 세상에. 날짜를 보니 마누라가 딸을 관리하기는커녕 딸의 사고에 동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실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방계이긴 하지만 어쨌든 왕족으로 태어나 이득이란 이득은 다 누리고 못 볼 꼴도 수태 본 외드 대공은 단호하게 외쳤다.

“저 짓을 누가 했는지 내 알 바요? 데 마레 추기경이 원한을 많이 샀나 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항상 좋은 친구들을 만나 우정만 쌓으며 다닌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저건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 외드 대공이 저렇게 나올 줄 알았던 아리아드네는 다음 종이를 알폰소에게 건넸다.

내심 비소를 지은 채였다. 알폰소는 이번에는 내용 확인도 하지 않고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법황에게 건넸다.

손에 손을 건너 전달된 두 번째 양피지를 받은 법황은 이번에도 큰 소리로 읽었다.

「에트루스칸 국, 산 카를로 교구의 데 마레 추기경의 사생아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죽이거나, 그에 준하게 해쳐 주십시오.

1123년 3월 18일,

라리에사 드 발로아.」

“오 이런.”

법황은 부러 라탄어로 크게 말했다.

“이거, 빠져나갈 공간이 없는걸?”

법황은 사실 한쪽 편을 들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알폰소 왕자를 아끼는 건 사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십자군 전쟁의 맹장이라 사랑하는 거였지 인간 자체를 아끼는 건 아니었다.

‘중앙대륙에서 파렴치한으로 몰리면 성전 한 번 더 가겠지.’

루도비코로서는 어느 쪽이건 꽃놀이패였다. 그는 이 상황을 순수하게 재미로 대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미움이 오래갔나 보오? 23년부터 27년까지 암살 시도를 계속했어?”

외드 대공의 얼굴색이 시뻘겠다가 시퍼렜다가 새하얬다가 시시각각 변했다.

그는 할 수만 있었다면 라리에사의 손목을 잡고 이 자리에서 달려나갔을 것이다. 법황은 킬킬킬 웃었다.

“이건 외드 대공의 수하가 무능한 탓인지 아니면 데 마레 추기경의 가택 방어가 수준급인 것인지 감도 안 잡히는걸? 어떻게 4년간 시도했는데 생채기 하나 못 내나? 생채기 하나 못 낸 거 맞지, 추기경?”

아르튀르의 완벽했던 손속을 떠올리며 법황은 킬킬 웃었다.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도무지 이를 납득할 수가 없었는데,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자 남은 나날들이 모두 놀이터 같았다.

매일매일이 보너스. 오늘은 보너스가 충만한 하루. 진작에 이렇게 살걸. 살날이 며칠 안 남아서 진심으로 아깝다.

법황마저 자기 편이 아닌 와중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반박한 건 아직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맛이 제대로 간 그 딸이었다.

라리에사는 앞으로 뛰쳐나와 법황에게 외쳤다.

“그래요! 내가 그랬어요! 그래서 뭐요!”

인파 사이에 술렁임이 번졌다. 갈리코 왕국의 섭정인 외드 대공의 딸이 살인 교사를 시인했다!

“난 당신에게 모든 걸 다 바쳤어! 당신을 여러 번 구한 것도 나야! 내 영혼까지도 모두 당신에게 태워 버렸다고!”

영혼까지 모두 태워 버렸다니, 예삽교의 총본산에서 아슬아슬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외드 대공은 ‘당신을 여러 번 구한 건 나’라는 그 앞의 문장에 집중했다. 물론 잘못된 판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선택지가 몇 없었다.

“옳지! 그래! 우리가 왕자 당신을 얼마나 성심성의껏 후원했는데!”

잘 나가게 되자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 이 구도가 굳건해지면 라리에사에게 동정표라도 몰리지 않을까?

외드 대공의 머릿속이 분주했다.

사법권이 국왕에게 있는 시절이었고, 필리프가 저 꼴이니 자신이 라리에사를 재판정에 보내지 않는다면 자기 딸이 감옥에 갈 일이야 없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여론이 잠잠하다는 가정하에서였다.

에트루스칸 왕국이 성황청을 등에 업고 라리에사의 합당한 처벌을 요구하면 답이 없었다.

특히 국왕이 아닌 섭정에 불과한 그로서는 더더욱.

에트루스칸 왕국이 라리에사의 처벌을 요구하더라도 그게 헛소리처럼 들리게 만들어야 했다. 외드 대공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우리는 황금 10만 두카토를 군자금으로 알폰소 왕자에게 보내어 왕자께서 전쟁영웅이 되도록 도왔는데, 왕자께서는 지금 내 딸이 고작 당신의 내연녀를 없애려고 했다고 해서 내 딸을 버리는 겁니까?”

‘고작 살인’이라는 말에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자—외드 대공은 왕족만 모여 있었으면 아무도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텐데 성직자 나부랭이들은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황급하게 덧붙였다.

“제 딸이, 우리 라리에사가 잘못 생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아무리 내연녀라고 해도 살인은 안 될 말이지요. 그럼요.”

그러나 본심은 가죽자루에 담긴 물처럼 어쩔 수 없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럴만하지 않습니까? 저 아이가 혼자서 얼마나 속을 썩였겠습니까? 왕자비의 자리는 자기 것인데, 왕자가 자꾸 엄한 여자와 놀아나는 꼴이요!”

“⋯⋯!”

아리아드네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알폰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10만 두카토의 황금은 마르그리트 왕비가 만든 비자금이다.

어머니가 절망 속에서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하며 모아둔. 저놈들이 저렇게 홀라당 자기 공이라고 주장해서는 결코 안 될.

“이건 다 우리 라리에사가 계산할 줄 몰라서, 정략결혼 상대도 진심으로 사랑할 만큼 순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외드 대공은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해댔다.

“이렇게 착한 우리 딸을 내다 버리면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구석으로 몰아붙이셔야겠소, 왕자!”

외드 대공은 알폰소 왕자 옆에 데 마레 백작이 서 있다는 부분에서 이 10만 두카토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는 엘코를 통해 저 10만 두카토가 아리아드네 백작 개인의 돈이라고 보고받은 바 있었다. 그는 좀 쉽게 생각했다.

‘저런 젊은 여자가 재산이 10만 두카토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장부를 세고, 곳간을 공개하고, 영수증을 떼 오면 이미 다 지난 후일 것이다. 어떤 사실관계는 특정 찰나에만 중요하다. 이슈는 휘발된다.

‘진실은 상관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게 중요하다. 여기만 면피하면 이 뒤는 어떻게든 묻어버릴 수 있어.’

외드 대공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여기는 예삽교의 총본산이고, 이곳에는 각국 궁정보다 더 많은 정보가 모일 때도 많다는 사실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의 웃음이 미묘해졌다.

“10만 두카토 단위의 황금?”

그때 외드 대공이 촛대로 막아 버렸던 복도의 입구 쪽 문이 드디어 뚫렸다.

제대로 된 빗장이 아니다 보니 사색이 된 경호담당자들이 달려와 수백 번 흔드는 진동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호를 맡은 북해 연합 출신 용병들과 의전을 담당한 평수사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그런데 뛰어 들어온 사람 중에 함정이 하나 섞여 있었다. 경호와도 의전과도 관계없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장 대리, 발데사르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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