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10만 두카토는 누구의 공
아리아드네는 외드 대공의 폭탄선언에 잠시 말을 잃었다. 알폰소의 군자금 10만 두카토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비자금이었다.
외드 대공이 뭐라고 주장하건, 이건 그의 돈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아리아드네가 임의로 폭로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왕비 마마께서 무슨 수단으로 그 큰돈을 모았냐고 물어보면⋯⋯.’
그녀 선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모른다고 잡아떼도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했다.
에트루스칸 왕국에는 레오 3세가 비판적인 눈을 시퍼렇게 뜨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알폰소는 이를 악물고 외드 대공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필경 고민하는 것이리라.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이것—어머니의 이름에 먹칠하는 반대급부로 외드를 몰락시킬—을 실행할 결심은 알폰소만이 할 수 있었다.
이 틈을 타 라리에사 대공녀는 살금살금 회랑에서 기어나갔다. 뭔가를 찾으러 가는 눈치였다.
그런데 아리아드네와 달리, 알폰소에게 그 조종간을 쥐여주지 않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라파엘이었다.
‘어째 사제서원을 하고 나서 망설을 더 많이 뿌리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해둔 거짓말이 있는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유창한 라탄어였다.
“중앙대륙 최고의 명사들께서 모여 계신 이곳에서 감히 제가 발언하기 죄송스러우나.”
수사들 사이에 섞여 들어온 예쁘게 생긴 젊은 남자가 목소리를 내자 사람들은 일제히 그쪽을 쳐다보았다.
개중 몇은 자격도 안 되는 젊은이가 전면에 드러나는 게 용납이 안 된다는 종류의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무리는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데 마레 추기경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발데사르 수사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수도원장 대리로.”
데 마레 추기경은 은근슬쩍 부수도원장 대리인 라파엘을 반 급 높였다.
수도원장이 죽어서 대신 온 거라고 했으니까 이젠 수도원장 대리 맞지 뭐.
“유서 깊은 산 카를로 시의 발데사르 후작가의 장남입니다. 신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훌륭한 수완으로 성황청 에트루스칸 지부의 많은 일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유망한 청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발데사르네 애니까 그 집보다 못하면 시비 걸지 마시고, 추가로 내가 데리고 온 애니까 지금 여기서 나랑 대거리 붙을 거 아니면 입 다물라는 으름장은 덤이었다.
군중의 소요가 바로 가라앉았다.
라파엘은 추기경에게 감사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순전히 남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내가 인사까지 해야 해? 아 그리고 훌륭한 ‘수완’이 뭐요? 실력이라고 해야 더 멋있지.
하지만 남들 보는 눈도 있으니 결국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할 말은 몹시 되바라진 말들이었다. 태도라도 순순해야 했다.
“대공께 그 10만 두카토의 출처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만.”
거두절미했지만 핵심적인 지적이었다. 라파엘의 날카로운 질문에 외드 대공은 벌컥 화를 냈다.
“너 같은 조무래기가 감히 무슨 권한으로 나에게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게냐!”
“제가 권한이랄게 있을 리는 없사옵고.”
라파엘은 자기가 무해하다는 표시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제스처다.
하지만 손이 비어 있어봤자 말짱 헛거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의 진정한 파괴력은 검이 아닌 혓바닥에 있었다.
“그 10만 두카토를 배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저인데, 출처가 외드 대공이시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서 그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이건 전해 들은 말이나 풍설이 아닌, 직접증거 아닌가.
그러나 외드 대공은 오늘의 기치를 ‘무조건 우기기’로 잡았다. 그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바로 맞받아쳤다.
“배달부 주제에!”
목소리는 높았고 표정은 단호했다. 칼 하나도 들어갈 공간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현장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잔챙이 놈이 어딜 감히 큰 그림 그리는 윗전들 생각을 들여다보려고 그래?”
외드 대공의 이 말은 대부분 ‘윗전’들로 구성된 이 방의 군중에게는 꽤 잘 먹혀들어 갔다.
실무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단순 배달부 일을 한다, 는 그들의 인식에 상당히 부합하는 발언이었다. 분위기를 읽은 외드 대공은 의기양양하게 호통쳤다.
“네가 관여할 부분도 아니고 나한테 대답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부분도 아니다!”
라파엘은 정말로 송구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했다.
“그것이, 제 일은 당연히 아니지요. 하오나⋯⋯.”
라파엘은 데 마레 추기경을 흘긋 바라보았다.
“제게 그 심부름을 시키신 돈 주인이 이 방에 계셔서요.”
젊은 발데사르의 눈짓을 받은 데 마레 추기경은 흠칫 놀랐다.
추기경이 자신을 본 것을 확인한 라파엘은 턱으로 아리아드네를 가리켰고, 데 마레 추기경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심부름꾼에게 소명하실 필요야 없지만서도, 그 돈의 진짜 주인께는 대공께서 왜 타인의 공을 가로채는지 설명을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데 마레 추기경이 신호를 잘 받았다는 걸 확신한 라파엘은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저는 당시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님의 부탁으로 10만 두카토 중 선발인 1만 두카토를 들고 백중해를 건넜습니다. 성전에 참여하시는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님께 보낼 군자금이었지요. 백작님께선 이것이 성황청에서 나온 자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떨결에 이 즉흥 연극에 주연으로 참여하게 된 데 마레 추기경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저 어린 여우가 생각이 있으니까 이 일을 벌이는 거겠지.
“맞습니다. 그 돈은 에트루스칸 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소중한 마음으로, 성황청 산 카를로 지부를 통해 예사크로 전달되었습니다. 외드 대공께선 무슨 연유로 그 큰돈이 자기 자금이라고 주장하시는 건지 확실히 밝히셔야 할 것이오!”
아리아드네 역시 눈치가 백 단이었다.
지금 라파엘과 아버지가 무엇을 시도하는지,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이 모금 따위는 한 적도 없으면서 왜 굳이 ‘백성들의 모금’이라고 밝히는지 그녀는 바로 알아챘다.
‘아버지가 주관하는 산 카를로 대교구나 에트루스칸 지역 전부를 다 모아도 10만 두카토가 장부에서 빠져나간 흔적이 없는 거지. 정확하게 ‘10만 두카토’라고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는 것도 혹시나 장부상 그 액수를 못 채웠을 때 금액은 확실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몸을 뺄 구멍을 만들어두는 거고.’
아리아드네의 듣기 좋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회랑 안을 가득 메웠다.
“정확히는, 성황청 자금에 저희 가문의 개인적인 자금이 추가된 돈입니다. 흑사병 시절에 운이 좋아 곡물로 돈을 좀 만졌습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흑사병 때 곡물과 밀랍으로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은 중앙대륙 전체에 자자했다.
“금액은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모금에 저희 가문의 미력한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당시 심정이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이게 라파엘과 데 마레 추기경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성황청 자금에서 나갔다고 주장할 건데, 이게 우리가 미리 말을 맞춘 게 아니라 지금 즉흥적으로 대는 거니까 나중에 장부를 까보면 금액이 안 맞을 거 아니야. 성황청에서 없어진 금액과 10만 두카토 사이의 차액은 데 마레 가문에서 댄 겁니다.’
정확한 번역이었다.
발데사르 하나와 데 마레 둘이 펼치는 티키타카는 거침이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외드 대공에게 유감은 전혀 없다는 듯이 툭, 얹었다.
“엄연히 에트루스칸 왕국 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모금이었는데, 도대체 외드 대공께선 어떻게 이게 갈리코 왕국의 돈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얼핏 보면 퇴로를 열어주는 것 같은 발언, 그러나 실지로는 외통수로 몰아가고 있었다.
“혹여나 왕자님께서 10만 두카토 이상의 군자금을 두 번 받으셨습니까?”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가 지금 데 마레 추기경을 거스르는 발언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요.”
알폰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돈의 출처 문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장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제게 20만 두카토의 군자금이 있었으면 헤자즈 권역을 넘어 묵해(黙海)까지 싹 밀고 왔었어야지, 예사크만 달랑 함락시키고 돌아오진 않았겠지요.”
루도비코 법황의 입가에 아주 큰 웃음이 걸렸다. 그래, 이래야 나의 장수지. 성전을 이기고 돌아온. 헤자즈를 정복할.
이번에는 법황이 물었다. 이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하겠다고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쩌다가 이 10만 두카토를 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둘이 된 건가?”
외드 대공이 뭐라고 우길지 우물우물하는 것을 군중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갈리코의 외드 대공, 에트루스칸 왕국 산 카를로의 데 마레 추기경. 공교롭게도 이 둘은 알폰소 왕자의 처가 자리를 놓고 겨루는 가문들이었다.
- “진짜로 왕자를 구해준 인어공주가 누군지 찾는 상황이로군요.”
- “왕자는 지금 데 마레 추기경의 딸에게 완전히 빠졌으니 외드 대공으로부터 받은 군자금이더라도 데 마레 추기경의 도움이라고 하고 싶지 않을까요?”
- “하긴. 외드 대공에게서 군자금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라리에사 대공녀를 아내로 맞기엔 무리가 있으니 아예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수도 있겠네요. 도움은 외드 대공에게서 받고 아내는 다른 데서 맞이하면 좀 그러니까요.”
수군거리는 인파를 뚫고 꾸역꾸역 들어온 다른 목소리 하나가 높게 외쳤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항상 실없는 소리만 하고 돌아다녀서 라탄어를 한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게 만드는 만프레디 경이었다.
“법황 성하께서 처음 보셨던 종이, 기억하십니까?”
“인상 깊은 내용이었지.”
데 마레 대저택의 하인을 매수해 ‘에트루스칸 여자’의 암살 시도를 했다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나오는 ‘꼬리’는 원래 알폰소 왕자님 휘하에 있던 엘코 경이라는 기사를 일컫는 것이온데.”
그 이름에 인파 속에 섞여 있던 바리아티 후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작자는 갈리코 왕국에 포섭돼 적극적으로 간자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몹시 급하게 뛰쳐 들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설명을 이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외드 대공의 사주를 받아 왕자님의 개인적인 편지들을 훔칠 정도였지요.”
외드 대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들켜서 힘들어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처리할 조무래기가 하나 더 늘어서 분노하는 얼굴에 가까웠다.
“그놈이 훔친 편지 중에는 황금이 에트루스칸 성황청에서 보낸 것임을 알리는 편지도 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이쯤 되어서는 포기할만하련만 막무가내로 우기기로 한 외드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언성을 높였다.
“그놈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놈이 훔쳐 간 편지라도 남아 있나?”
대공은 만프레디 경에게 격하게 삿대질했다.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날조할 거면 그만두게! 알폰소 왕자, 그쪽도 그쪽 수하를 잘 챙기시오! 이 쓸모없는 소모적인 중상모략 따위⋯⋯.”
“중상모략이 아닙니다.”
아리아드네였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외드 대공의 아우성을 끊었다.
“이쪽은 서류가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자금 출처를 증빙할 수 있습니다. 대공께서는 가능하십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외드 대공과 똑같은 지르기였다.
아리아드네는 대공이 어차피 지금 피차 서류가 없음을 기화로 위세로 우겨 이 상황을 돌파코자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누구의 ‘말’에 더 신빙성이 있는지를 다투는 개싸움이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피차 증거가 없을 때 루도비코 법황이 외드 대공의 편을 들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외드 대공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당하고 당했던 게 자기 딸의 자리를 훔쳐 간 아리아드네가 자기에게 대드는 것을 기화로 터진 듯했다.
“이 하찮은⋯⋯! 이젠 하다 하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계집애가 이 외드에게 대거리를 하는 게냐!”
외드 대공의 노여움이 하늘을 찔렀다.
사실 에트루스칸 왕국의 데 마레 백작이 갈리코 왕국의 외드 대공에게 먼저 말을 걸 의전 순서가 되지 않는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터무니없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나부랭이들⋯⋯!”
“에트루스칸 놈들이 터무니없다는 점에는 동의해, 외드.”
묵직하게 가라앉은, 하지만 동시에 뱀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복도의 끝에서 울려왔다.
그의 뒤에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절망적인 표정을 하고 남자의 수하에게 붙들려 있었다. 가죽 부대 하나를 껴안은 채였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땅속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나타난 남자는 벽에 손을 짚은 채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렇지만 나한텐 그 자금의 출처를 정직하게 밝힐 수 있겠지?”
눈그늘이 가득한 얼굴로 등장한 남자는 다름 아닌 갈리코의 국왕, 필리프 4세였다.
“말해 보게, 외드 대공. 그 10만 두카토는 어디서 난 돈인가?”
국왕의 얼굴에 기만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나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무려 10만 두카토나 되는 돈을 국고에서 횡령해 타국의 왕자에게 무단 후원한 건가, 아니면 기존에 한 횡령이 너무나 쏠쏠했던 나머지 그대의 곳간에 10만 두카토가 쌓여 있었던 건가?”
새하얀 얼굴에 얹힌 잔인한 웃음은 점점 진해졌다.
“말해 봐, 횡령이야, 탈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