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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90화 (693/733)

<제390화> 외드 대공의 공포

외드 대공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오금이 저려오는데 이게 힘줄의 문제인지 근육의 문제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외드 대공의 눈에는 지옥에서 그를 잡으러 기어 올라온 망령처럼 보이는 필리프 4세는 망령에 걸맞은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점점 더 대공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횡령이면 반역도 덧씌울 수 있겠어. 나랏돈을 빼서 외국인을 원조하다니.”

“으, 으⋯⋯.”

외드는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탈세라고 주장하고 싶겠지. 그렇지만 잘 생각해.”

필리프 4세가 외드 대공을 노려보는 일직선의 공간을 인파가 쫙 갈라지며 피했다.

갈리코 국왕이 사냥감을 잡으러 갈 길이 통행을 방해하는 것 하나 없이 텅 비었다.

필리프는 노래하듯 외드를 얼렀다.

“어차피 시간 문제야. 난 대공을 체포해서 몽펠리에로 돌아갈 거고, 인신구속 시켜놓은 채로 대공의 온 가문을 뭔가가 나올 때까지 털 테니까.”

필리프는 고개를 기웃, 했다. 외드를 가둬놓은 사이에 다시 광증이 도지면 어떡하지?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털어 고민을 떨어냈다.

제정신 돌아올 때까지 계속 가둬두면 되지. 이게 무슨 고민인가. 고민이라고 쳐도 외드가 할 고민이지 그가 할 고민은 아니었다.

“무슨 죄목으로 잡아넣어야 할까?”

삼십 대 후반인 젊은 국왕의 눈알이 광기로 희번들했다.

사실 누가 봐도 필리프 4세는 정상은 아니었다.

루도비코 법황을 위시한 타국의 귀빈들이 자리하고 있는데도 죄를 뒤집어씌워 체포부터 하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몰골만 봐도 그랬다.

“어디, 죄목을 찾아보자. 날 곁눈질로 꼬나본 죄? 재수 없게 쪼갠 죄?”

분위기 자체는 일촉즉발이었다. 반역죄를 들먹이는 필리프 4세를 말릴 엄두가 나는 사람은—아직까지는—없었으나 갈리코 왕의 행태가 가관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은 필리프 4세를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나 사람들은 다들 법황을 흘끔거렸다.

이때 알폰소 왕자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친애하는 사촌. 그간 몸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필리프 4세는 자신이 죽이려 했던 이종사촌 동생을 흘긋 바라보았다.

본인이 해 둔 짓이 있으니 자신에게 호의적일 리가 없을 녀석인데⋯⋯. 이렇게 끼어드는 걸 보니 방해하려는 의도 아닌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아도 몸 건강히 잘 지낸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심보가 틀어진 필리프는 무심한 듯 답했다.

“물론. 아주 잘 지냈지.”

퉁명스러운 필리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알폰소는 빙긋이 웃었다. 아주 환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터트릴 발언은 전혀 환하지 않았다.

“제가 들은 것과는 조금 다르군요.”

필리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어떤 헛소문을 들었는지.”

그는 짧게 내뱉었다. 이를 악문 채였다.

누가 봐도 필리프 4세의 상태는 정상은 아니었는데, 간신히 발을 끌고 있는 주제에 쓸데없는 객기이긴 했다.

알폰소는 필리프의 체면을 전혀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밝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

“갈리코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 오늘내일하셔서.”

“!”

알폰소 왕자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새로운 국왕이 필요하다고 하지 뭡니까.”

방 안의 청중은 사색이 됐다. 개 중 가장 볼만한 것은 외드의 얼굴이었다.

아까 국가 예산을 마음대로 유용해서 외국인을 지원한 걸 반역죄 운운한 것은 반역죄를 그 한계까지, 혹은 그 한계 너머까지 확대해석한 결과였다.

단순 횡령일 수도 있는 사건을 잡고 필리프가 위세를 부린 것이다.

그런데 국왕을 갈아치울 논의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건 진지하게 반역죄까지 논의될 수 있는 일이었다.

외드 대공이 입을 다물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직 자기 이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가장 컸다.

그러나 외드의 이름이 털리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알폰소는 싱그러운 미소로 덧붙였다.

“친애하는 외드 대공 합하의 말씀이었는데, 헛소문인가요.”

필리프는 뱀 같은 눈으로 외드를 쏘아보았다.

“⋯⋯!”

외드는 그저 폐하의 건강 걱정을 저놈이 호도하는 거라고 자기변명을 할 법도 하건만, 독사에게 쫓기는 시궁쥐처럼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필리프가 평소에 외드에게 어떻게 굴었는지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외드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속절없이 낭비하는 사이, 알폰소는 외드의 마지막 남은 탈출구에 못을 박아버렸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제게 갈리코 왕국의 국왕 생각 없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외드가 빠져나갈 구멍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외드는 사색이 되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필리프 4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마지막 생명을 끌어모은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가 외드 대공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끄아아아아아!”

단순히 목울대를 잡힌 고통 그 이상의 비명이었다. 공포가 외드 대공을 지배한 것처럼 보였다.

필리프는 멱살을 잡아 올렸던 대공을 내동댕이쳤다.

“여봐라!”

왕권이 교회에 조아려야 하는 트레베로의 심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프는 일갈했고 갈리코의 근위기사단장은 큰 소리로 답했다.

“예! 폐하!”

“저 배신자의 작위를 현장에서 박탈한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할 것이니, 저자를 당장 붙잡아라!”

“존명!”

갈리코 왕국의 근위기사단장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외드 대공을 잡아 눌렀다.

그 와중에 만프레디 경은 알폰소 왕자에게 다가가 ‘불 지른 거, 불 지른 것도!’ 하고 속삭였다.

알폰소 왕자가 곧바로 입을 열지 않자, 조급했던 만프레디 경은 자기가 필리프 4세에게 직통으로 일러바쳤다.

“그, 존경하옵는 갈리코의 국왕 폐하. 몇 년 전에 몽펠리에 궁에 났던 화재 말입니다.”

그는 갈리코 근위단장이 외드 대공을 제압하는 와중에 자유롭게 풀려난 라리에사 대공녀를 흘기며 말했다.

“그것도 외드 대공의 여식인 라리에사 대공녀가 지른 겁니다. 제가 봤습니다!”

반역 한 건 더, 방화도 추가다. 필리프는 광기 어린 눈으로 미라처럼 말라붙은 라리에사를 쏘아보았다.

“저자의 가솔도 마찬가지다.”

만프레디 경은 쾌재를 불렀다. 기사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이르다!

만프레디 경이 희희낙락하는 와중에 필리프 4세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라리에사를 샅샅이 훑었다.

마치 자기 집에서 키우던 시궁쥐 가족이 사실 정원에서 조용히 살며 쓰레기만 골라 먹은 게 아니라 안방에서 활보하며 부엌 식재료를 작살낸 걸 알게 된 집주인 같은 표정이었다.

딸 시궁쥐는 가죽 부대 하나를 소중하게 껴안고, 온전히 그 온기에 기대 국왕의 매서운 시선을 견뎌냈다.

“지금부터 발로아 대공가의 일원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며, 재판이 끝나는 대로 전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할 것이니 식솔들이 재산을 빼돌릴 수 없도록 마찬가지로 투옥하라.”

그런데, 부들부들 떨던 라리에사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그녀는 바닥을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렀다.

“당신은 날 못 건드려!”

대공녀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아버지는 필리프에게 벌벌 떠는데, 라리에사 대공녀는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듯 국왕 앞에서 버텼다.

“난 에트루스칸 사람이야!”

과연,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알폰소 왕자와 결혼했다고!”

라리에사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은 종이 뭉치였다. 졍확하게는 서류와 편지들이 든 꾸러미였다.

그녀는 이것을 찾으러 본인의 숙소로 돌아갔다가, 그만 제정신을 차린 필리프와 마주쳐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오고 말았다.

하지만 라리에사의 생각에, 이 자루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버지의 임박한 몰락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아주 소중히 보관했던, 한 장의 양피지 서류를 꺼냈다. 그녀의 목숨과도 같은 종이였다.

“보십시오!”

라리에사는 보기에도 불안정한 보행으로 루도비코 법황에게 달려가 그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혼인서약서입니다, 혼인서약서! 알폰소 왕자가 제 손으로 서명한!”

루도비코 법황은 라리에사 대공녀의 손에서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는 제 적법한 남편이고, 나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왕자비입니다!”

루도비코 법황은 서류를 쭉 훑었다. 혼인서약서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양식으로 작성된 문건이었다.

과연, 아래에는 굵은 푸른 잉크로 쓰인 알폰소 왕자의 서명도 있었다.

“흠.”

법황은 풍성한 수염이 난 턱을 손으로 쓸었다.

“그렇지. 반역과 10만 두카토의 출처와 살인 교사보다도 전에 결혼의 유효성 여부 문제가 있었지.”

그는 알폰소 왕자와 라리에사 대공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이 건부터 정리해야겠구먼.”

라리에사 대공녀는 법황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그녀에게 호의롭지 않은 기색을 알아채지 못했다.

“맞습니다! 이 건부터 정하는 것이 맞고 말고요!”

광적으로 외치는 대공녀를 내버려 두고 법황은 알폰소 왕자만 바라보며 물었다.

“왕자. 아까 자의로 서명한 게 아니라고 했었지?”

“예.”

알폰소는 간결하게 답했다.

“강제로 서명하게 되었다라⋯⋯.”

그 옆에서 신이 난 만프레디 경이 추임새를 넣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 필리프 4세 폐하께서도 아까 정확히 못 들으셨을까 봐!”

만프레디 경 인생을 통틀어 가장 높은 권력자들 앞에서 입을 열 기회였다.

실제로 자기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지만 그는 신나서 입을 털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자기와의 혼인서약서에 서명하면 갈리코 왕궁에서 탈출시켜주겠다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서류는 멀쩡해 보였지만 재석한 성직자도 없었고 완전 야매였어요!”

만프레디 경은 곁눈질로 라리에사 대공녀를 바라보며 계속했다. 라리에사가 그래도 좀 무서운 모양이었다.

“저희 목숨을 걱정하신 왕자님이 끝내! 못내! 마지못해 서명하시자! 라리에사 대공녀가 몽펠리에 궁전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화재! 화르륵! 궁전이 다 난리!”

지난 화재 사건의 실상을 알게 된 필리프가 분노를 터트리려 했다.

그러나 미친 놈은 미친 놈으로만 이길 수 있는 법, 라리에사 대공녀의 광기 어린 집착이 더 강력했다.

“그래서 뭐!!!”

대공녀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그녀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스멀댔다.

“말했잖아! 강제로 손을 잡아 서명시킨 게 아닌 이상 강박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만프레디 경의 라리에사 대공녀에 대한 두려움은 과연 근거가 있었다. 라리에사는 잡아먹을 듯이 만프레디 경에게 달려들었다.

양쪽으로 크게 휘청이며 걷는 모양새가 좀비 같았다.

만프레디 경은 내심 ‘공격을 예상한 전장에서 갈고닦은 나의 촉! 대단한 기사 만프레디!’라고 생각하며 옆으로 크게 뛰어 대공녀의 손아귀를 피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만프레디가 있던 공간에 뛰어들었다가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네 잘난 왕자가 어쨌건 자기 손으로 내 혼인서약서에 서명했어!!! 저 남자는 내 남편이야!!!”

라리에사가 벌떡 일어서서 절규하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끊었다.

“아뇨,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라리에사는 목을 기묘한 각도로 확 틀어 그쪽을 노려보았다.

“넌 또 뭐야!”

“라파엘 데 발데사르, 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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