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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91화 (694/733)

<제391화> 나에게 했던 사랑 고백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빙긋이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의사표시가 강박이기 전에, 비진의 의사표시라는 생각은 못 해 보았나요?”

“비⋯⋯. 비진의 뭐?”

“비진의 의사표시, 말 그대로 ‘당신과 결혼한다’고 서명까지는 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는 이야기입니다. 신분행위에서 비진의 의사표시는 무효거든요.”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라리에사 대공녀를 위해, 라파엘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농담같이, 들어줄 생각이 없이 한 말을 상대방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비진의 의사표시’라고 합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에는 말한 사람 책임도 있으니까 상대방의 착각대로 해주는데요, 혼인 같은 경우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분행위에서의 비진의 의사표시는 무효입니다. ‘나중에 오빠랑 결혼할 거야’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이십 년 뒤에 찾아온 동네 꼬마를 위해서 이혼하고 결혼해줄 수는 없으니까요.”

데 마레 추기경은 비진의 의사표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저 어린 여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고 있었지만, 실무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되어 사소한 것들은 다 잊은 루도비코 법황은 이때야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라리에사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친절한 라파엘은 한 줄 요약의 선행을 베풀었다.

“그 혼인서약서, 아무런 효력 없는 종이 쪼가리라고요.”

그 말에, 라리에사 대공녀는 석상처럼 굳어서 가고일처럼 라파엘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거짓말을 했다고? 내가 동네 꼬마랑⋯⋯. 동급이라고?”

라파엘은 그러나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혼잣말의 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따박따박 말대답을 해주었다.

“그래요. 흥분한 당신을 달래려고. 어떻게든 국경을 넘어 탈출하려고.”

라파엘은 거침없이, 그저 내일은 해가 뜨고 겨울에는 추워질 거라는 말을 하는 것 같은 말투로, 라리에사 대공녀 주변의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진실을 그녀에게 박았다.

“솔직히 알고 계셨잖아요. 알폰소 왕자님께는 연인이 있었고, 당신을 전혀 여자로 보지 않았다는 거. 남자 대 여자로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는 거.”

“아니야!!!”

이건 라리에사의 역린이었다. 현실과 상관없이 라리에사의 세계에서 사실이면 절대로 안 되는 말.

“아니라고!!!”

라리에사는 허겁지겁 라파엘에게 달려들었다. 라파엘은 이번에는 조금 당황했다.

쾌검으로 유명한 발데사르였지만 지금의 라리에사는 인간 그 이상의 힘을 냈다.

라파엘의 로브 끝자락이 손발을 허우적대던 라리에사의 손아귀에 잡혔고, 라리에사가 엄청난 힘으로 라파엘을 쥐어뜯으려는 것을 북해연합 근위병 두 명이 달려들어 간신히 떼어냈다.

“Il m’aime! 알폰소 왕자님은 날! 사랑하신다고!!”

그녀는 근위병에게 붙들린 상태에서도 방언처럼 저주와 주장을 쏟아냈다.

“날 사랑하지 않았으면 왜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를 보냈어! 날 사랑하지 않았으면 왜 매일 자기 일상을 고백하며 내가 보고 싶다고 그랬어! 예사크 전쟁 중에 항상! 매일매일! 나한테 보고 싶다고 했잖아!”

이 외침에는 다들 적지않이 놀랐다. 이건 국면을 전환할만한 요소였다.

군중의 동요에 라리에사는 흥분해 두 배는 더 시끄럽고 세 배는 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함께 보았던 수선화 정원이 그립다고, 귀국하면 다시 그 정원에 가자고!”

그녀는 알폰소 왕자의 편지를 외워 암송할 수도 있었다.

“매일 전쟁터에서의 공포를 날 생각하며 이겨내고 있다고! 욘드가르에서 노획한 은 세공품은 나에게 주려고 소중하게 챙겨 두었다고!!! 나와 다시 만나 결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루도비코 법황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알폰소 왕자를 돌아보았다.

“이게 정말인가? 자네가 갈리코 탈출 이후에도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연애편지를 계속 보냈다는 게?”

이게 사실이라면 이건 비진의 의사표시 문제가 아니라 적법하게 성립한 혼인이거나, 아니면 외드 대공의 주장대로 혼인빙자 사기에 더 가까운 것이 된다.

놀란 건 알폰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한 명과 눈을 맞추고 진중하게 답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명은 라리에사 대공녀도, 루도비코 법황도 아닌 아리아드네였다.

자기를 바라보지 않는 알폰소에게, 루도비코 법황이 재차 물었다.

“참말인가?”

알폰소 왕자는 그제야 상체를 돌려 루도비코 법황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뉘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런 알폰소 왕자의 목소리를 라리에사의 째지는 비명이 덮쳤다.

“거짓말 마! 물증! 물증이 있어요! 나한테 사랑 고백한 편지가 여기 있잖아!”

그녀는 북해연합 근위병에게 꽉 붙들린 상태에서도 자기가 껴안고 있던 자루에 손을 넣어 허공에 흩뿌렸다.

마흔 장, 쉰 장, 백 장에 가까운 종이가 하늘을 날았다.

천장을 꽉 채운 양피지의 구름 밑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그걸 한두 장씩 쥐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보초를 서다 보면 온갖 상념이 다 떠올라. 잠든 네 얼굴이 그리워. 까만 머리카락, 따듯한 향기⋯⋯.」

「어제는 승전 후 총사령관 각하의 만찬이 있어 오랜만에 풍족하게 먹었어. 먹으면서도 네 생각이 나더라. 아직도 살 뺀다고 밥 굶고 있는 건 아니지?」

지금 라리에사 대공녀는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한 상태였다.

그녀의 푸석하고 새하얀 피부가 더더욱 질리게 보이는 색이었지만 지금 라리에사가 가장 소망하는 색이었다.

알폰소는 ‘검은 머리카락의 그녀’를 보고 싶어 했으니까. 저 편지를 본 라리에사는 곡기를 끊었다. 저 여자도 그렇게 예뻐졌으니까.

- “진짜 누가 봐도 연애편지네! 라리에사 대공녀 말이 맞았어?!”

- “세상에, 알폰소 왕자. 이런 꿀 떨어지는 편지를 보냈으면서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는 거요? 여자가 착각할 만하네!”

- “고의적이겠지. 예사크에서 살아남으려면 갈리코의 원조가 필요했을 테니까. 혼인빙자 아니요?”

그러나 어딘가 이상한 점을 파악한 사람도 있었다.

- “에트루스칸어 편지인데요. 갈리코 왕녀와 에트루스칸어로 편지를 써요? 라탄어 두고?”

- “그러게요. 굳이 라탄어를 안 쓸 거라면 알폰소 왕자는 모친이 갈리코 공주라 갈리코어에 능통할 거 아닙니까. 대체 왜 편지가 에트루스칸어로 쓰여 있죠?”

그 와중에, 운명적으로 원래 자기가 받아야 했을 편지를 돌려받은 남자도 있었다.

만프레디 경은 흩날리는 양피지 속에서 어딘가 익숙한 필체를 발견했다.

「만프레디 경, 많이 보고 싶어요.

부모님께서는 경이 2년째 편지 한 통 보내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셨어요. 사위 될 놈이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런 놈에게 너를 보내고 싶지 않으니 사망을 원인으로 파혼하자고 권하셨는데⋯⋯.

절 걱정해주시는 부모님을 둔 걸 행운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건 알아요.

다른 친구들은 폐물이 되기 전에 시집가야 한다, 수도원이 두렵지 않으냐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말이에요.

오, 실화랍니다. 이건 언니 친구 펠리시테 양이 저번 주에 엘바 자작 내외께 실제로 들은 말이에요.

어제 우리 집에 와서 세 시간 동안 울다 갔어요. 그렇지만 비단 펠리시테 양뿐일까요.

반대로 전 호사에 겨워 부모님께 대들고 말았어요. 마음이 많이 안 좋아요. ⋯⋯(후략)⋯⋯.」

그 편지의 뒷부분은 요새 산 카를로에서 벌어지는 재미난 일들, 기타 새로운 소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뇨라 베델리아는 전장에 있을 약혼자를 위해 현장처럼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 줄 목적 반, 무료한 자기 일상을 채우고 글로 정돈할 목적 반으로 만프레디 경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

문제는 다른 청자도 시뇨라 베델리아의 생생한 현장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산 카를로의 즐거운 일들’에는 아무래도 아리아드네 데 마레 양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부분마다 빨간 잉크로 밑줄이며 갈리코어 필기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리아드네 양은 이번 무도회에 새로운 자수 직물을 입고 나타났는데 다들 그게 어디서 들여온 옷감인지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어요. 코르넬리아 언니는 그게 어디 옷감인지 알고 있었는데⋯⋯(후략)⋯⋯.」

자수 직물에 여러 번 쳐진 빨간 동그라미와 그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갈리코어 필기들.

만프레디 경은 시뇨라 베델리아의 편지를 손에 꼭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간 베델리아 양의 만프레디 경을 향한 편지는 ‘산 카를로 통신문’같은 취급을 받으며 누군가의 관음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필경 그가 보냈던 편지들도 똑같은 신세일 거다.

만프레디 경은 인파를 허겁지겁 헤치며 베델리아가 보냈을, 그리고 그가 보냈던 편지가 더 있는지 찾으러 바닥에 구르는 양피지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리에사 대공녀가 왕자, 아니 예사크에 출정한 에트루스칸 인들의 편지를 모두 뒤져서 훔쳐 갔다는 사실에 대해 만프레디 경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물증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최초의 발견자는 그 부분을 찾아낸 후 자기가 큰 소리로 외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굳이 목소리를 높이는 첫 번째 사람이 된 이후의 여파를 생각하니 아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저히 혼자 알고 말 내용은 아니었다. 그는 옆 사람을 툭툭 친 다음에 편지의 ‘그 부분’을 보여주었다.

옆 사람도 대번에 입을 가린 채 자기 옆 사람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 부분’이 쓰인 편지가 인파 속에서 돌며 그 위치에 고요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 부분’을 보지 못했던 사람 중 외드 대공과 연이 있었거나 라리에사 대공녀의 모습에 동정심을 느낀 사람들이 알폰소 왕자를 비난했다.

- “알폰소 왕자, 당신은 갈리코 왕국에서 자기가 살아남고자 불쌍한 라리에사 대공녀를 적극적으로 기만한 겁니까?”

- “이래 놓고도 결혼은 싫다고 할 낯짝이 있어요?”

- “사내가 돼서 책임은 져야지!”

그런 목소리가 점차 커지자 소용돌이 안에 있던 한 사람이 도저히 눈 뜨고 못 보겠던지 큰 목소리로 외쳤다.

- “여러분들! 이거 보시오!”

그는 자기 손에 들려 있던 양피지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 “붉은 부분을 보세요!”

남자가 내민 편지의 본문은 푸른 잉크로 쓰여 있었다. ‘붉은 부분’은 작은 가필이라 눈에 확 띄었다.

「Caro amore mio LAri.」 (나의 사랑하는 라리에게)

편지를 본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퍼져나갔다. 거리 탓에 자기 눈으로 글씨를 읽을 수 없는 자들이 기웃대며 앞을 바라보거나, 주변 사람에게 물었다.

- “무슨 일입니까? 저 편지 내용이 무엇이오?”

처음 편지를 들어 올린 사람이 큰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 “이건 알폰소 왕자가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차마 그 사람이 동정심에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을 심술궂은 누군가가 언어화했다.

- “저 미친 여자가 알폰소 왕자가 자기 여자친구한테 보낸 편지를 훔쳐서 거기에 자기 이름을 가필해 넣었어요!”

일순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다들 거기까지는 설마 아니겠거니 했던 것이 명명백백한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아니야!!!”

라리에사 대공녀의 찢어지는 비명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아니야!!! 아니라고!!! 알폰소 왕자님은 나를 사랑하셔!!!”

라리에사는 좀 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니, 아까보다 더 흉포한 기세로 소리쳤으나 지금 대공녀의 목소리에는 좀 전 같은 ‘힘’이 없었다.

인간의 목소리는 그 절대적인 음량이 아니라 그에 귀 기울여 줄 타인에 의해 그 힘이 정해진다. 지금 라리에사 대공녀의 목소리는 힘이 다했다.

“결론을 내리겠네.”

루도비코 법황의 듣기 좋게 우렁우렁한 음성이 울렸다. 집합한 군중은 일제히 법황을 바라보았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알폰소 왕자와의 혼인서약서는 비진의표시로서 무효로 한다.”

“아악!!!!”

라리에사는 다시 한번 발광했으나 이번에는 북해연합 출신 근위병들이 바로 그녀를 찍어눌렀다.

뒤에서 남자의 팔뚝에 목이 졸려 호흡이 달린 그녀는 꺽꺽거리느라 비명을 그쳤다.

“그럼⋯⋯.”

차갑고 습한 목소리가 주목을 요구했다. 필리프 4세였다.

“제 친척은 제가 갈리코로 데리고 돌아가도 불만 없으신 것으로?”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이 쇼를 끝까지 관람했다.

원래 자기 앞에서 이따위 무절제한 소란이 나는 꼴을 두고 볼 성정이 아니었지만 기운이 없는 것 반, 소동이 정말로 대단했던 것 반으로 필리프는 관객의 위치를 끝까지 고수할 수 있었다.

쇼가 끝났으니 일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 필리프는 정말로 끝까지 주연의 자리를 차지하진 못했다.

“친애하는 젊은 국왕.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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