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티격태격
루도비코 법황은 한탄했다. 오, 천신이시여. 그나마 성황청에 남은 제일 똑똑한 사람이 얘라니.
하. 루도비코 없는 세상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나. 말세로다, 말세로다.
법황은 빽 소리를 쳤다.
“숙청은 자네가 할 일이지!”
아 이걸 못 알아듣냐.
라리에사 드 발로아는 그간 갈리코가 저지른 악행의 증인이고! 네 손아귀에 있으면 마음대로 주물러서 증언을 받아내면 되고!
나중에 갈리코 왕국 측이나 네 정치적 반대 측 추기경 누군가가 나대면 저 증언을 가지고 협박해도 되고! 어휴 답답해!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은 이야기를 듣고서도 눈을 끔뻑끔뻑하며 루도비코 법황을 바라보았다.
이건 못 알아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할 말이 있는데 안 하는 얼굴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그러나 여기서 입을 열면 늙은 여우가 아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없는데요.”
“불만 있으면 말하라고!”
“있을 리가요.”
열이 뻗친 루도비코가 벌컥 화를 냈다.
“자네 지금 ‘내가 취임하기 전에 전임자가 청소는 마치고 가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잖아, 내가 틀려?”
데 마레 추기경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딴청을 부리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게 클래식이긴 하죠.”
루도비코 법황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욕지거리는 수납이 완벽하게 되지 않아서 일부가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징그럽게 무슨 친자식처럼 굴고 있어!”
“친자식한테는 말 안 해도 알아서 훨씬 더 해주고 싶은 게 아비 마음입니다. 아 거 자식도 없는 분이 부모 심정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지 맙시다.”
“뭐?!”
“노력 많이 하셨지만 안 된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
“노력 안 했어!”
법황은 씩씩댔다.
“그리고 참고로 성직자로서는 내가 정상이고 그쪽이 나쁜 거라고!”
“네네. 그럼요. 역시 법황님. 예삽교 세계의 귀감이십니다.”
어쩐지 빈정대는 거 같았다.
“야!!”
법황은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이 주제로 오래 대화할수록 비아냥 외엔 들을 게 없었다.
“그리고, 내가 몸이 이 꼴인데 며칠이나 더 산다고 필리프를 내 손으로 치고 가나? 자네는 석 달 안에 조사 다 할 수 있어? 필리프도 필리프지만 지금 포르토 공화국 놈들도 같이 조져야 하잖아!”
포르토 공화국이 성전의 보급과 물류 일체를 담당했다.
알폰소 왕자의 편지가 죄다 라리에사 대공녀 손에 들어가 있다는 소리는 포르토 공화국의 누군가가 외드 대공에게 포섭되었다는 소리였다.
그것이 단독범행일지 총독까지 연루된 집단 범죄일지는 파 봐야 아는 일이었지만.
루도비코는 제발 연루된 윗전 나와라, 통째로 털어보자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야비하게 옴쭉거렸다.
그런데 데 마레 놈의 표정이 여전히 이상했다. 영 뚱한 것이⋯⋯.
“너 지금 ‘저 인간 조사도 안 하고 잡아 처넣는 거 전문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데 마레는 샐쭉하게 투덜거렸다.
“아, 사람 말 좀 믿으시죠.”
“대답할 때까지 딜레이가 있었잖아, 딜레이가!”
“그럴 리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자네 내 손바닥 안인 거 알고 있어?”
“우연입니다. 우연.”
루도비코는 어깨로 데 마레를 팍 쳤다. 조그만 데 마레가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루도비코는 예전에 데 마레를 괴롭힐 때 어쩌면 이런 얼굴을 보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샐쭉하고, 실룩거리고, 약간 오리너구리 같은⋯⋯.
“제 표정이 뭘요!”
루도비코는 그만 빵, 웃음이 터져버렸다. 법황은 낄낄대며 데 마레를 버리고 발을 앞으로 끌며 걸었다.
뒤에서 데 마레가 호다닥 쫓아왔다. 그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마저 웃겼다.
아 만족스럽다. 진작에 저 조그만 친구와 친해져 볼걸. 왜 살날이 며칠밖에 안 남아서.
“그렇게 혼자서 휘적휘적 가버리면 어쩝니까! 고자라고 놀려서 삐진 거예요?”
“⋯⋯.”
법황은 마지막에 했던 자기 생각을 취소했다. 죽어버려. 죽어버려 데 마레.
* * *
만프레디 경은 큰 가죽 자루에 편지를 대충 담아 왕자에게 바쳤다.
베델리아 양의 편지만 따로 모아 꺼내고, 자기가 가져가도 되냐고 허락을 맡은 뒤의 나머지였다.
만프레디 경은 오지랖 넓은 평소의 행태와는 달리, 자기와 관련이 없는 나머지 편지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만프레디 경이 여느 때처럼 굴었다면 분명히 미리 들여다보고 아리아드네에게 귀띔 정도는 해주었겠지만⋯⋯.
“뭐야, 아리. 편지 썼었어?”
라리에사 대공녀가 빼돌렸던 편지는 알폰소 왕자의 것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가 산 카를로에서 알폰소에게 보낸 편지도 그 안에 띄엄띄엄 들어 있었다.
주로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에게 보낸 편지 중 로맨틱한 내용만 빼둔 모음집이었다.
라리에사는 그 편지를 본문에 빨간 줄을 긋고 자기식으로 고쳐서 써보는, 일종의 에트루스칸 어 교보재로 썼다.
“이리 내, 보지 마!”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편지를 잡아채려 애썼다. 알폰소는 실실 웃으며 어깨를 쓱 뒤로 빼며 그녀의 손아귀를 피했다.
아리아드네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해가 풀리기 전, 내가 너한테 편지 썼다고 얘기할 땐 제발 좀 믿어줬으면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지금 당장 저 편지들이 다 하늘로 증발해 버렸으면 싶었다.
아리아드네도 양심은 있으니 체자레 어쩌고 한 편지는 부치지 않았다. 그건 애초에 편지라기보단 고해성사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알폰소는 눈치가 귀신같았다. 앞서 보낸 편지의 행간에서 뭔가를 읽어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쪽팔렸다!
편지가 답장이 와야 편지지 혼자서 하는 독백은 결국엔 일기장처럼 변해버린다.
혼자서 감정을 줄줄이 털어내는 줄글은 아무래도 나중에 열어보면 남과 함께 볼만한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마음도 모른 채 자루를 뒤적여 아리아드네의 편지를 쏙쏙 골라갔다.
필체가 개발새발이 아닌 편지만 집으면 되니 분류도 편했다.
「갈리코에서 탈출해서 예사크로 향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어떤 고초를 겪은 거야? 그렇지만 갈리코에서 도망친 곳이 사막의 전쟁터라니⋯⋯. 이번에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더 걱정돼.
팔라지오 카를로에서는 네 군자금을 준비하던 와중에 갑작스러운 지연 소식⋯⋯ (후략)⋯⋯.」
“그만둬!”
“왜, 이게 뭐 어때서. 계속 내 걱정 해 줬네.”
알폰소가 잡은 첫 편지는 그나마 양호했지만 그다음은 징징거리는 편지였다.
「너무 보고 싶어. 가브리엘레가 저번 주에 자기 정혼자를 소개해 줬어. 입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둘이 계속 손을 잡고 있는 거야.
아, 가브리엘레의 정혼자가 부러운 건 절대 아냐! 오해는 하지 마. 그냥 둘이 꼭 붙어 있는 모양이 좋았어. 네 품에 안겨서 네 냄새를 맡고 같은 공기를 느끼고 싶은데. ⋯⋯ (후략)⋯⋯.」
“그만 봐!”
아리아드네가 편지를 잡아채려 재차 덤벼들었지만 알폰소는 손쉽게 비켜나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돌려줘!”
“돌려달라니. 나한테 보낸 거면 내 거 아닌가?”
알폰소도 이제 슬슬 구력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아리아드네의 언어 공격을 흘려냈다.
그는 자기 팔에 매달려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는 아리아드네를 달고도 끄떡없이 다음 편지를 펼쳐 들었다.
아리아드네는 물리적 탈취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으로 방침을 수정했다.
그녀는 가죽 자루에 손을 넣어 의기양양하게 알폰소의 편지를 쥐었다.
“나도 읽으면 되거든?”
알폰소도 잠시 갈등했다. 내가 별의별 헛소리를 저기 다 써놨을 텐데. 하지만 쪽팔림보다 호기심이 더 셌다.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읽어라.”
오호라. 그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 아리아드네는 정신 공격을 하기 위해 편지를 잡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사막의 밤은 춥고 적군은 달리는데, 고향의 기억으로 버티는⋯⋯. 알폰소 너, 생각보다 문학 소년이었구나?”
알폰소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짓던 미소에 균열이 갔다.
다행히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기 전, 그의 여자의 눈에 새로운 먹잇감이 포착되었다. 그녀는 양피지의 한 구절을 들여다보았다.
“욘드가르에서 노획한 은 세공품⋯⋯.”
“아.”
성전 초기에, 정말 아무것도 없이 갖고 있던 금붙이마저 내다 팔던 시절에 적 도시를 함락시키고 빼앗은 것이었다.
“나한테 줄 거였어?”
알폰소는 얼굴을 붉혔다.
“어, 아니, 그게⋯⋯.”
“왜 대답을 못 해? 설마 다른 여자 준 건 아니겠지.”
왕자는 크게 도리질 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근데 어딨어!”
당시에는 귀하다고 생각해서 아리아드네에게 주려고 잘 챙겨 뒀었다.
부하들을 먹일 귀리 빵으로 바꿀 수 있는데도 끝내 품에 넣고 꺼내지 않은 은 한 조각이었다.
하지만 귀국하고 나니 산 카를로는 예사크의 작은 도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화려했다.
자연히 조그만 은귀걸이도 초라해 보였다. 산 카를로에서 좋다는 모든 것을 다 누린 아리아드네에게 내밀기엔 뭔가 부족했다.
“새 걸로, 좋은 걸로 해 줄게.”
“싫어! 난 그게 가지고 싶어!”
압박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에게 그의 편지를 더 읽게 두면 안 될 거 같았다.
알폰소는 재빠르게 자기 손의 세 번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제도 그제도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한 끼씩 먹었어. 흑사병은 한 꺼풀 사그라들었지만, 식량난이 심하니까,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식사를 자제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받았어. 합리적인 이야기인 거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중략)⋯⋯. 네가 꼭 잘 챙겨 먹고 있으라고 그랬었는데. 약속도 못 지키고.」
이번 편지에는 알폰소도 잠시 동요했다.
아리아드네가 밥도 못 먹고 다녔을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조금 전, 라리에사의 폭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리. 괜찮은 거지?”
그는 다짜고짜 ‘네 식습관은 요새 어떠하냐’ ‘체중 관리에 너무 강박적이지는 않으냐’ 등등의 무거운 주제를 던져 아리아드네를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응? 뭐가?’라고 대답하면 그냥 아무 일 없는 듯 넘어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는 여자는 중앙 대륙 전체에서 눈치가 가장 빠른 여자였다.
애초에 알폰소가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어볼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알폰소가 들고 있는 편지의 내용을 슬쩍 쳐다본 그녀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확신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안겨들었다.
“괜찮아.”
아까 편지를 빼앗으려고 버둥대던 힘보다 훨씬 폭신한 정도의 접촉이었지만 알폰소는 일부러 그녀를 안은 채 뒤로 크게 굴렀다.
“어이쿠!”
“아하핫!”
알폰소에게 끌어안긴 채 소파 위를 뒹굴게 된 아리아드네는 크게 웃었다.
아리아드네를 간단하게 기분전환 시킨 알폰소는 그녀를 자기 배 위에 앉히고 이마에 키스했다.
“나 때문에 그런 폭언 듣게 한 거 미안해.”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양손에 허리를 잡힌 채 고개를 저었다.
“라리에사 드 발로아가 미친 탓인걸.”
알폰소는 두터운 손으로 그녀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만 아니었어도 그런 여자와 얽힐 일 자체가 없었을 텐데.”
“중앙 대륙 최고 미남과 만나려면 내야 하는 세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농담으로 뭉개려던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표정에 여전히 우려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진짜 괜찮아. 뚱뚱하다느니 문란하다느니, 다 신경 안 써.”
그녀는 자세를 낮춰 알폰소에게 상체를 밀착했다.
“미친 사람의 평가잖아. 진지하게 듣는 거 자체가 시간 낭비하는 거야.”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안아 올려 그녀의 녹색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많이 변했어.”
그녀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싫어?”
“엄청 기특해.”
그는 아리아드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많이 컸어.”
알폰소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먹은 빵이 너보다 몇 덩이가 많은데!
하지만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상식의 선 안에서 할 수 있는 항의를 했다.
“겨우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두 살 차이면 완전 크지.”
아리아드네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 두 살 차이 크다고! 그러니 회귀한 나는 얼마나 더 짬밥을 많이 먹었겠냐?
그러나 알폰소는 정론을 펼쳤다.
“1107년에 태어났으면서.”
그는 아리아드네의 목덜미를 입술로 훑으며 내려갔다.
“1105년이랑 1106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알폰소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아.”
맞는 말이기는 한데.
“1105년에 내린 눈도, 1106년에 있었다는 무지개도 넌 못 봤잖아?”
“으응. 딱히 너도 기억이 나진 않을⋯⋯.”
“쉿.”
알폰소의 상체가 점점 더 위로 올라와 그녀에게 밀착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각도로 몸통을 곧추세우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이 남자의 허리 근육은 미쳤다.
“이렇게 건드릴 때마다 귀여운 소리나 내면서.”
“아앗.”
어느새 알폰소와 그녀의 자세는 거꾸로 뒤집어져 있었다. 그녀가 아래에, 그가 위에.
“자꾸 그렇게 부정할 거야?”
알폰소는 두 팔을 그녀의 양어깨 옆에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셔츠 깃 사이로 말도 안 되는 가슴 근육이 엿보였다.
잘생기면 오빠지. 아리아드네는 항복했다. 그녀는 알폰소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아줘.”
알폰소는 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