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라리에사 대공녀의 최후
“라리에사 드 발로아. 내일은 성황청 내사원에서 사람이 파견되어 당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할 예정입니다.”
라리에사 대공녀, 아니, 평민 외드의 여식 라리에사 드 발로아는 트레베로 내부의 수녀원으로 끌려왔다.
- 철컹!
라리에사의 담당 수녀는 그녀를 흰 눈으로 감시하며 문을 닫았다. 오래된 나무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라리에사가 감금된 카탄차 수녀원은 지체 높은 여성이 입감되는 수도원이 으레 그렇듯 사고 친 귀족 여성을 넣어두는 수용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되레 중앙 대륙 전체에서 모여든 엘리트 수녀들의 각축장에 더 가까웠다.
교육에서의 등수, 승진 순서, 보직 배분 등으로 내부에서 알력이 많았다.
자연히 분위기는 몹시 엄숙했다. 그건 지금 인지기능이 무너진 라리에사조차도 알 수 있었다.
- ‘다들 날이 섰어⋯⋯. 저들은⋯⋯. 날 싫어해!’
다만 현상을 알아채더라도 도달하는 결론의 방향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결국 저것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라리에사는 사방이 돌로 된 조그만 수녀원의 개인실 안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기가 담당하게 된 업무가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라리에사의 담당 수녀는 라리에사에게 명령했다.
“의복을 갈아입으십시오.”
담당 수녀는 검박한 견습 수녀의 옷을 내밀었다.
“지금 걸친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의복은 여기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라리에사님.”
그 말에, 라리에사는 거칠게 반응했다.
“대공녀님! 라리에사 대공녀님이라고 불러라!”
그러나 몽펠리에의 온 저택을 벌벌 떨게 만들던 그녀의 비명은 여기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발로아’라고 부르지 않고 경칭이나마 붙여준 것이 최선의 호의였던 담당 수녀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라리에사를 내려다보았다.
호통이 먹히지 않자 라리에사는 괴성을 지르며 침대에 주저앉아 양발을 굴렀다.
기운이 없어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게 언제였냐 싶은 폭발적인 분노였다. 하지만 담당 수녀는 라리에사의 패악과 행패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수녀는 대꾸조차 없이 라리에사에게 견습 수녀의 옷을 건넸다.
라리에사는 받지 않고 버텼다.
담당 수녀는 라리에사를 타이른다거나, 그녀에게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제발 받아달라고 빌지 않았다. 그저 옷을 내밀고 손을 뗐다.
옷이 털썩, 마루에 떨어졌다. 냉기가 스며 올라오는 차가운 돌바닥이었다.
창문 너머 검푸른 달빛이 유일한 광원인 좁은 방 안에서, 담당 수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오전 네 시 반, 아침기도를 하러 나오십시오. 개인행동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만.”
수녀는 매섭게 돌아서 방을 나섰다.
- 쾅!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라리에사는 방 안에 서린 냉기에 몸을 크게 떨었다.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날씨였지만 돌로 마감된 방은 믿기지 않도록 추웠다. 두꺼운 최고급 공단 드레스도 이 추위를 막아줄 수는 없었다.
라리에사는 하는 수 없이 지푸라기 침대 위에 단정히 접혀 놓여 있던 얇은 모포를 뒤집어썼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난 그저 왕자님에게 걸맞은 여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스스로가 불우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울면 울수록 더 서글펐다. ‘인어공주’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난 잘해준 것밖에 없는데⋯⋯. 사랑한 죄밖에, 뒷바라지한 것밖에 없는데⋯⋯.
생각이 뒷바라지에까지 닿자 라리에사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그 모든 헌신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왕자는 그 불여우를 택했다! 그녀가 알폰소에게 해 준 모든 희생은 헛된 것이었다.
그 음흉하고 교활한 것이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전부 다 빼앗아 갔으니까!
그렇게 남의 자리를 훔쳐 가 놓고 감히 ‘당신이 사랑을 몰라서 그래요’ 운운해?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잘난척하며 사랑에 관해 이래라저래라 떠들었지만 웃기지도 않았다.
그년은 행복으로 향하는 특급 비법을 쥐고 남들에게는 노출하지 않는 것뿐이다.
남들에게는 내숭을 떨며 자기는 비밀리에 무어 대륙에서 오는 피부가 좋아지는 약초와 남자를 홀리는 방중술 같은 걸 익히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모든 상황이 말이 안 됐다!
라리에사는 새삼 분노했다. 순 사기꾼 주제에!
그녀는 갑자기 혈압이 솟구쳐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니! 불여우만이 문제가 아니다. 알폰소 왕자! 그놈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예쁜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놈이면서, 내가 성화에 나오는 천사처럼 예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날 거절하고 내 가문을 모두 망쳤으면서! 고고한 척을 하며 사생아의 엉덩이나 따라다닌다! 예삽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신도라면 이럴 수 없었다.
신앙도 부실한 쓰레기! 신실한 척하는 양아치!
“모두 알폰소 왕자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해!”
라리에사는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세계는 흑 아니면 백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완벽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놈이거나. 전자였던 알폰소는 지금 라리에사의 머릿속에서 후자로 변했다.
그녀는 모두에게 알릴 것이었다.
알폰소 데 카를로가 어떻게 이 가여운 여자를 의도적으로 꼬셔 대공가의 후원이란 후원은 다 받아먹고 어린 여자로 갈아탔는지!
라리에사는 핏발선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그녀의 눈에 담당 수녀가 두고 간 견습 수녀의 옷가지가 보였다.
‘탈출⋯⋯.’
담당 수녀는 분명히 ‘내일 아침 기도 시간에 나오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라리에사는 감금되지는 않았단 소리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는 없고⋯⋯. 혼날 테니까⋯⋯.’
발로아 대공가는 곧 멸문이었다. 베르나데트 대공비는 다음 주 이맘때쯤에는 머리와 목이 붙어 있지 않을 것이다.
외드 대공은 차라리 순순히 죽여주면 감사할 지경이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자기가 혼날 걸 걱정했다. 생각이 극도로 파편화되어 있었다.
‘법황은 그 망할 년과 한통속이야.’
라리에사는 에트루스칸인들이 똘똘 뭉쳐 자기를 방해한다고 여겼다. 그게 아니고서야 고귀한 자기 말고 그 이상한 여자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갈리코인, 내 동포인 갈리코인을 찾아야 해.’
필리프 4세는 라리에사의 맑지 못한 정신에도 영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대신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몽펠리에 대주교님⋯⋯?’
예전에 마르그리트 왕비의 편지를 필리프 4세에게 밀고해 왕비를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와 별개로, 라리에사가 어릴 적 수잔느에 가려졌던 그녀를 꽤 귀여워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라리에사는 미망과 혼돈 속에서도 어찌어찌 계획을 세워나갔다.
‘몽펠리에 대주교님의 도움을 받아 중앙 대륙 전체에 알폰소 데 카를로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 알려 버리겠어!’
지금 라리에사의 판단은 이유는 모두 틀린 와중에 결론만 맞았다. 180도로 두 번 잘못 돌면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오는 것과도 비슷했다.
몽펠리에 대주교는 과거 어린 라리에사를 ‘귀여워했기’ 때문에 지금 그녀를 도와줄 인물을 결코 아니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의 법황 자리 계승이 가시화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첫 번째 사람이기는 했다.
라리에사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와 알폰소 데 카를로의 개인적인 편지를 몇 년 동안 탐독했다.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 분명히 뭐라도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특정 지역에 구휼밀을 먼저 전달해 다른 지역이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더라도, 그 판단이 합리적이었더라도 굶어 죽은 지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잡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라리에사는 몽펠리에 대주교에게 쓸모가 있었다.
그 협조를 받기 위해, 몽펠리에 대주교도 라리에사가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줄 것이다.
자기가 어느 쪽으로 이용당할진 전혀 모른 채, 라리에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 두근, 둥, 둥, 두근, 두근.
‘새롭게 시작하는 거에 흥분해서인가?’
라리에사는 값비싼 장신구를 모두 끄르고 거친 면으로 만든 견습 수녀의 옷을 주섬주섬 사지에 꿰어 넣었다.
‘추워⋯⋯.’
두근. 둥. 두근. 두근.
이상하게 춥고 팔이 저렸다. 이게 다 옷감이 싸구려라 보온이 전혀 안 돼서 일어나는 일이다.
라리에사는 법황을 탓했다. 더러운 노인네 루도비코! 감히 나를 이딴 곳에 처넣다니!
견습 수녀의 머릿수건까지 쓴 라리에사는 살그머니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 없는 손길로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 끼익.
잠겨 있지 않았다.
라리에사는 살금살금 복도로 발을 디뎠다. 두근. 두근. 두근. 둥. 둥. 두둑. 둑.
그녀의 탈출은 성공적이었다.
라리에사가 긴 회랑을 끝까지 가로질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까지도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헉. 헉헉.”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다만 숨이 찼다. 가슴이 가빠올 정도였다.
그녀는 난간을 잡고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한참을 헉헉거려도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동안이나 가쁜 숨을 몰아쉰 라리에사는 고개를 들었다. 일 층으로 나가는 계단참이었다.
온난한 기후대에 위치한 천고 높은 수도원은 벽을 온통 뾰족하고 기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채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 딱 하나의 먹색 유리를 끼운 창문이 있었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수리될 때까지 임시로 끼워 놓은 유리였는데, 외모 집착이 심한 라리에사는 그것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심야에 보는 먹유리 창문은 마치 거울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먹유리 표면이 반지르르하게 빛나며 사물을 그대로 되쏘았다.
라리에사는 먹유리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유리는 잔인할 정도로 선명했다.
퀭하게 움푹 들어간 안와, 기운 없이 풀린 눈. 광대뼈의 모양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살점 없는 볼. 겉을 감쌀 지방이 없어 비대칭이 하나도 가려지지 않은 턱.
반짝이는 공단과 엄지손가락만 한 진주에 휘감겨 살다가 거친 면 옷만을 걸친 화장기 없는 스스로를 마주하는 건 충격적이었다.
“으윽!”
라리에사는 가슴을 부여잡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꿇어앉았다.
앙상하게 마른 팔. 손목이 팔뚝보다 훨씬 두껍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음식을 거부하며 기뻤다. 나도 노력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환희. 방법이 있다는 안도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봤던 것이었다.
“흐으⋯⋯!”
그 모든 것을 다 했는데, 먹유리에 비친 자신은 평범한 것을 넘어 초라했고, 초라한 것을 넘어 혐오스러웠다.
노력의 방향성이 문제였나. 결국 그 불여시가 지껄였던 말들이 맞았나.
“으윽!”
라리에사는 양손으로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채 돌바닥에 고꾸라졌다. 가슴을 칼로 베어내는 느낌이 흉통을 쳤다.
그 느낌은 이내 상반신 전체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라리에사는 더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한번 푸드덕! 움직였지만 그뿐이었다.
향년 23세, 심장마비.
모든 인생은 피어날 가능성을 품고 시작하지만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삶도 있기는 있다.
그게 많은 것을 타고 태어났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외드의 딸, 라리에사 드 발로아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