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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96화 (699/733)

<제396화> 산 카를로의 근황

알폰소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저, 알폰소 데 카를로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저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똑같이 당신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알폰소는 목이 메어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말한 그는 아리아드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 왕자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랑합니다.”

아리아드네도 알폰소의 고백을 들으며 울컥,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깊은 청회색 눈 한 쌍이 벅찬 감정을 그대로 내보인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벅찬 감정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슬픔은 절대 아니었지만 행복 치고는 지나치게 쌉쌀했다.

비일상 속에 떠 있다가 알폰소와의 결합이 현실임을 새삼 실감한 것에 대한 충격일는지도 몰랐다.

- 또르르.

아리아드네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굴러내렸다. 알폰소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신부.”

라파엘의 목소리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신부를 불렀지만 실상 신랑에게 경고하는 말이었다.

조금 전 알폰소가 혼인 서약 템플릿에 없는 발언—사랑합니다—을 제멋대로 쳤을 때 호통을 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실기해 버렸던 라파엘은 이번에는 제지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엔 막아야 해. 쟤 그냥 두면 저 눈물 자기가 빨아먹을지도 몰라.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의 말에 얼굴에 젖은 눈물을 문질러 지우고는 혼인의 맹세를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저,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알폰소 데 카를로를 제 적법한 남편으로 맞이합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언제까지나요.”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또다시 낯익은 천장 아래에서 눈을 뜨게 된다면 그녀는 알폰소를 찾아가 손을 잡고 말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함께할 운명이라고, 그래서 내가 당신을 찾아왔노라고 말이다. 그녀는 오직 그를 위해 시간을 건너 되돌아왔다. 지금의 심정으로는 그랬다.

라파엘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은 신부에게 입 맞추셔도 됩니다.”

보통은 ‘키스하십시오’지만 굳이⋯⋯. 꼭 할 필요까지는⋯⋯.

그러나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알폰소는 고개를 사선으로 돌려 아리아드네에게 바로 입을 맞췄다.

바로 그 순간, 정오를 알리는 교회의 종이 우렁차게 울렸다.

- 뎅! 데에에엥!

황금의 도시 트레베로는 첨탑의 도시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온 시내에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높은 탑이 있었고 그 모든 탑에는 천신께 닿기 위한 크고 작은 종이 있었다.

첫 번째 종이 울리자 마치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도시 전체에서 종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 뎅! 뎅! 뎅! 뎅!

- 데에엥! 데에엥!

- 딩- 동- 댕- 동-.

온 트레베로의 축하 아닌 축하를 받으며, 알폰소는 자신의 신부를 꽉 끌어안았다.

이 순간, 그는 천신 앞에 맹세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아니 아리아드네 데 카를로는 이제 그의 아내였다. 그 어떤 위협이나 위해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영원히 아리아드네를 지킬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가족에게 남편과 가장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의무이자 사랑과 헌신의 표상이었다.

* * *

“갈리코 왕위를 제안받았다고? 그런데 거절했다고? 미쳤군, 미쳤어!”

외드 대공이 쿠데타 시도로 인해 루도비코 법황과 필리프 4세 앞에서 비참하게 몰락한 사건은 중앙 대륙 전체에 빛과 같은 속도로 알려졌다.

“그걸 안 받고 필리프한테 일러?! 옆에 그 여자를 끼고 있었다며? 이게 정녕 한낱 계집에 미쳐서 한 짓이냐?!”

레오 3세는 분기탱천해 길길이 날뛰었다.

알폰소의 욕이니 웬만하면 옆에서 물개박수를 쳤을 루비나 공작부인도 기가 질려 구석에서 몸을 사릴 정도였다.

“나한테! 보고도 없이! 이놈은 언제부터 제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 거냐!”

늙은 국왕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윤허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격분했다.

“갈리코 대공녀와 내 허락도 없이 결혼했다고 씨불일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레오 3세는 아픈 상처를 훌륭한 대안을 고안해내는 것으로 핥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아들의 혼인에 있어 아버지다운 위엄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알폰소가 예견했던 그대로였다.

“갈리코 왕국을 먹어 치울 기회를 놓쳤다면 동군연합이 가능한 다른 나라를 찾아야겠다.”

몇 년 전에는 중앙 대륙의 알폰소를 결혼시킬만한 혼처가 전멸하다시피 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훨씬 나았다.

왕자가 나이를 더 먹는 동안 몇 개국의 군주 혹은 후계자가 사망해 승계권을 손에 쥔 젊은 미망인과 지배권에 침을 발라볼 만한 혈통을 가진 공주와 방계 왕족이 잔뜩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폰소 왕자 본인이 예사크의 승장이 된 것이 혼처의 숫자를 늘린 가장 큰 요인이었다.

알폰소 왕자의 이름값이 수직 상승한 것도 분명히 도움이 되었지만 알폰소는 예사크에서 이름을 떨치기 전에도 중앙대륙 최고의 혼처였다. 달라진 점은 군사력이었다.

현재의 에트루스칸 왕국에는 알폰소가 예사크에서 만들어 돌아온 무력이 있었다.

군대가 없이는 영지의 승계권이 있고, 그 승계할 영지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지닌 공주와의 혼인만이 동군연합을 가능케 한다.

그런 여자는 당대의 중앙 대륙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딱 한 명 있었다. 타란토의 비앙카.

군대가 있다면? 망국의 공주도 동군연합을 가능케 하는 혼처로 급부상한다.

에트루스칸 왕국이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망한 나라를 점령하고 며느리의 승계권을 행사한다면? 며느리가 아들을 낳는다는 가정하에, 그 땅은 항구적으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영토다.

“북해 연합 쪽에서도 부글부글한다는 얘기가 있고. 도데사 왕국의 후계자나 트라케스 왕국의 공주도 있고.”

북해 연합 운운은 율덴부르크 대공의 영지인 슈텐부르크 공국 이야기였다.

슈텐부르크 공국은 왕국은 아니지만 그 근방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나라로, 아헨바흐 백국을 위시해 공국을 따르는 일군의 영주들을 거느리는 지역 맹주였다.

그런데 그 지도자인 율덴부르크 대공이 성전의 총사령관으로서 장기간 자리를 비웠다.

슈텐부르크 공국의 국력은 예사크에서 상당 부분 손상되었다.

예사크 땅을 바닥까지 약탈해 군비를 채웠다면 전쟁이 나라에 도리어 좋았겠지만, 신앙심 깊은 율덴부르크 대공은 성자 곤께서 탄생하신 성지에 감히 그런 모진 짓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돌아온 대공 본인의 건강도 좋지 못했다. 자연히, 불만 세력이 준동하고 검은 손이 호시탐탐 맹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세 살짜리 딸 말고도 그 근처에는 나이가 찬 처녀들이 충분히 있지 않소?”

그러니까 레오 3세의 복안은, 율덴부르크 대공가 말고 대공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와 혼인 동맹을 맺어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뒤통수를 치자는 말이었다.

“그쪽이 여의찮으면 필로아 지방 쪽 왕국들도 있고. 필로아 여자들이 북구 여자보다 더 예쁘니 그쪽으로 결정되면 아들놈은 나한테 무릎 꿇고 절해야 할 거야.”

최근에는 옛 필로아 왕국이 해체되면서 생겼던 다섯 개 작은 군주국들이 예사크 전쟁의 나비효과를 겪었다.

예사크에서 밀려난 무어 제국의 이교도들이 인접한 필로아 지방을 공격해 도데사와 트라케스 왕국을 함락시키고 도데사 왕국의 국왕을 살해한 것이다.

그 말인즉슨, 도데사와 트라케스의 승계권을 가진 왕족 여성과 결혼해 해당 국가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내기만 하면 그 땅은 영구적으로 에트루스칸 왕국에 귀속된다는 소리였다.

“혼처를 알아봐, 당장 알아봐! 빨리!”

레오 3세는 발작적으로 호통쳤다.

* * *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 백작부인은 요사이 삶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남편, 오타비오가 술주정뱅이가 되어 집 안에 처박혀 있는 사이에 콘타리니 백작부인은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사업을 도와줄’ 인맥을 만든 것이다.

물론 예전에는 그게 잘 풀리지 않았으나 요새는 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존중까지 받으며 다니고 있었다.

이건 다 친오빠, 이폴리토 덕이었다.

“오빠, 오늘 저녁에는 누구랑 만나기로 했지?”

“디파스칼 백작 내외.”

집에서 쫓겨난 이폴리토는 자기가 그간 뭘 하고 지냈는지 말하지 않으려 들었으나, 결국 여동생에게는 내막을 실토하고 말았다.

이폴리토가 큰돈을 만지게 된 계기는 연초 밀수입이었다.

연초 밀수입은 원래 카멜리아의 남편, 카루소 대표의 보카네그로 상회에서 영위하던 사업이었다.

그런데 카루소 대표가 자유도시 우나이솔라의 지도자가 되면서 카루소 대표는 자신의 상회에 연초 밀수입에서는 손을 떼도록 했다.

다루는 품목이 훨씬 많아지기도 했고, 양지로 나온 이후에도 계속하기엔 떳떳하지 못한 사업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그 빈 자리를 질 좋지 못한 여러 깡패 그룹이 차지했다. 이폴리토는 유학 시절 인맥으로 그중 하나와 연이 닿아 그 무리의 산 카를로 공급책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연초 밀수입 단체 여럿 중 하나의 중간 우두머리가 된 걸로는 지금처럼 떵떵거리고 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폴리토는 중독자로서의 연륜을 이용해 연초에 고약한 짓을 했다.

무어 제국 깊은 곳, 비단길을 따라 아주 먼 동쪽으로 가는 길목에서만 자란다는 아름다운 꽃이 있었다.

그 꽃봉오리를 따서 건조시키면 현지 말로 ‘파왁’이라고 부르는 분말이 나왔다.

이건 보통 약용으로 썼는데, 심각한 연초 중독자들 사이에선 연초에 파왁 가루를 고양이 손톱 끝만큼 넣어 같이 피우면 말도 안 되게 기분이 좋다는 비방이 돌았다.

이폴리토는 그 파왁 가루를 구해서, 파왁이라고 밝히고 판매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파는 연초에 한 알갱이씩 넣어서 팔았다.

자연히, 이폴리토가 파는 연초를 피운 고객은 다른 연초는 피울 수가 없게 됐다.

이폴리토의 조직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급기야는 이폴리토에게 연초를 제발 팔아달라고 애걸하는 신사들이 생기고야 말았다.

디파스칼 백작은 연초를 피우는 작자는 아니었지만 이폴리토의 연초에 중독된 친구를 잔뜩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폴리토의 노예가 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디파스칼 백작은 아직 자기가 백작이랍시고 이폴리토와 친해져 자기 친구들 앞에서 으스대고 싶었고, 이폴리토는 디파스칼 백작이 중독자가 되어 자기 앞에 무릎 꿇을 때까지 기다리기조차도 싫었다.

그는 디파스칼 백작에게 꿇리기 싫어 작위를 가진 자기 여동생을 데리고 가는 길이었다.

예쁘게 치장한 이사벨라는 오빠에게 물었다.

“더 거물은 안 나와?”

이폴리토는 동생에게 짜증을 내려다가, 그녀를 쉽게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했다.

“디파스칼 백작 처가가 동부 대귀족이잖아.”

동부건 북부건 이폴리토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폴리토는 어디까지나 산 카를로 총판이었으니까.

“네가 알아서 잘 꼬셔 봐.”

그 말에 이사벨라는 생각에 빠졌다. 이폴리토에겐 큰 기대가 없었다. 자리나 알선하면 족했다.

이사벨라는 1만 2천 두카토를 어디선가 끌어와야 했다. 지금은 남자들로부터 받는 선물을 팔아 현금을 일부 확보한 상태였지만 그걸로는 턱도 없었다.

그놈들은 자기가 주머니를 좀 더 열 의사가 있음을 비추긴 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이사벨라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랐다.

이사벨라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난 백작부인이라고!’

창녀처럼 아무 남자에게나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는 짓 따위. 백작부인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다.

물론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추호도 없다’는 말은 정정한다.

한 방에 1만 2천 두카토를 당겨줄 만한 사람이 있으면 뭐 고려는 해볼 생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사벨라에게 접근한 잔챙이 중에는 그럴 만한 남자가 없었다.

돈이 모이는 곳으로 가야 했다. 황금 근처에서 알짱거리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이사벨라는 마차 안에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지금 다른 한 명은 입술을 깨문 채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오빠, 이폴리토의 마차를 타고 바톨리니 백작가의 현관을 떠나는 이사벨라를 커튼 뒤에서 훔쳐보는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 백작부인, 미니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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