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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98화 (701/733)

<제398화> 이폴리토의 궁리

비앙카의 서신은 길지 않았다.

타란토의 공녀는 간단하게, 애초에 아리아드네의 지시대로 쫓던 루크레치아의 유모는 이미 사망한 상태여서 쓸모있는 리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증인들이 나타나 루크레치아의 부정과 이폴리토가 추기경의 친자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만 기술했다.

편지의 마지막 줄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언니가 산 카를로로 돌아오시면 새로 나타난 증인과 입수한 증거를 그쪽으로 보낼 테니,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아리아드네는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잘하잖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귀족의 업무상 서신이었다.

비앙카는 타란토로 돌아가면서 아리아드네로부터 영지 관리를 일부라도 직접 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어린 공녀님은 그 조언을 충실하게 따랐다.

비앙카는 겐나로소 자작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았던 영지 관리 중 일부분을 인계받았고, 그 성적이 썩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아이의 사적 쪽지 같았던 타란토 공녀의 편지는 이제 누가 봐도 어엿한 공적 서신의 태를 띠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일취월장에 흐뭇했던 것도 잠시, 아리아드네는 편지의 내용에 주목했다.

‘드디어!’

이폴리토의 출생을 추기경에게 폭로하는 건 루크레치아의 죽음 이래로 아리아드네가 계속 고대하던 일이었다.

드디어 그 꼴 보기 싫은 거머리를 집안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지금 당장 타란토로 가장 빠른 파발을 보내면 도착하는 데까지 일주일, 다시 올라오는 데까지 일주일 정도가 걸릴 것이다.

밤낮없이 말을 바꿔 타며 도로를 달리는 시간 기준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분명히 ‘증인’이라고 했다.

‘증인이 있다고? 유모가 죽었는데?’

아마 유모 주변인이 아닐까, 라고 아리아드네는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알려면 젊은 시절 루크레치아의 주변인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여자고, 그중에서도 나이가 꽤 있는 여자일 것이다.

중년의 아주머니 내지는 노인이 파발마를 갈아타고 밤낮없이 달릴 수는 없으니 최단 시간보다는 좀 오래 잡는 편이 합리적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일필휘지로 비앙카에게 보낼 답장을 써 내려갔다.

「최대한 빨리 부탁해.」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잠시 펜을 멈추고 고민했다. 비앙카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편지가 무사히 수신인에게 도달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물론 믿을 만한 사람 편에 직통으로 보내는 편지였으니 분실 내지 도난은 실존하는 위험이라고 보긴 어려웠으나 어쩐지 찝찝했다.

라리에사 사태가 산 카를로 전역에 끼친 해악이었다.

그녀는 결국 간단하게만 적었다.

「⋯⋯나도 비앙카에게 알려주고 싶은 소식이 있어. 편지로 쓰기 조금 어려운 이야기니까 믿을 만한 인편을 보내줘. 구두로 전할게.

훌륭한 군주가 되어가는 것 같아 기쁘다. 늘 건강하고 잘 지내고 있길 바라.」

아리아드네는 편지를 잘 써서 밀랍으로 봉해 자신의 수하에게 건넸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은 아리아드네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호기심에 골똘히 고민했다.

‘도대체 이폴리토는 누구 아들일까?’

* * *

다음 스텝은 줄리아와의 면담이었다.

라파엘은 산 카를로 공의회 개최 전에 수도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전에 아베르루체 수도원에 들러야 했다.

그런 연유로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이 써준 편지를 들고 줄리아를 단둘이 먼저 만나게 되었다.

아리아드네와 반갑게 인사한 줄리아는 오빠의 편지를 받아 와락 폈지만, 그 줄글을 읽으면서 그녀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오빠가⋯⋯. 내 이야기를 너에게 했어?”

줄리아의 입장에선 라파엘을 믿고 그에게 자신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었다.

아리아드네에게도 말하지 못한 건 그게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서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부모님께 알릴 만한 연애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지만, 상대방의 사정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의 안위와 안전을 위해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안 됐다.

그런데 상의도 없이 아리아드네와 알폰소 커플에게 홀라당 그걸 다 불어버리다니⋯⋯.

게다가 라파엘의 편지는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았다. 알폰소와 아리아드네가 직접 들고 가는 편지이니 안전이나 비밀에 대한 우려 때문도 아니었다.

애초에 라파엘은 남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산 카를로의 분위기’ 따위, 귀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무의미한 소리다.

라파엘의 편지가 짧은 건 순전히 귀찮아하는 성격 탓이었다.

「너도 언제까지나 네 이야기를 비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아리아드네 양에게 다 털어놓고, 네 애인에게도 알폰소 왕자 커플에게는 곧이곧대로 이야기해도 되고, 또 그래야 한다고 설명 좀 해 다오.」

여동생에게 쓴 편지는 상당히 꼰대스러웠다.

실시간으로 일그러져 가는 줄리아의 표정을 본 아리아드네는 손사래를 쳤다.

“라파엘은 그저 ‘줄리아의 남자친구와 이야기해보셔야 한다’고 말하기만 했어. 난 자세한 내용은 전혀 몰라.”

결백한 척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치밀어오르는 호기심을 간신히 누르는 중이었다.

도대체 남자친구가 누구길래 이래? 수도에 갈리코의 귀족이 있었다고? 왜 나한테는 줄리아의 연애 얘기가 금시초문이지? 어떻게 나한테도 얘기 안 해줄 수가 있어?

줄리아의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하지만 않았어도 아리아드네는 그녀의 목을 잡고 탈탈 털었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야. 누구길래 나한테까지 비밀이야!

“있지, 줄리아.”

하지만 지금은 줄리아와 라포르를 쌓을 때였다. 아리아드네는 자기 근황부터 고백하기로 했다.

“나, 결혼했어.”

이 폭탄선언에 줄리아는 순간 자기 고민을 모두 잊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한 타이밍 늦게 물었다.

“알폰소 왕자님이랑?”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있다가, 크게 웃었다.

“너무 잘됐다! 진짜 축하해!”

그 잠시간의 침묵 동안 혼자 떨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결혼한 거야! 아니, 이 결혼 이야기, 나한테 해줘도 돼?”

줄리아는 완전히 서글서글했고 전적으로 협조적이었다.

오빠 라파엘의 실연 때문에 아리아드네의 다음 연애를 못마땅하게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어려운 연애 중이라 결혼까지 성공한 친구를 질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순간 등골이 서늘했던 참이었는데 줄리아의 기탄없는 축하를 받고 나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줄리아는 웃으며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난 너는 잘될 줄 알았어.”

그녀는 아리아드네가 처음 산 카를로 사교계에 등장했을 때를 회상했다.

털이 반쯤 뽑힌 중닭 같은 몰골을 한 사춘기 소녀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태도로 데 마레 정부와 데 마레의 금지옥엽 옆에 불편하게 끼어 앉아 있었다.

없는 돈으로 호화로운 데 마레 대저택 안에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스며들려고 노력하던 아리아드네의 착장은 오히려 그래서 눈에 띄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좋은 것에만 둘러싸여 자란 줄리아의 눈에는 그 묘한 비정합성이 바로 보였다.

그걸 낮추어보고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줄리아는 다른 것들을 겹쳐 사교계에서 통용되는 바로 그 아이템들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낸 그 창의성에 혀를 내둘렀었다. 얘는 뭐가 돼도 되겠구나.

그렇지만 산 카를로 최대 신흥 부자가 된 걸로도 모자라 알폰소 왕자의 왕자비까지 될 줄은 몰랐지.

아리아드네는 웃으면서 물었다.

“진짜? 잘 된 거 맞아?”

결혼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알폰소와 서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마음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아리아드네 앞에는 아직도 장애물이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었다.

국왕의 허락, 비밀 결혼의 공표, 왕자비 책봉⋯⋯. 누군가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만 하면 되는 다른 케이스를 더 잘한 결혼으로 칠지도 모른다. 게다가 줄리아는⋯⋯.

“넌 체자레 백작 파였잖아.”

줄리아는 아리아드네의 말에 비로소 언젠가 있었던 알폰소 왕자 대 체자레 백작 토론회를 생각해내곤 한 번 더 크게 웃었다.

그녀는 양손을 내저으며 항변했다.

“아냐, 아니야! 체자레 공작이 잘생겼다는 거지 결혼하기에는 알폰소 왕자가 훨씬 낫지.”

“오호.”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집요했다.

“얼굴은 그쪽이 낫다?”

줄리아는 정색했다.

“이러지 맙시다, 우리.”

하지만 그 딱딱한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줄리아는 다시 한번 표정을 무너뜨리며 깔깔 웃었다.

“정말 축하해. 얼굴도 알폰소 왕자님이 제일 잘 생겼어. 결혼 선물 해 줄게. 뭐가 갖고 싶어?”

아리아드네는 받았다.

“나는 그럼 연애 시작 축하 선물 해 줄게. 도대체 언제부터 사귄 거야?”

“그게⋯⋯.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됐어. 물 흐르듯이⋯⋯. 오늘부터 우리는 정식으로 교제합니다, 뭐 이런 게 없었어.”

줄리아는 그녀의 남자친구와 사귄다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을 수가 없는 처지고 그녀의 애인은 부모‧형제 없이 아예 혼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줄리아는 웃었다.

“내가 스며들었지.”

끝까지 싫다는 남자를 쫓아다니며 의뭉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길 5년, 이제 줄리아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반쪽이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만족스럽게 웃는 줄리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야, 이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줄리아는 이 남자도 싫다, 저 남자도 싫다, 집에 들어오는 혼처를 쳐내기 바빴다.

아리아드네는 줄리아가 괜찮다고 하는 남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다가 전혀 아니어서 기억의 저편으로 치워뒀던 사람이 생각났다.

“혹시⋯⋯? 설마⋯⋯?”

줄리아는 조그맣게 웃었다.

곧이어 발데사르 가문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차를 얹은 트롤리를 끌고 프랑수아가 들어왔다.

조금 전, 아리아드네의 외투를 받고 그녀를 응접실까지 안내해 주었던 발데사르 가문의 일 도메스티코였다.

“프랑수아.”

줄리아가 일 도메스티코를 불렀다. 그런데 하인을 부르는 것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 어조였다. 애정과 존중이 뚝뚝 떨어졌다.

“당신이 직접 아리아드네와 이야기해봐야 하겠어요.”

아리아드네는 입을 벌린 채 몹시 잘생긴 발데사르 가문의 일 도메스티코를 바라보았다.

프랑수아는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줄리아를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한낱 하인으로서는 그 집의 고명딸에게 절대로 할 수 없는 품세였다.

“당신이 짐작했듯이, 알레망 법 대사면은 필리프 4세가 갈리코의 후계 문제와 관련해서 제안한 것이 맞았어요.”

줄리아는 천천히 설명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을 허용해줄지 말지에 대해 곧 결론이 날 건가 봐요.”

줄리아는 고개를 돌려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이분들이, 그러니까⋯⋯. 왕자비 마마라고 해야 하나?”

아리아드네는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알폰소와의 결혼을 줄리아가 예상치 못한 남자에게 바로 이야기해서가 아니었다.

‘왕자비’란 단어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적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니야. 공식 직위 같은 거 없는걸.”

아리아드네와 알폰소의 결혼은 천신님 앞에 떳떳하기 위한 결합이었다. 인간의 인정을 받은 결합은 아니었다. 최소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산 카를로 공의회를 주재하는 사람의 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음. 뭐 그래.”

줄리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친구의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결혼했으면 다 된 거 아닌가?

“어쨌든 알레망 법 대사면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오늘 다 밝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프랑수아.”

섬세한 외양의 미남은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신과 희열, 흥분이 뒤섞인 눈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물었다.

“당신의 원래 이름은 무엇인가요?”

* * *

산 카를로 공의회 개최 소식은 중앙대륙 전역에 퍼졌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아름다운 수도에, 전 대륙으로부터 명사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핫핫핫! 저희 아버지께서 성황청에서는 좀 방귀 좀 뀌시는 편이죠!”

이폴리토는 파안대소했다. 좋은 포도주를 오른손에, 극소량의 파왁 가루를 넣은 연초를 왼손에 든 채였다.

그 앞에 있던 귀족 남자들은 이폴리토의 묘사가 구역질 날 정도로 고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나 나름의 이유로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일부는 성황청 궁무처장으로 임명까지 된 실세 중의 실세, 데 마레 추기경의 아들과 척지고 싶지 않아서였고, 일부는 파왁 연기에 이미 취할 대로 취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지 못해서, 그리고 나머지는 파왁 연초의 유일한 공급책인 이폴리토를 거스를 수 없어서였다.

마지막 부류가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쳐 주었다.

“축하드립니다! 능력 있는 분은 역시 계파와 상관없이 빛을 보시는군요.”

첫 번째 부류도 아부로 입술을 적셨다.

“추기경께 경하드립니다. 제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참 잘 됐군요!”

“산 카를로 교구의 홍복입니다.”

그때 구석에 처박혀 있던 누군가가 삐딱하게 물었다.

“데 마레 선생, 그런데 추기경 예하와 요새 연락은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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