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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99화 (702/733)

<제399화> 좀 더 높이

삐딱한 남자는 산 카를로의 토박이 귀족이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대충 이폴리토에게 딱히 얻을 것이 없는, 평균적인 산 카를로 민심을 대변했다.

산 카를로의 진짜 토박이가 보기에 데 마레 가문은 사실 가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15년 된 외지인 가족이었다.

거기서 수상한 일로 돈을 만진 작위도 없는 놈이 성직자 아버지를 호가호위해 자기들과 맞먹으려 드는 게 영 고까웠다.

남자는 자신의 의심을 숨기지 않은 채 이폴리토에게 대놓고 물었다.

“데 마레 대저택에는 백작과 추기경, 두 분만 기거하신 지 오래라고 하던데요. 이미 연 끊은 아버지 이름을 파는 거 아니요?”

“⋯⋯사내가 나이가 차면 집안에서 독립하는 법이요!”

이폴리토는 숨도 안 쉬고 반박했으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귀족 가문의 후계자는 집을 비우는 일이 없었다.

형님에게 밀려난 차남이나 삼남 이하가 새로운 기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이 집의 경우 차녀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작위를 받았으니 그녀가 장남이라고 치더라도, 차남 이하가 독립을 같은 도시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귀족의 격에 걸맞은 고택을 새로 장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데 왜 멀쩡한 저택 두고 밖으로 나간단 말인가? 같은 건물에서 부대끼기가 껄끄러우면 별채도 있는데?

“독립이라고 칩시다. 집 나간 자식이 부친 안부 차 방문도 안 하시오?”

“어허! 내 뒤꽁무니라도 쫓아다닌 거요?”

뒤 구린 일이 몹시 많은 이폴리토는 벌컥 성을 내며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의 일에 주둥이 들이미는 사람은 딱 질색이오!”

상대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교류도 없으면서 아버지 이름을 팔고 다니시는 거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폴리토는 기분이 크게 상했으나 어쨌거나 이 모임에서 그는 부외자였다.

다들 산 카를로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가 출신으로, 지대(地代)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인데 그 혼자만 상업—마약 판매도 상업이라면—에서 들어오는 돈으로 이 모임에 끼었다.

부자연스럽게 많은 금화를 뿌리며 여기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지만 자신이 이 그룹에 진정으로 속하지 않는다는 걸 본인부터가 아주 잘 알았다.

“아이고, 그만하시게!”

“거 좋은 날 만나서 뭐 하러 안 좋은 소리를 하나.”

“웃어, 웃어, 한 잔 더 해!”

그나마 이폴리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끼어들어 시비를 말려 주었다.

덕분에 이폴리토는 결투를 거는 등의 극단적인 짓 없이도 체면치레를 했다. 하지만 그는 절감했다.

이제 슬슬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붙을 때가 왔다. 돈은 돈대로 쓰고 천시는 천시대로 받는 깍두기 노릇은 더는 사양이다.

모임을 파하고 귀가한 이폴리토는 며칠 후 이사벨라를 만난 자리에서 여동생에게 명령했다.

“너, 아버지를 찾아가 봐라.”

화해조차도 자기 손으로 청하지 못하는 겁쟁이는 정찰병을 먼저 보내 물꼬를 트고자 했다.

“뭐? 갑자기 왜 이래.”

이사벨라는 질겁했다.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고 부르짖고 집에서 쫓겨난 이후로 이사벨라는 데 마레 대저택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았다.

오타비오가 망하고 한 번쯤 아버지를 찾아가 볼 만도 하건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건 이사벨라 나름의 곤조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아버지는 날 수녀원에 처박았다고! 내가 제일 어려울 때! 나를 배신하고! 아리아드네 그 망할 년 편을 들었다고!”

“알아, 아는데.”

이폴리토는 ‘내가 행세하는 데 내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아빠의 배경까지 필요하다’는 말은 죽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사벨라를 위하는 척 여동생을 살살 구슬렸다.

“요새 아버지에 관해 들려오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아.”

“무슨 얘기가 도는데?”

“산 카를로 공의회를 기점으로 아버지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대!”

이사벨라는 싫어하면서도 솔깃한 표정이었다. 이폴리토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사벨라가 제일 반응할 것 같은 떡밥을 던졌다.

“지금 콘타리니 대저택 강제집행이 될 듯 말 듯 하면서 안 되고 있잖아. 아버지가 힘을 써 주시면 그것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심드렁했다.

“강제집행 막으면 뭐 어쩔라고.”

강제집행이 이루어지면 콘타리니 대저택이 확실하게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소유가 되지만, 강제집행을 막는다고 해서 그게 다시 오타비오의 품에 돌아오는 건 아니다.

연옥처럼 불확정한 상태에서 기약 없이 떠다닐 뿐이다.

이사벨라가 저 저택을 돌려받으려면 1만 2천 두카토가 생겨야 했다.

“그런다고 어디서 돈이 나와?”

1만 2천 두카토는 확실히 아버지가 대줄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게다가, 콘타리니 대저택은 돌아와봤자 오타비오의 소유였다.

그녀는 요사이 남편과의 사이가 극악으로 나빴다.

“게다가, 강제집행 중단돼 봤자 그 새끼 좋은 일만 하는 건데. 내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기어 다니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지!”

오타비오가 콘타리니 가 안주인의 반지를 빼앗아 간 날 이후로 이사벨라와 오타비오 사이에 대화라곤 없었다.

물론 고함과 비명도 대화로 친다면 그것은 간혹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짧으면 3분 길면 세 시간. 아무리 길어도 유의미한 의사 교환이 되진 않았다.

딸 지오바나는 오타비오의 누나, 클레멘테의 아랫사람들이 돌봤으니 이사벨라 부부는 긍정적인 화제로 이야기할 일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계가 좋아지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이폴리토는 조금 각도를 바꿔 던져보기로 했다.

“아버지와 친해지면 네가 갈 수 있는 모임도 늘어날걸?”

이 말에는 이사벨라가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혹할 만한 미끼였다.

그녀의 최초 목적은 거물이 모이는 곳에 자유로이 출입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1만 2천 두카토를 구할 만큼 큰돈이 모이는 곳에 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1만 2천 두카토가 어떻게 자기 수중에 들어올지에 대해선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만 가서 눈으로 보면 뭔가 떠오르겠지, 하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좀 더 부자인 사람, 좀 더 높은 사람을 만나면 그 순간에 취해 버렸다.

자기가 왜 더 큰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는지 그 목적성마저 잃어버렸다. 일종의 중독 상태였다.

“출입 가능한 모임⋯⋯?”

“그래. 이번 산 카를로 공의회에 루도비코 법황 본인이 직접 행차할지도 모른다는 카더라가 있어.”

이사벨라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법황! 중앙대륙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휘두르는 사람!

“아버지가 알현 자리를 마련해줄지 누가 알아?”

추기경이 제 사생아들을 데리고 법황을 만난다는 건 그 자체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최근 권력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던 이사벨라는 얼마나 많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지 알았다.

법황을 만나 할 대화도 없었고 그로 인한 경제적 혹은 신분적 이익도 딱히 없었지만 이사벨라는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아 불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욕심만으로 싫은 감정이 누그러지진 않았다.

“아 그래도. 나더러 아버지 앞에 기어들어 가라고?”

“눈 한번 딱 감아.”

이폴리토는 이사벨라를 부추겼다.

“아버지 근처에 착 붙어 다니면 계속 떨어지는 콩고물이 있을 텐데 지금 그거 하나를 못 해? 오빠가 얼마나 자존심 다 버리고 힘들게 돈 벌어오는지 몰라? 그거에 비해서는 네가 아버지한테 고개 한 번 숙이는 건 새 발의 피다?”

요즘 생활에 들어가는 자잘한 비용을 이폴리토가 대주는 정기적인 용돈으로 처리하고 있던 이사벨라는 오빠의 으름장에 흠칫, 긴장했다.

이폴리토가 직접적으로 그녀를 위협한 것은 아니었으나 취약한 입장에 처한 그녀는 이폴리토의 아주 작은 뉘앙스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자, 할 거야 안 할 거야?”

이사벨라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욕심 반, 강권에 밀린 것 반이었다.

“⋯⋯뭐, 연락 한 번쯤이야⋯⋯.”

이폴리토는 이사벨라를 전적으로 이용코자 했으나 윽박지르는 대신 그녀를 설득하느라 심력을 썼으니 자신이 여동생을 위해주는 아주 좋은 오빠라고 생각했다.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잘하고 나면 오빠한테 연락해라?”

이폴리토는 항상 이사벨라의 얼굴을 보고 돈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인편을 통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와 잘 풀고 나면 오빠한테 연락하라는 소리는 바꾸어 말하면 그전에는 돈 타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란 소리였다.

이사벨라는 이폴리토의 눈에 안 띄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자유. 자유를 원해.

* * *

“제 이름은 프랑수아입니다.”

아리아드네는 그 말을 한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회색과 청색이 섞인 아주 커다란 홍채였다.

남자의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으나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앙 왕조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청회색 눈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그 눈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한 사람이다.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그 눈이 브리앙 왕조의 청회색 눈 그 자체였으니까. 이 남자의 눈은 그런 빛깔이 아니었다.

“제가 잠시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아리아드네의 말에 프랑수아는 웃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정말로 갈리코 왕국의 루이 왕자님이셨으면 마르그리트 왕비님, 혹은 알폰소 왕자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아셨겠지요.”

젊은 남자는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그랬다면 일이 훨씬 쉽게 풀렸거나, 아니면 반대로 이미 죽은 목숨이었겠지요.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제 풀네임은 프랑수아 드 생트-샤펠입니다.”

줄리아가 보탰다.

“원래는 생트-샤펠 백작가야. 생트-샤펠 가문은 필리프 4세가 즉위할 때 숙청당했어.”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작위와 영지는 환수당했습니다. 환수당하기 전에는 생트-샤펠 가문의 삼남이었지요. 이제는 두 형님 모두 돌아가셔서 장자라고 소개해야겠군요. 아니,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셨으니 가주인가요.”

작위도 빼앗긴 판에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몰락한 가문에 홀로 남은 남자 프랑수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어려서 루이 왕자님의 놀이 동무였습니다. 필리프 4세의 세력이 왕궁을 덮쳤을 때 최후까지 왕자님 곁에 있었지요.”

지금 아리아드네가 궁금한 것은 한 가지였다.

“라파엘은 나에게 당신을 왜 만나보라고 한 거지요?”

이 남자가 루이 왕자 본인이 아니라면 라파엘이 만남을 권한 이유는?

“루이 왕자님께서는 혼인을 하셨으나 후사는 없으셨지요.”

브리앙 왕가는 둘째인 루이 왕자를 첫째인 필리프 왕세자보다 먼저 결혼시켰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일이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최우선순위 왕위계승자의 배우자 자리를 채울 때는 둘째 이하보다 고려할 일이 더 많았다.

차남부터는 상대방의 가문이나 지참금도 덜 중요했고, 당사자끼리의 호감도 결정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루이 왕자의 배우자는 샹스의 앤으로, 갈리코 왕국 북부 자치공작령의 딸이었다.

루이 왕자와 잡음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 나가던 그녀는 필리프 4세가 궁정을 장악하며 함께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외부에 퍼진 내용이 사실과 다르군요?”

“예.”

프랑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샹스의 앤, 그러니까 왕자비께선 왕궁을 탈출하는 데까진 성공하셨습니다. 그때 건강이 상하셔서 지금은 천신님 곁에 계시지만.”

그는 성호를 긋고 말을 이었다.

“루이 왕자께는 유복자가 있습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갈리코 왕좌의 최우선순위 왕위계승자가 될 아이였다.

“바로 이 산 카를로 근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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