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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00화 (703/733)

<제400화> 루이 왕자

프랑수아는 루이 왕자의 유복자가 에트루스칸 왕국에 도달하게 된 연유를 풀어놓았다.

샹스의 앤은 친정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앤에게는 남자 형제가 없어 공작위는 삼촌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그 삼촌은 필리프 4세를 적극 지지했다. 루이 왕자가 국왕이 되면 자기 아내의 권리에 기반해 공작령을 내놓으라고 주장할까 봐서였다.

그런 삼촌에게, 그의 영지와 갈리코 왕위의 계승권이 둘 다 있는 오촌 조카를 맡길 수는 없었다.

대신 프랑수아는 샹스의 앤과 루이 왕자의 유복자를 모시고 남쪽의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향했다.

루이 왕자에게 항상 호의적이었던 에트루스칸 왕국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의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였다.

“하지만 산 카를로에 도착하고 나니 수도 전체에 갈리코 첩자들이 득실대더군요.”

프랑수아는 왕비의 최측근인 카를라 부인을 통해 왕비와 접선하려고 틈을 엿보다, 상인으로 가장한 필리프 4세의 끄나풀이 왕궁 출입까지 하며 카를라 부인을 만나는 것을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를라 부인의 디외도네 가문은 루이 왕자의 편을 들었다가 프랑수아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작위를 박탈당했고, 죽지 않은 가족은 모두 투옥당했다.

그런 사람마저 필리프 4세와 작당했다면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때 경거망동하지 않았던 게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지요. 그 뒤로 왕비 폐하께서는 곧 돌아가셨고, 그 아드님인 알폰소 왕자께서도 오래 나라를 비우시게 되었으니까요.”

사실 알폰소 왕자가 국내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연락은 안 했을지도 모른다, 고 프랑수아는 고백했다.

갈리코 첩자들이 날뛰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안면도 없는 데다가 필리프의 적극적인 주선 하에 갈리코의 대공녀와 혼담이 오가는 알폰소 왕자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는 믿을 수 있습니다.”

“파혼해서 그런 건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건 확인 사실이었을 뿐이지요.”

알폰소 왕자의 군세가 에트루스칸으로 돌아온 이후로 갈리코 첩자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알폰소는 엘코 경의 처형 사건 뒤에 갈리코인들이 배후로 버티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휘하 기사들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적의 스파이를 찾아냈다.

프랑수아는 갈리코인들의 커뮤니티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어 자리 잡은 중견 상인, 번듯한 무역상, 음식점 주인 등으로 살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여러 번 보았다.

다 위장한 갈리코 첩자들이었다. 그는 왕자의 귀환 이후 첩자 색출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알폰소 왕자의 노선을 확신했다.

“샹스의 앤께서는 에트루스칸 왕국에 도착하신 지 얼마 안 돼 고열로 돌아가셨습니다. 루이 왕자님의 아드님께서는 제 미진한 돌봄 하에 계셨지요. 한동안은요.”

자기의 돌봄이 얼마나 미진했는지 생각한 프랑수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영아에게 생우유를 먹였다가 전신 발진으로 갈리코 왕위계승자를 죽여버릴 뻔했던 일은 결코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수아는 약간의 목돈을 가지고 있었다. 몽펠리에 궁에서 탈출할 때 가지고 나왔던 귀중품과 죽은 앤 왕자비의 패물을 처분해 만든 돈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영원히 먹고 살 수는 없었다.

그는 남은 돈을 모아 아기 생활비 조로 주며 루이 왕자의 아들을 산 카를로 교외에 있는 한 마을에 맡겼다.

프랑수아 본인은 산 카를로에 남았다.

갈리코 왕국의 사정도 살펴야 했고, 루이 왕자의 핏줄을 의탁할만한 끈이 어디 없나 수도에서 알아봐야 했고, 동시에 아기 왕자의 생활비를 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가 왕자님을 맡긴 분들은 자식이 없는 중년 부부셨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집안이 점점 잘 풀리더군요.”

애초에 생활에 보탤 겸 겸사겸사해서 아기를 받아들였던 중년 부부는 수입이 늘자 프랑수아가 보내는 아기의 생활비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들은 대신 아기 아버지로 알고 있던 프랑수아에게, 돈은 됐으니 더는 아이를 찾아오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참담한 심경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갓 말문을 튼 아기를 혼자 건사할 방도가 없었다.

가계에 윤기가 돌기 시작한 부부는 아기 왕자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기 시작하기도 했다. 라탄어, 암산, 간단한 운동 등.

“모셔 올 방도를 강구했지만 제가 모셔 오는 게 어느 모로 보아도 왕자님께 좋은 일이 아니더군요.”

시골 농가야말로 완벽하게 안전했다.

아기 왕자의 정체를 발설하면 에트루스칸의 번듯한 귀족가에 당연히 몸을 맡길 수 있겠지만 그 뒤로는? 집주인의 의사에 따라 정치적 격랑에 속절없이 떠내려가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줄리아가 덧붙였다.

“내가 우리 집에 데려오자고 이야기했지만, 프랑수아가 거절했어.”

프랑수아는 고개를 떨궜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줄리아의 가문이 자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루이 왕자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었다.

만나는 여자를 위해 돌아가신 주군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벽증적인 면이 있는 프랑수아를 몹시 괴롭혔다.

프랑수아의 긴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던 아리아드네는 처음부터 꽂혔던 생각을 입 밖에 냈다.

“이번에⋯⋯. 알레망 법 대사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갈리코 왕국의 최선순위 왕위계승자는 루이 왕자님의 유복자로군요?”

“맞습니다.”

필리프의 조카. 현 갈리코 국왕과 삼촌 관계에 있는 인척. 사촌인 알폰소나 북해 연합의 공주, 그레도 왕국의 대공보다 한 발짝 앞서 있는, 명실공히 확고한 왕위계승자다.

“그분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루이. 루이 왕자님입니다.”

“루이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리아드네가 입을 열었다.

“국왕이 되기에 참 좋은 이름이군요.”

타국의 킹메이커가 되기를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갈리코 왕국의 차기 국왕 자리를 놓고 사생아 쟝과 유복자 루이가 겨루게 되었다.

* * *

아리아드네는 지체하지 않았다. 바로 사람을 보내어 유복자 루이를 데리고 왔다.

데리고 오는 과정은 생각 외로 쉬웠다. ‘루이를 아들로 받아들인 중년 부부’는 공교롭게도 라지오네 양장점의 침모와 중간관리자였다.

갑자기 생활이 폈다는 시점도 라지오네 마을이 데 마레 가문의 하청을 받으며 부유해진 것과 궤를 같이했다.

아리아드네는 오랜만에 그녀의 첫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던 마리니 부인을 만나 아이의 친아버지가 아이를 찾아가고자 한다고 전했다.

양부모 측의 헤어지기 싫다는 눈물과 호소가 있었겠지만 명분에서도, 힘의 측면에서도 이쪽이 너무 완벽했다.

“그 아이⋯⋯. 어쩌면 그냥 그 농가에 계속 사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줄리아가 가벼운 감상을 얹었지만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의 신분이 너무 높아. 필리프의 후계가 확고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안 돼. 정체가 드러나면 자객이 나타나는 건 시간 문제야.”

맞는 말이었다. 루이의 정체를 이미 아는 사람만 쳐도 프랑수아, 줄리아, 알폰소와 아리아드네, 네 명이었다.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결국 루이는 채 만 이틀이 되기도 전에 데 마레 대저택에 도착했다.

유복자 루이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는 프랑수아와 줄리아, 아리아드네는 물론이고 알폰소마저도 시간을 비워 참석했다. 모두 극비리에 움직인 것은 당연했다.

데 마레 대저택에 들어선 대엿 살 언저리의 남자아이는 쭈뼛쭈뼛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아리아드네가 난생처음 이 저택에 들어섰던 날을 생각나게 했다.

‘나도 저렇게 주눅 들어서, 두리번거리지 않는 척하며 주변을 훑었을까.’

하지만 감상적인 생각에 차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었다.

남자아이가 아리아드네의 화려한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프랑수아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아이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아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집주인처럼 보이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제 아버지가 절 찾으셨다고 해서 왔어요.”

유창한 에트루스칸어였다. 어떻게 보아도 화자의 모국어는 에트루스칸어였다.

대답이 없자, 남자아이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제 아버지는 어디 계시나요?

아이의 질문은 합당했다.

이 방 안에 남자라고는 두 명밖에 없었으나 한쪽은 누가 봐도 신하의 태도로 그를 반가워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관조적인 태도로 그를 가만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물었다.

“네 이름이 뭐니?”

“루이지. 루이지 라지오네요.”

성은 양부모의 것이고 이름은 ‘루이’를 에트루스칸 식으로 읽은 것이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네 진짜 이름은 루이 드 브리앙. 너는 갈리코 왕국의 왕족이란다.”

프랑수아는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훔쳤고,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알폰소는 앞에 나서 소년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 오촌 당숙이자 네 보호자가 될 에트루스칸 왕국의 왕자 알폰소다. 만나서 반갑다.”

아이의 눈동자에 놀람과 떨림, 그리고 약간의 흥분이 동시에 차올랐다.

* * *

아리아드네는 당연하게도 유복자 루이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데 마레 저택 안에는 ‘발데사르 가문의 친척’이라고만 소개되었다.

그런 아이가 왜 발데사르 저택으로 안 가고 데 마레 대저택으로 왔는지에 대해서 집안에서 몇 가지 소문이 생겼으나 이내 사그라들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성직자가 된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자기 사생아를 차마 집에 데려가지 못하고 친구인 아리아드네에게 맡겼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알폰소는 기사 30여 기를 보내 항시 저택을 지키도록 했다. 외부에서는 왕자가 그저 자기 여자친구를 끔찍하게 챙기는 거려니 했다. 뭐, 그것도 맞았다.

아리아드네는 턱을 괴고 말했다.

“있지, 이게 외드 대공이 그렸던 그림 같아.”

“음? 무슨?”

그녀의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알폰소가 편안하게 물었다. 만족한 사자처럼 느른하게 풀린 목소리였다.

“루이 왕자는⋯⋯. 누가 봐도 에트루스칸 소년이더라.”

갈리코 왕국과 에트루스칸 왕국은 인종적 차이가 크게 두드러지는 편이 아니었다.

루이 왕자도 그냥 햇볕에 살갗이 건강하게 그을린, 그 나이 또래의 산 카를로 남자아이 같았다.

“갈리코 말도 서툴고, 문화는 전혀 모르고. 자기가 갈리코 사람이라는 자각도 없고.”

외드 대공이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의 아이를 라리에사의 소생이라고 속여 갈리코 왕국으로 데려갔으면 저렇게 키우지 않았을까.

혈통은 에트루스칸 인이되 갈리코 문화와 생각하는 방식을 체화한 갈리코 사람으로.

빛살 좋은 혈통은 에트루스칸 왕국에 양보하되 그 내용물이 모두 갈리코의 것인 자가 동군연합의 왕위에 오른다면 그것은 어느 나라의 승리이고 누구의 통일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대로 갚아주게 되었네.”

아리아드네의 말에 알폰소가 말했다. 그에 아리아드네가 답했다.

“루이가 갈리코 왕좌에 오를 수 있다면 말이지.”

알폰소가 웃으며 말했다.

“실현시키는 건 내 몫이로군. 내 아내는 오지랖이 넓어.”

어린 루이의 보호자는 이제 알폰소 왕자였다. 가까운 혈족은 아니었으나 유복자 루이에게 우호적인 친척은 알폰소 왕자밖에 없었다.

이제 그를 자기 날개 아래에 받아들였으니, 알폰소가 루이의 승계권을 명실공히 옹호해 주어야 했다.

알폰소는 어린 루이를 보며 기묘한 종류의 책임감을 느꼈다.

저 아이를 돌보고, 자기 몫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내가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나 말고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다.

이 기분은⋯⋯. 이질적이었다. 예사크의 사막에서 수하들과 함께 말을 몰고 거침없이 질주하던 시절과는 달랐다.

알폰소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일 그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 알폰소는 루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는 지금도 그녀 없는 삶이 상상되지 않았지만, 자기 아이의 어머니가 된 아리아드네는 또 다른 차원에서 자신과 불가분의 존재가 될 것이다.

알폰소는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끌어당겨 와락 안았다.

“으응? 왜 갑자기 이래.”

알폰소는 당황하는 아리아드네의 품에 머리를 묻은 채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햇살은 따스했고 그녀에게서는 살결과 섞인 시트러스와 사향, 나무 냄새가 났다.

그녀의 호흡에 따라 가슴이 올라가고 내려갔고, 그는 거기에 머리를 얹은 채 부드럽게 그 움직임에 따랐다.

창문을 통해 뺨을 스치는 바람은 가볍고 동시에 달콤했다. 순간에 집중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들의 평온한 시간은 까칠한 목소리로 인해 방해받았다.

“사람 불러놓고 자알 하는 짓이다.”

뒤늦게 산 카를로에 도착한 라파엘 데 발데사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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