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1화> 사람의 온기
알폰소가 황급히 옷가지에 팔을 꿰어 넣다가 중심을 잃어 바닥을 구르고 라파엘이 들어와서 용케 바지는 입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잔소리를 해댄 것을 제외하면 왁자지껄하고 즐거운 해후였다.
라파엘이 아베르루체 수도원에 내려간 것은 정식으로 수도원장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초고속승진이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데.”
그는 투덜댔다. 하지만 수도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공의회가 열리는 참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에게 일의 진행 상황을 간단히 공유했다.
“루이 왕자의 신병은 확보했어. 일단은 우리 집에서 비밀리에 보호하기로.”
팔라지오 카를로의 왕자궁이 외부 위협으로부터는 더 안전할지도 모르나, 거기에는 그 누구보다도 위험한 레오 3세가 있었다.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자객이 국왕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 똑똑.
그때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회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지금 여기에 들어올 수 있을 만한 사람도 별달리 없었던 관계로 일동은 순간 긴장했다.
“예끼 놈들.”
하지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충분히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에 출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왔으면 나한테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니냐?”
바로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자기 집이지만 딸의 공간이라고 노크는 하고 들어왔으니 그냥 밀고 들어왔다가 못 볼 꼴을 본 라파엘보다는 양반이었다.
사위인 알폰소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서 장인어른께 목례했지만 부외자인 라파엘은 도리어 삐딱하게 소파에 걸터앉은 채로 눈만 똥그랗게 뜨고 추기경을 올려다보았다.
추기경은 라파엘을 보자마자 삿대질했다.
“너! 너! 왔는데 그 교구 추기경한테 인사도 안 해?”
라파엘은 입술을 뾰로통 내밀고 말대꾸했다.
“지금 가려고 했어요. 누가 안 간대요?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인사 가란 법은 없잖아요오.”
추기경은 뒷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가 뒷목을 잡아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 집에 자기한텐 알리지도 않고 갈리코 왕국의 차기 왕위계승자가 있단 소리에 한 번 더 놀랐다. 이걸 나한테 말을 안 했다고?
추기경은 딸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고 대신 사위의 어깨를 잡았다.
“왕자.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도 꼭 알려 주시오. 쟤는⋯⋯. 자기 결혼한 얘기도 아빠한테 안 해, 집에 옆 나라 왕족이 사는 것도 얘기를 안 해, 도통 아비한테 하는 말이 없어.”
“예⋯⋯.”
4 피에디 반에 가까운 거구의 남자가 자기 딸보다 훨씬 더 살가운 이 상황에 추기경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아리아드네는 불만인 듯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꼼질댔다.
알폰소는 직감했다. 자기 여자친구는 지금 아빠에게 ‘식사하셨는지는 물었는데요’라고 항의할 기세였다.
분위기도 환기할 겸 알폰소는 라파엘에게 물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에 대한 여론은 어때?”
성직자 사이의 바닥 여론을 묻기에는 지금 막 지방 수도원을 들렀다 온 라파엘이 적임자였다.
“뭐, 항상 비슷하지. 있는 놈들이 돈 벌려고 사면권을 내다 파는구나. 노상 있는 일이다 보니 도리어 반발은 심하지 않아.”
“이런.”
알폰소의 입매가 한일자로 다물렸다. 알레망 법 대사면을 막으려면 종교계의 결사반대를 등에 업고 가는 게 가장 수월한데 여론이 생각 외였다.
데 마레 추기경이 말했다.
“나만 믿어라.”
그의 눈에서 안광이 형형했다.
“죽어도 안 된다고 내 계파를 깡그리 모아서 버티면 통과 못 시킨다.”
데 마레 추기경을 따르는 렉코라티오 베리타스 학파는 전체 세력 중 약 1/3 가량을 차지했다.
단독으로 일이 되게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저지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는 수다.
렉코라티오 베리타스는 교리 해석에 있어 원리원칙을 가장 중시했다.
데 마레 추기경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알레망 법 대사면 같은 편법적인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거부감이 컸다.
게다가 데 마레 추기경은 현재 법황의 직속에 대한 통솔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자기 휘하의 학파와 법황의 파벌을 합치면 지금 공의회에서 데 마레 추기경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아리아드네가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 알레망 법 대사면 그냥 통과시켜요.”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 양?”
“통과시키자고?”
“얘야, 난 어차피 성직자라⋯⋯. 사생아 일반이 면천되더라도 너한텐 이득이 없어.”
“알아요.”
아리아드네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지만 알레망 법 대사면을 막기엔⋯⋯. 항구가 너무 아깝잖아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알폰소가 입을 열었다.
“당신, 방도가 있는 거지?”
“빙고.”
일석이조의 묘책이 있었다. 프랑수아의 한마디에서 비롯된 아이디어였다.
* * *
“사생아 쟝을 전면에 끌어올리려 하다니, 필리프가 드디어 미쳤군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나요?”
줄리아가 자리를 피해준 후 아리아드네는 프랑수아에게 트레베로에서의 최신 근황을 알려주었다.
프랑수아는 대신 팔레 드 몽펠리에 안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전했다.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 그 해에 오귀스트 공주가 일 년 정도 몽펠리에 궁을 비웠었거든요.”
그녀가 일반적인 일로는 절대로 제 오라비 곁을 떠나는 일이 없는 여자라고도 덧붙였다.
“오귀스트가 요양 중이라는 지방 행궁에 필리프가 참 뻔질나게 드나들었었죠.”
필리프도 팔레 드 몽펠리에를 비우는 일이 없는 남자였다.
일 년간의 비정상적인 행태 끝에 오귀스트는 그 전보다 훨씬 신경질적이고 불만족에 가득 찬 상태로 몽펠리에 궁전에 돌아왔다.
“그럼 그들은 공식적으로 혼인신고나, 출생신고 따위는 못 했겠군요?”
“몽펠리에 대주교가 권력에 미친 자이긴 하지만 그런 짓은 차마 못 했을 겁니다.”
프랑수아는 딱 잘라 말했다. 일반적인 사생아와 근친에서 태어난 자식은 아예 다른 이야기였다.
몽펠리에 대주교가 갈리코 왕국의 국교를 예삽교가 아닌 뭔가 다른 종교로 바꿀 생각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출생신고서 들어온 것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 * *
“아버지. 공의회 개최 전에 몽펠리에 대성황당의 문서고를 한 번 뒤져봐 주세요. ‘쟝’, ‘필리프’, ‘오귀스트’ 등을 당사자 이름으로 한 1122년 언저리의 출생신고서가 있는지 알아봐야 해요. 그것만 확인되면 바로 움직여요.”
데 마레 추기경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바로 찾아보마.”
* * *
무뚝뚝한 둘째 딸에 지쳐 사람의 온기를 발데사르의 희멀건 한 사기꾼에게서 찾고 있던 데 마레 추기경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아빠!”
수척해진 모습의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였다.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닌, 자기 손으로 집에서 쫓아냈던 큰딸을 보고 잠시 말을 잃은 추기경의 눈앞에 대뜸 갓난쟁이 지오바나를 내밀었다.
“아빠! 아빠 손주예요!”
* * *
이사벨라는 할 때는 제대로 했다.
그녀는 그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로 포문을 열고 데 마레 추기경의 영혼을 쏙 뺄 정도로 아양을 떨고 나왔다.
중간중간 지오바나의 재롱도 확실히 도움이 됐다.
태어난 지 반년이 지나 제법 사람 태를 갖춘 아기가 눈도 맞추고 방긋방긋 웃자 데 마레 추기경은 그만 무장해제 되어 아기를 들어 올려 볼에 입까지 맞추었다.
헤어질 때쯤 되자 아버지의 망설이는 기색이 눈에 딱 보였다.
딸이 사정이 어려울 텐데 생활비를 보태줘야 하나, 아니면 날 호구 잡으러 온 것 같으니 주머니 끈을 단단히 매어야 하나 고민하는 추기경의 모습이었다.
- “돈 필요 없어요, 아버지.”
이사벨라는 선수를 쳤다.
- “돈 때문에 아빠 뵈러 온 거 아니에요.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녀는 녹아내리는 추기경의 표정을 보았다.
- “그저 가끔⋯⋯. 아버지 찾아뵈러 와도 되나요?”
추기경은 눈에 밟히는 손주와 추레해진 딸 앞에서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오냐, 라고 답해 버렸다.
하지만 집에 온 이사벨라는 거칠게 겉옷을 벗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아 진짜 짜증 나네!”
그녀는 겉옷을 하이힐로 자근자근 뭉개 밟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챙기는 척!”
아버지가 로브 춤에서 만지작거리던 금화 주머니는 소리로 짐작해보았을 때 5 두카토 남짓 같았다.
“줄 거면 좀 크게 주던가 그걸 누구 코에 붙여?! 겨우 그거 줘 놓고 나는 훌륭한 아버지지 하면서 뿌듯해하겠지?”
지오바나가 이사벨라의 기세에 겁먹어서 울었다.
이사벨라의 개인 몸종 비슷하게 된 무어인 기사 아고스토가 아기 지오바나를 안아 들어 클레멘테의 하녀 중 한 명에게 넘겨주었다.
“아고스토! 내 빨간 드레스를 꺼내 줘!”
이사벨라가 명령했다.
“빡치니까 술 먹으러 갈 거야!”
아고스토의 미간이 실룩, 했지만 이사벨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빨리! 코르셋 예쁘게 당겨!”
* * *
아고스토를 부려서 코르셋을 조이고 공작새처럼 치장한 이사벨라는 한 마리 종달새처럼 신사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 “콘타리니 백작부인, 오늘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워요.”
- “좋은 저녁이군요. 잠시 밖에서 저와 산책이라도?”
“조금 있다가 부탁할게요.”
산책하자고 청한 남자는 디파스칼 백작이었다. 훤칠하고 훈훈해서 마음에 들었다.
디파스칼 백작부인은 오늘 아파서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사벨라도 함께 산책 정도는 나가볼 의향이 있었으나 오라비 이폴리토가 언제나처럼 걸림돌이었다.
“너 들었어?!”
“빨리 말해. 나 할 일 있단 말야.”
“이번 산 카를로 공의회에서 ‘알레망 법 대사면’이 의제에 올라왔대!”
알레망 법 대사면이라면 이사벨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크게 천착해본 적이 없었다.
“그게 뭐.”
이폴리토의 강권 때문에 데 마레 추기경 앞에서 빌빌 빌다 와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폴리토는 눈치 없이 흥분해서 말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을 받을 수만 있으면 우리도 더는 사생아가 아니게 된다고!”
이사벨라는 오빠를 바라보았다.
“정실 자식! 이 된다고!”
이폴리토의 흥분은 사실 번지수가 조금 잘못된 것이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을 받은 사생아는 정실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승계에 관해서였다.
적자가 있는 사생아의 경우에는 유의미했다. 아예 작위 계승이 불가능했는데 일말의 기회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체자레와 알폰소처럼 서장자와 적자가 있는 경우에는 대박이었다. 운과 아버지의 총애 여부에 따라 서장자가 적자를 제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폴리토같이 어차피 적자가 없는 집의 경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폴리토는 알레망 법 대사면이 통과되기만 하면 자기도 정실의 아들처럼 행세하고 다닐 수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갑자기 성직자의 아들을 일반적인 백작가 자제로 봐줄 리가 만무했다.
이미 콘타리니 백작부인으로 신분 세탁이 끝난 이사벨라는 오빠를 빤히 바라보더니, 한 손을 들고 뒤돌아 걸어 나갔다.
“파이팅. 난 간다.”
“야, 야!”
이폴리토가 이사벨라를 따라가려던 차에, 웬 남자 하나가 나타나서 이폴리토의 진행 방향을 막았다.
“콘타리니 백작부인.”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가 이폴리토에겐 눈길 하나 안 주고 이사벨라에게 자기 오른팔을 내밀었다.
“바쁜 일은 다 끝나셨나요?”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의 내연남 중 하나였던 안드레아 디파스칼 백작이었다.
이사벨라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 팔에 자기 왼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