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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02화 (705/733)

<제402화> 나는 미래를 본다

이사벨라의 에스코트는 디파스칼 백작이 했지만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게 된 남자는 살바티 후작이었다.

은십자 부녀회 활동 때 간접적으로나마 안면을 튼 살바티 후작부인의 남편이었다.

젊고 훤칠한 디파스칼 대신 나이 들고 뱃살이 두둑한 살바티 후작이 이사벨라를 데려다주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그가 이사벨라에게 선물한 메추리알만 한 붉은 토파즈 티아라였다.

“어머나, 너무 예뻐요!”

“이사벨라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이 이런 물건 따위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살바티 후작은 이사벨라를 콘타리니, 정확하게는 바톨리니 가의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고 이사벨라는 못 이기는 척 그에 따랐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계산이 촤르륵 돌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야! 이게 진짜 루비면 500 두카토는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티아라는 토파즈로 만든 것이어서 세공비와 금까지 모두 치더라도 그 가치는 100 두카토 남짓이었다.

그러나 사파이어건 토파즈건 하룻저녁 웃어주는 값으로 얻을 수 있는 돈으로는 말도 안 되는 값어치이기는 했다.

이사벨라의 붉은 드레스 자락이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투명하니 빨간 토파즈 티아라가 파티장 외부를 밝히는 횃불에 비추어 반짝거렸다.

“안돼, 안 돼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러지 말고 이사벨라⋯⋯.”

“아이잉, 싫어요. 신사시잖아요?”

마차 안에서 설왕설래하는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마차의 마부석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의 아고스토가 앉아 있었다.

아고스토는 마차 안에서 비명이 들리면 뛰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의 여주인은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히 숙련된 기술자였다.

남자는 메추리알 토파즈만 뜯기고 별 소득 없이 후퇴해야 했고 이사벨라는 립스틱만 새로 바르는 선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했다.

립스틱을 정리한 이사벨라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다시 한번 경쾌하게 파티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아고스토에게, 다른 귀족가의 늙은 마부가 말을 걸었다.

“헛된 꿈을 꾸고 있구먼.”

“뭐?”

“자네 눈에 정념이 보여.”

아고스토의 덩치와 묵직한 목소리에 늙은 마부는 잠시 흠칫했으나 말을 이었다.

여기서 주인을 기다리는 일은 도무지 너무나 지루했기 때문이다.

“내 그런 젊은이들을 많이 봤지. 다 패가망신해.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게. 그래야 만수무강해.”

아고스토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나는 꿈에서 미래를 본다.”

“뭐?”

아고스토는 자신을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는 노마부에게 턱을 까딱, 했다.

“내일. 몹시 많은 비. 도시의 강이 범람할 것.”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이해를 못 한 늙은 마부가 반문했다.

“뭐? 지금은 가을이야. 이제 와서 갑자기 비가 올 리가 없잖아.”

아고스토는 입 안으로 조용히 중얼거릴 뿐 굳이 마부와 대거리하지 않았다.

‘헛된 꿈 같은 게 아니야.’

다음 날, 산 카를로에는 몹시 많은 비가 내렸다. 건기인 가을에 쉬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비는 내리고 내려 티베리 강을 범람시켰고 하류에선 많은 가축과 사람 약간 명이 죽었다.

‘나는 미래를 본다. 내가 보는 미래와 함께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산 카를로에는 와야 했던 손님과 기다렸던 소식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데 마레 추기경이 움직였던, 몽펠리에에 있는 그의 끄나풀이 보낸 소식이었다.

“예하. 보고드립니다. 몽펠리에 대성황당의 문서보관고에는 1121년~1123년 사이에 ‘필리프’나 ‘오귀스트’를 부모의 이름으로 하는 아이의 출생신고서가 접수된 적이 없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두 번, 세 번 확인했습니다. ‘쟝’, 남자아이, 왕족, 그 무엇으로 찾아도 생년, 성별, 부모 이름과 아이 이름과 일치하거나 비슷하기라도 한 출생신고서가 없습니다.”

이 말인즉슨, 필리프의 사생아 쟝은 교회에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아리아드네의 계책은 꼼수와 계책에 특화된 추기경도 입을 쩍 열 만한 것이었다.

- “공의회에서 ‘문서주의’를 통과시켜요.”

문서주의란 문서의 추정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중앙대륙 법학의 한 갈래였다.

지금은 땅문서를 믿고 거래를 했더라도 그 문서 자체가 위조였다면 땅을 뺏기게 되었다.

문서주의가 통과된다면 형식에 맞는 땅문서를 믿었다면, 그 땅은 정말로 문서 대로의 소유관계에 있게 된다.

- “모든 문서에 그런 효과를 부여할 수는 없고, 성황청의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문서에만요.”

라파엘 역시 무릎을 '탁' 쳤다.

- “성황청의 권위와 영향력이 몹시 올라가겠군요!”

- “맞아요. 공의회에서 통과시키기에도 무리가 없는 안건이에요.”

아리아드네는 여기까지 말하고 가늘게 웃었다.

-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죠.”

그녀가 제시한 안은 다음과 같았다.

1) 문서에 절대적인 힘을 부여하는 문서주의 강화안을 통과시키되, 2) 그러한 문서는 성황청의 문서보관소에 있는 문서에 한하고, 3) 아무 문서보관소가 아니라 각 나라마다 딱 1개소, 즉 갈리코에서는 몽펠리에 성황당의 문서보관소, 에트루스칸 왕국에는 산 카를로의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문서보관소에만 그런 효력을 인정하며, 4) 알레망 법 대사면은 공의회 칙령이 반포되는 그 순간에 각 성황당 안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에만 그 효력이 발휘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면 사생아 쟝의 경우 본인의 출생 연도를 사면하는 알레망 법 대사면이 이루어져도 적자가 될 수 없었다.

- “사생아 쟝의 출생신고서는 몽펠리에 대성황당의 문서보관고에 들어있지 않으니까!”

- “그렇지요. 이미 들어가 있는 문서에만 효력이 있게 되어요.”

필리프와 오귀스트는 자기 자식을 정식으로 출생 신고할 입장에 있지 못했다.

- “아마 알레망 법 대사면이 이루어지면 어머니를 바꿔치거나 해서 뒤늦게 넣을 생각이었을 거예요.”

- “그래서 그때 들어가 있던 문서로 범위를 좁혔군!”

- “그렇지요. 알레망 법 대사면이 통과되더라도, 쟝의 왕위 계승은 안녕이에요.”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의 저 기지가 자기 딸이지만 남을 엿 먹이는 데에 있어서 참 악마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알레망 법 대사면과 문서주의 강화를 패키지로 묶어 통과시키는 게 기가 막힌 묘수라는 데에는 백 번 동의했다.

그러나 그걸 곧바로 강행할 배짱까진 없었다.

게다가 알레망 법 대사면은 그 자체로 원리원칙에 반하는 특혜였으니, 데 마레 추기경으로서는 선선히 동의가 되지 않았다.

이건 시몬 데 마레라는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 딸을 위해 불편감을 감수하기로 했다.

이건 쉰—당시로는 지금 죽어도 호상인 나이—이 훨씬 넘은 노인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아리아드네에게는 언제나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이 역시, 사생아가 흔해 빠진 중앙대륙의 지체 높은 남자치고는 드문 감정이었다.

본인이 양친이 누구인지 모르는 탓이 컸다.

어려서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고아원의 천장 얼룩을 셌던, 반백 년은 족히 지난 희미한 옛 기억과 시골 농장에서 올라온 꼬질꼬질한 여자아이가 겹쳐져서 말이다.

그걸 딸에게 고백할 동력은 없었지만 그는 딸을 위해 훨씬 높은 사람을 괴롭힐 마음은 있었다.

추기경은 산 카를로에 도착할 다음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산 카를로에 도착한 다음 손님이란 다름 아닌 루도비코 법황이었다.

“껄껄껄! 자네 집이 이렇게 생겼어? 이거 완전 졸부네 집 실내장식 같은데?”

데 마레 대저택은 사유재산처럼 굴리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관저였다. 데 마레 추기경은 민망해하며 항변했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부설 관저거든요?”

“자네가 산 카를로 추기경으로 임명되자마자 무너지기 직전 고택을 사서 골조만 남기고 뜯어고친 거 다 알고 있어. 이거 죄다 자네 취향 아닌가. 이―야, 황금칠. 번쩍번쩍 하구먼.”

데 마레 추기경은 그저 얼굴이 새빨개져서 부들댔다.

그가 품위를 위해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반항은 그거 황금이 아니라 은칠이 가을볕에 빛나 금색으로 보이는 거라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생략하고 입을 다무는 것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올라오세요.”

“차기 법황의 취향이 졸부에 한없이 가깝다는 게 쓸데없는 소리라고?”

“법황 알현을 하겠다는 사람이 수도에 가득입니다.”

“곧 죽을 껍데기한테. 바보들 같으니라고.”

“감상에 빠져 있는 짓은 그만두고 얼른 이쪽으로 들어와요. 이거저거 맞춰봐야 할 것이 많단 말입니다.”

“시몬. 자네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야.”

루도비코를 자기 서재로 밀어 넣는 것에 성공한 데 마레 추기경은 문이 잘 닫힌 걸 확인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알레망 법 대사면 안, 받기로 했습니다.”

루도비코의 눈이 반짝였다.

“호오?”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이 당연히 필리프가 제안한 알레망 법 대사면을 반대할 줄 알았다.

“자네가 지금 거의 다 잡아놓은 알폰소 왕자의 이득과 배치되는 것 아닌가?”

서장자와 나이 어린 적자라는 특이한 구도를 만들어놓은 레오 3세 탓이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이 통과되면 왕의 서자가 행세할 배경이 생길 텐데?”

“그게 말입니다⋯⋯.”

설명이 끝난 후,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에 법황의 높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오 데 마레!”

이런 시커먼 사기꾼. 그러던 루도비코의 뇌리에 데 마레 추기경이 이렇게 똑똑하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이거 누구 아이디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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