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3화> 대환장 파티
그런 건 왜 묻느냐는 데 마레 추기경의 미심쩍은 반문에 이어 네 머리에서 나올 아이디어가 아니라서 물어봤다는 루도비코 법황의 돌직구가 들이박혔다.
이에 노인네가 늙으니 총기가 없네, 죽을 때가 다되니 망언이 늘었네, 아픈 사람한테 이런 소리를 하다니 네가 사람이냐 같은 설왕설래가 오간 후, 이게 누구의 방안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 루도비코는 혀를 찼다.
“자네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건 자네의 둘째 딸이야.”
데 마레는 어딘가 으쓱해져서 코를 쓱 문질렀다.
“똘똘하긴 하지요.”
“자네 같은 놈이 저렇게 막 키웠는데 저렇게 잘 자라기가 쉽지 않아. 잘 보살펴.”
데 마레 추기경은 순간 굳었다.
어릴 때도 손을 안 탔는데 지금 자기가 왕자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안 해 주는 다 큰 딸을 이제 와서 자기가 어떻게 보살필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은 잠시 혼돈에 빠진 추기경이 제정신을 찾을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불가능한 일에 대해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는 합리주의자의 자세로 금방 회복해 알레망 법 대사면과 문서주의 강화안을 동시에 통과시키는 안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했다.
루도비코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의 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추기경은 방안 자체에 법황이 설득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법황의 결정은 그보다는 후임자를 배려하는 선임자의 자세에서 기인한 것에 가까웠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법황은 ‘어차피 뒷수습은 데 마레의 몫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리피킹은 꼭 하고 싶었다.
“이거 보았나?”
법황은 자기 품에서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질의 양피지를 한 장 꺼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법황은 그 종이를 건네주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손에 들린 종이는 공식 외교문서였다.
추기경이 루도비코의 손에서 건네받은 양피지를 열심히 읽는 동안 루도비코가 부탁했다.
“필리프 놈한테 피사리노 항구를 내놓으라는 소리는 꼭 내가 하게 해 주게.”
「⋯⋯(전략)⋯⋯1122년이 포함된 알레망 법 대사면이 통과되면 갈리코 왕국은 피사리노 항구를 법황령 트레베로에 영구 증여한다.
- 필리프 4세.」
“풉!”
데 마레 추기경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갈리코 국왕 표정이⋯⋯. 볼만하겠는데요?”
“어떻게 알게 되는지도 중요하지. 우리가 입 다물고 있으면 골 때릴거야. 알레망 법 대사면 통과된 거 보고 춤을 췄는데, 막상 칙령 반포된 거 들고 성황당 가면 ‘서류가 없으셔서 사면 대상이 아니신데요’ 하면서 반려 당할 거 아니야!”
데 마레 추기경은 한술 더 떴다.
“일선 성황당에선 ‘지금이라도 출생 신고하시겠어요? 아, 대사면 기간 끝나서 이젠 사생아로만 가능합니다.’ 이러겠죠.”
“낄, 낄낄, 낄낄낄낄낄!”
루도비코 법황도 참지 못하고 함께 터졌다. 가뜩이나 웃겼는데 옆 사람이 같이 웃자 데 마레 추기경 역시도 빵 터졌다.
추기경은 한참 헐떡이며 웃다가 실무자의 입장에서 인류애를 발현했다.
“몽펠리에 대성황당에 경비 인력 충원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비용에 민감한 관리자로 몇십 년을 살아온 남자는 이 제안을 피도 눈물도 없이 잘랐다.
“몽펠리에 대주교가 알아서 하겠지.”
“그 양반 분노한 필리프한테 몸 둘 바 몰라 할 생각하면⋯⋯. 아니, 칼 들고 쫓아올 때 도망갈 속도도 안 날 거라고요. 낄, 낄낄!”
데 마레 추기경은 비대한 몸집인 몽펠리에 대주교가 필리프 4세 앞에서 도망치는 걸 상상하자 다시 한번 빵 터져 버렸다.
성황청의 에트루스칸 지부와 갈리코 지부는 전통적으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으하하하하하하!”
“낄낄낄낄낄!”
두 노인네는 필리프 4세가 아들을 위한 마음으로 영토도 포기하며 성심성의껏 서명한 외교문서를 들고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들처럼 한참을 웃었다.
* * *
알폰소가 데 마레 대저택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과 반대로, 아리아드네는 팔라지오 카를로에 거의 가지 않았다.
데 마레 대저택은 경비인력에게 미리 말만 해 두면 두건 하나 뒤집어쓰고 몰래 들어갈 수 있었지만 팔라지오 카를로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궁전의 문은 아침에 열렸고 이른 저녁에 잠겼다. 팔라지오 카를로에 출입하려면 원칙적으로 정문에서 출입 대장을 적어야 했다.
쪽문을 몰래 이용하자니 순찰 도는 인원과 왕궁 하우스키핑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500명이 훌쩍 넘어가는 왕자궁의 사용인 모두를 믿을만한 사람만으로 채워넣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봤자 왕자궁의 인력은 본궁과 순환근무였다. 여러모로 국왕 측 인물이 스며들어오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가 팔라지오 카를로에 발걸음을 하는 것은 공식적인 초청을 받았을 때뿐이었다.
왕궁의 살림을 총괄하는 루비나 공작부인이 아리아드네 데 마레라면 이를 갈고 있으니 그건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드문 날 중 하루였다.
“어서 오시게, 어서 오시게!”
레오 3세는 만찬장의 입구까지 걸어 나와 손수 데 마레 백작을 맞이했다.
아리아드네는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려고 했지만 국왕은 열정적으로 그녀를 만류했다.
“넣어두게, 넣어 둬!”
레오 3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그녀를 만찬 테이블로 인도했다. 막간을 틈타 국왕은 젊은이에게 살갑게 말을 붙여 보았다.
“가내 평안하시지? 부친께서도 잘 지내시고?”
오늘의 레오 3세는 아리아드네에게 지극히 깍듯했고, 호의적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만 보면 생뚱맞은 일이었으나 좀 더 큰 그림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레오 3세의 데 마레 백작에 대한 환대는 기실 데 마레 추기경, 그리고 그 뒤에 있을 루도비코 법황을 향한 구애의 깃털 춤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건조하게 웃으며 답했다.
“추기경께서는 늘 좋으시지요.”
여기에 ‘국왕 폐하의 은덕 덕분입니다’ 따위의 수식어가 붙지 않았다는 게 현재 아리아드네의 입지와 태도를 상징적으로 대변했다.
그러나 레오 3세는 이 은은한 박대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붙였다.
“허허허, 허허. 그렇지만 요새 좀 바쁘실 텐데. 귀하신 손님이 오셨으니 말이야.”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리고 거기서 끝이었다. 레오 3세는 어떻게든 루도비코 법황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 법황의 근황을 들으려고 했다.
혹여나 말을 많이 하다가 법황이 다음 십자군 출병을 준비하고 있다거나, 외국 군주 누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라도 나오면 대박이다.
하다못해 즐겨 마시는 술 같은 정보라도 받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데 마레 백작의 방어선은 철벽이었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입을 꾹 다물고 레오 3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딱 결례가 되기 직전까지의 거리감이었다.
이걸 함락시킬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국왕은 별 소득 없이 데 마레 백작을 그녀의 자리로 에스코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레오 3세는 마지막 입놀림을 잊지 않았다.
“그대 아버지 맞은 편 자리로 신경 써서 배치했다오. 백작이 왕궁 안에 편한 사람이 없을 텐데, 아무래도 말 상대가 없으면 심심할 것 아닌가.”
이것은 미묘한 이야기였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데 마레 백작을 싫어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국왕이 직접 데 마레 백작에게 만찬의 의전에 대해 귀띔함으로써, 자신은 백작을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며 자기 정부의 그러한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레오 3세의 적자인 알폰소 왕자가 트레베로에서 데 마레 백작의 손을 잡고 발로아 대공녀 라리에사에게 파혼을 선언한 사건은 중앙대륙 전역에 파다하게 알려진 일이었다.
아들이 멀쩡하게 두 눈 뜨고 앉아 있는데 아리아드네에게 넌 왕궁 안에 말동무가 없지 않으냐고 이야기하는 건 너를 내 며느릿감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이번에도 역시 에너지를 최소로 쏟는 대답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런가요.”
무슨 성모상처럼 입가에 띤 미미한 미소와 함께였다. 레오 3세는 두손 두발 다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이 만찬은 여섯 명만 참석하는 아주 작은 소규모 연회였다.
원래는 법황이 트레베로에서 데려온 측근 한 명 정도는 추가로 동석시킬 걸 예상하고 총 8인짜리 만찬 계획을 짰는데, 막상 법황 본인이 ‘데 마레 추기경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사양했다.
사람 머릿수로 위세를 드러내는 외교 관습을 생각하면 참 소탈한 행보였다.
이에 팔라지오 카를로의 의전 총책임자인 발데사르 후작과 외교 담당인 마르케즈 백작은 허겁지겁 이 만찬을 6인용으로 바꿔야 했다.
만찬에 참가하게 된 최소인원은 호스트인 레오 3세와 주빈인 루도비코 법황,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 알폰소 왕자, 아리아드네 데 마레, 체자레 공작이었다.
원래 체자레 공작의 자리는 루비나 공작부인의 것이었으나, 공작부인이 자기 자리를 아들에게 양보했다.
8인 만찬에서 6인 만찬으로 줄어들면서 부득이하게 체자레 공작은 초대 리스트에서 빠졌다.
홀수인 7인은 외교상 결례이고,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을 빼고 체자레 공작을 넣자니 양측의 인원이 4대 2라서 이 역시 외교 결례였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이 변명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핑계지 핑계! 도대체 왜 그 계집애 참석을 고집하는 거야?!”
루비나가 무식하다면 무식한 거였고 감이 좋은 거라면 감이 좋은 거였다.
아리아드네를 빼고 체자레를 넣는 건 외교 결례였지만 사실 성황청 성직자 한 명을 더 데려오는 게 추기경의 사생아 백작을 데려오는 것보다 훨씬 더 평범한 선택인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굽힐 때는 화끈하게 굽히는 남자였다.
그는 데 마레 추기경과 루도비코 법황에게 확실하게 존중의 의사를 표하고자 했다. 그 방법이 데 마레 백작의 초대였다.
그게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다면 분명히 재고했겠지만, 본인이 아닌 자기 아들 체자레의 기회를 박탈해서 표할 수 있는 존중이라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딱히 모범적인 어머니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레오 3세보다는 아득하게 자식에게 헌신적인 루비나 공작부인은 와병을 핑계로 자기 자리를 아들에게 양보했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굴절 분노가 아리아드네에게 튄 것은 루비나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저 계집, 눈꼴이 시어서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참석자가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는 와중에 의전을 맡은 실무자는 자리 배치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의전 담당자로서는 정말로 난이도 있는 현장이었다. 훌륭한 의전이란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아무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불편한 일이 없는 행사 진행을 일컫는다.
그러나 뭘 어떻게 해도 본인, 현 애인, 그리고 파혼한 전 약혼자가 함께 참석하는—실무자는 레오 3세마저 그 쟁탈전에 참여했다는 사실까진 미처 몰랐다—여섯 명짜리 만찬에서 모든 것이 매끄럽게 흘러가게 할 도리는 없었다.
그나마 데 마레 백작과 체자레 공작을 양 테이블 끝에 대각선으로 배치해 멀찍이 띄워둔 것이 실무자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기다란 사각 테이블의 정중앙에는 루도비코 법황, 그 맞은 편에는 레오 3세가 앉았다.
레오 3세의 양옆에는 각각 피사노 공작 체자레와 데 마레 추기경이 위치했다. 루도비코 법황의 오른쪽은 알폰소 왕자, 왼쪽은 데 마레 백작의 의자였다.
비어 있는 루도비코 법황의 자리 너머에 앉아 있는 알폰소가 아리아드네에게 윙크했다.
아리아드네는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알폰소에게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알폰소의 맞은편에 앉은 체자레 공작이 음울하게 물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대환장 파티였다.
시간이 길어졌다면 마치 지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루도비코 법황은 지각으로 위세를 뽐내는 등의 짓거리는 하지 않고 깔끔하게, 정시에 정확하게 맞춰서 나타났다.
“이런이런, 산 카를로는 언제 와도 고향에 온 기분이란 말이요.”
데 마레 추기경을 옆에 달고 들어온 그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레오 3세의 맞은편, 주빈석에 착석했다.
레오 3세의 알량한 자존심이 빛났는데, 국왕은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은 직접 에스코트했으나 루도비코 법황에겐 그러지 않았다.
젊은 여자에게 자리를 안내하는 건 호의처럼 보이지만 법황에게 국왕이 자리 안내를 하는 건 그 아랫사람 같아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법황은 자리에 앉아 여상스럽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연어가 죽을 곳을 찾아 물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처럼, 있을 곳에 온 느낌이야. 아주 편안해.”
레오 3세는 이게 무슨 말일지는 상상도 못 한 채 ‘이리도 정정하신데 너무 감상적이시다’ 비슷한 위로를 건넸다.
루도비코 법황과 레오 3세는 노년의 건강관리를 주 대화 소재로 해서 주거니 받거니, 날씨 이야기와 소소한 덕담을 나눴다.
아리아드네는 죽을 날짜를 받아놓고선 레오 3세의 결례 아닌 결례를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받아주는 법황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체자레 공작의 열망에 찬 눈빛이 자기의 오른쪽 대각선에 앉은 사람들을 핥듯이 훑었다.
순서대로, 루도비코 법황과 아리아드네 데 마레였다.
[좌석 배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