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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04화 (707/733)

<제404화>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칭찬

“성하께서 바다 건너 오랑캐들을 정벌하신 건 정말이지 대단한 업적입니다.”

레오 3세는 입에 침이 마를 때까지 지난 성전과 이를 이끈 루도비코 법황을 칭찬했다.

“중앙대륙의 천년사에 길이길이 남을 겁니다.”

루도비코 법황은 헤벌쭉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제아무리 닳고 닳은 정치인이라고 해도, 아부인 거 다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될 때가 있는 법이다.

“새 세계를 열어젖힌 진군! 예삽교 세계의 타 대륙으로의 확장!”

레오 3세는 열정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나이 먹고선 오랜만이었다.

요즈음 모든 중앙대륙 권력자의 마음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다른 대륙으로의 확장’이었다.

그 단어만 들어가면 다들 정신을 못 차렸다. 레오 3세도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에 자기가 취해 머리가 혼미해졌다.

“다음 성전도 가셔야지요. 아직 성스러운 도시는 그 배후지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더 깊은 내륙에 있는 오랑캐들까지 깨끗하게 소탕해 반도에 이교도가 한 마리도 없게 하셔야지요.”

레오 3세의 말에 알폰소가 고개를 홱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탐스러운 금발 사이로 청회색 눈이 보였다. 아버지를 노려보는 기색이 영 좋지 못했다.

‘또 나한테 떠밀려고?’

레오 3세는 귀찮은 건 모두 왕자에게 떠넘기고 과실은 자기가 누렸다.

힘들고 궂은일은 자기가 처리하고 아들에게는 알맹이만 주는 다른 군주들과는 정반대였다.

알폰소가 트레베로에 가서 받아온 면벌부도 레오 3세가 꿀꺽했다.

물론 알폰소 왕자는 십자군 전쟁 승리의 공으로 그때까지의 모든 죄악을 사면하는 법황의 특별 칙령을 받았으니 면벌부 따위가 필요하진 않았으나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왕자는 머리가 덥수룩해서 자기 눈빛이 보이지 않을 거로 생각한 건지, 보든 말든 상관없는 건지, 넌더리가 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선봉장이 무슨 생각을 하건 법황은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 걸 챙겨줘야 하는 건 친아버지지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 해 줘야 할 부분은 아니다. 루도비코 법황은 격앙되어 외쳤다.

“배후! 그렇지요!”

법황은 예사크 뒤, 헤자즈 반도 나머지의 권력 구도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뒤가 편안해야 두고두고 편안해! 알폰소 왕자가 헤자즈 반도에서 3년만 더 있을 수 있었다면 그 이교도들을 반도에서 깨끗하게 몰아낼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이 노인네가 미쳤나라고 육성으로 내뱉으려다가 혀끝을 깨물었다. 반면에 체자레는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법황을 쳐다보았다.

제발, 제발 또 데려가 주세요. 전투하다가 전사하면 더 좋고. 성인으로 시성 받아도 질투하지 않을게.

루도비코 법황은 이 시점부터 그가 알폰소 왕자를 사랑하는 마흔여덟 가지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진심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레오 3세에 대한 말치레 차원이었다.

“이번 성전의 성공도 국왕의 아드님 기여가 참으로 컸습니다! 알폰소 왕자가 얼마나 용맹했는지, 예사크의 이교도들은 검은 투구만 봐도 덜덜 떤다고 합디다. 하하하하!”

“알폰소 카스코 네로. 제 귀에까지 들어오더군요.”

데 마레 추기경이 맞장구쳤다.

사회생활에서 으레 하는 맞장구가 아니라 설렘을 절제된 문장에 꾹꾹 눌러 담은, 영혼을 담은 동의였다. 사위 사랑은 장인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성전에 많은 사람이 참여했는데 너무 알폰소 왕자 칭찬만 했다, 는 사실을 깨달은 법황은 슬그머니 성공에 비중이 큰 다른 사람 이름도 끼워넣었다.

“슈테른하임 공국의 율덴부르크 대공이 총사령관으로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참 잘해 주기는 했어요.”

레오 3세가 넙죽 받았다. 오늘의 그는 동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게요, 군비와 병참이 받쳐 주어야 하는 게 전쟁인데 말입니다.”

레오 3세는 은근히 갈리코 왕국을 돌려 깠다. 그놈들이 돈과 보급으로 장난질만 안 쳤어도 훨씬 더 성공하셨을 텐데, 하고 슬쩍 상기시키는 짓이었다.

갈리코 왕국과 필리프 4세가 미운 건 지금 이 자리의 권력자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이었다. 다들 격정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루도비코는 계속 들어오는 추임새와 공동의 적을 견제한다는 감정에 뿌듯해져서 자기 구상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야전사령관 체질이 아니라서 후방에서 지휘하느라 십자군의 역량이 많이 낭비되기도 했고, 요새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루도비코의 미래 구상은 계속되지 못했다. 이번에 끼어든 건 알폰소 왕자였다. 삐딱하게 앉아 있던 알폰소가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율덴부르크 대공께서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까?”

알폰소 왕자는 율덴부르크 대공과 종종 서신을 나눴으나 마지막으로 오간 편지에서 대공은 자기 건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확 안 좋아진 모양이야. 염증이라는 게 그렇지.”

법황은 독에 당하고도 버티는 자의 특권으로 율덴부르크 대공의 상태에 대해 큰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

사고 후유증인 염증 따위에 쓰러지다니. 약해빠진 친구 같으니.

“대공의 아들이 아직 많이 어린데 대공의 건강이 안 좋아지니 그 동네도 말들이 많아. 다음 성전은 어느 쪽이건 슈테른하임 공국의 참전은 무리일세.”

법황은 동정 대신에 정세 예측을 했다.

제5차 십자군 전쟁은 정신적 리더인 법황도, 실질적 리더인 총사령관도 다 교체되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수행할 것이다.

법황 후보는 이미 골랐고, 총사령관 후보도 그의 눈앞에 있었다.

“야전과 후방을 골고루 아는 총사령관이 필요해! 알폰소 왕자, 그대야말로 이 소명에 최적이요.”

아리아드네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편이 칭찬을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누구를 생과부 만들려고!’

십자군에 부인이 따라가는 경우도 은근히 있었지만—주로 후계가 반드시 필요한 젊은이가 전쟁에 참여하게 될 때 그 배우자도 동행했다—알폰소는 수도에서 일단 왕관부터 써야 했다.

모든 외유는 그 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도 이하동문이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구 마음대로.’ 그는 자기 사위를 수도에 콕 박아놓을 작정이었다.

알폰소 왕자 본인도 뜨뜻미지근했다.

“높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신히 전쟁 끝나서 본국으로 돌아왔더니 군대를 또 가란 소리 아닌가.

게다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예쁜 마누라도 늑대—안타깝게도 높은 확률로 친인척인—가 우글대는 산 카를로에 두고? 무슨 칭찬을 들어도 기쁘지 않았다.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시작한 극찬이었지만 루도비코 법황의 칭찬은 아무도 즐겁게 하지 못했다.

심지어 칭찬의 목적지였던 레오 3세도 마주 웃었지만 웃음이 어딘가 시큰둥했다.

자기편 내지는 자기 아랫것들인 데 마레, 데 마레의 딸, 알폰소 왕자의 기색에는 무심했던 루도비코 법황은 레오 3세의 미미한 기색은 곧장 잡아챘다.

‘요것 봐라?’

그는 비로소 알폰소 왕자 쪽을 흘긋 보았다.

왕자는 자기가 해야 하는 답변이 끝나자마자 다시 애피타이저를 작살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식사만 열심히 하는 것은 테이블의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부드럽게 당신이 싫다고 말하는 방법이다.

루도비코 법황은 거기에 군대 한 번 더 가라고 말한 자신도 포함된다는 건 몰랐지만, 어쨌든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다는 사실은 알아챘다.

지금 이 부자는 권력 다툼 중이다.

아비는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기는커녕 견제 중이고 성과를 충분히 낸 아들은 존중받지 못하는 데에 낙담한 것을 넘어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깨달은 법황은 레오 3세의 노욕에 혀를 찼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자식도 있으면서 물려줄 생각을 안 하다니, 심지어 그 자식이 알폰소 카스로 네로인데도 저 짓거리 중이라니, 배가 쳐 부른 놈이다.

후계자가 없어서 다 늙은 데 마레를 입양한 법황으로서는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죽을 날을 받아놓은 루도비코 법황과 최근 최대 관심사가 노년의 건강 관리인 레오 3세의 심경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식사가 계속 진행되며 레오 3세는 루도비코 법황에게 미래 계획을 집요할 정도로 꼬치꼬치 물었다.

그는 너무 집중해서 법황이 식사를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레오 3세의 창의적인 방법으로, 에트루스칸 왕국이 가장 적은 투자를 하면서도 가장 많은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루도비코 법황은 미래 계획을 길게는 못 세우는 처지였기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승리를 축복하는 의미에서 특별 사면을 고려해달라는 목소리도 있고.”

“알레망 법 대사면 말씀이시군요?”

생기 있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행복했던 체자레 공작이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제도가 강요한 한계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루도비코 법황은 웃으며 젊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친구의 아들을 보는 것처럼 푸근한 표정으로 체자레를 응시했다.

아리아드네는 루도비코 법황이 참으로 너그럽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끼어드는 추태를 웃어 넘겨주다니. 그녀가 법황이었으면 ‘진짜로 본인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나?’로 포문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나 잘생긴 젊은이는 노인들의 호감을 사는 법이다. 첫인상의 혜택을 십분 받은 체자레는 법황의 용인 하에 계속해서 떠들었다.

“사생아가 인생을 한량처럼 낭비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게 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알폰소는 그 말을 듣고 백포도주를 한잔 마셨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본인이 한량인 걸 제도 탓으로 전가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알폰소는 체자레는 적장자였어도 열심히 살았을 놈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출생이 불우하면 자기 계발에 매진할 유인이 없어요.”

불우한 출생과는 180도 대척점에서 태어났지만 전장에 끌려가서 강제로 능력을 개발하게 된 알폰소는 그저 웃었다.

라파엘이라면 ‘사생아라서 징집되지 않은 덕에 집에서 놀고먹느라 능력 신장할 기회가 없었다는 소리라면 그럴 수 있지’라고 음절 단위로 박아 넣었겠지만 알폰소는 그거보단 유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조소를 감출 수는 없었다.

다행히 체자레는 루도비코 법황 쪽에 열렬히 시선을 고정하느라 알폰소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서자에게는 자기 능력을 펼칠 장이 없습니다.”

헛소리를 배경음으로 깐 채 알폰소는 포도주잔 너머로 푸른 드레스를 차려입은 우아한 흑발 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혼자 잔을 들어 올렸다. 모든 한계를 뛰어넘은 여자를 위해 건배.

사생아에, 능력을 펼칠 공간 따위 허락되지 않는 여자의 몸으로 십 대 구휼원장이 되고 백작위까지 하사받은 여자가 저기 있었다.

그리고 체자레 공작은 그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의 모자람을 집단의 모자람인 양 호도했다.

평범한 사람은 관직에 나아갈 길이 막혔다고 절망할 수 있다.

하지만 체자레가 노리는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를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 무슨 역경이라도 뚫고 나가야 하는 것이 군주의 자리였다.

알폰소는 체자레가 스스로를 광대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왕실 출신으로 묶이는 게 민망할 뿐이었다.

체자레도 평소라면 자기가 지금 우스운 소리를 한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 입을 닥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루도비코 법황과 알레망 법 대사면이 자기 코앞에 있는 상황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레오 3세가 체자레의 편을 들어준 건 왕의 서장자를 더더욱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피사노 공작의 말에 일말의 일리는 있습니다.”

레오 3세는 백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사람 좋은 척 웃었다. 그는 포도주를 물처럼 마시면서도 아직 거뜬했다. 그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재능이 있으면 출신과 관계없이 모두 중용하고 싶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국왕은 자기 맞은편 대각선에 앉아 있는 아리아드네를 턱으로 가리켰다.

“우리 데 마레 여백작 같은 경우도, 제가 구제한 경우죠. 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앳된 처녀의 몸으로 빈민을 구휼하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루도비코 법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아리아드네와 체자레는 물론이요, 그 꼴을 실시간으로 보았던 데 마레 추기경과 나중에 전해 들은 알폰소까지, 모두 레오 3세가 아리아드네를 계비로 품을 욕심에 백작위를 수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레오 3세가 저들의 생각을 알게 되면 펄쩍 뛸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곡식과 금화를 차지하기 위해 왕비로 들이려고 했던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저 여자의 능력을 본 게 맞았다. 암, 그렇고말고.

국왕은 말을 이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은 나쁘지 않은 정책 같습니다. 가정과 성모를 보호하는 사회의 근간은 유지하면서, 일시적으로 잠깐 풀어줘서 쓸만한 인재에게 일할 길도 열어주고.”

서자는 서자일 뿐이라던 레오 3세의 태도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생긴 셈이다. 체자레의 얼굴이 밝아졌다.

레오 3세가 자신의 첫 번째 아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 물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은 통과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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