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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05화 (708/733)

<제405화> 실세 중의 실세

레오 3세의 질문에 대한 외교적 정답은 ‘그것은 공의회에 참석할 주교들이 결정할 일이지요’이다.

하지만 루도비코 법황은 빙그레 웃더니, 입을 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자신이 공의회의 결과에 영향력을 끼칠 거라고 밝혔다.

즉, 루도비코 법황은 자신의 알레망 법 지지를 확고하게 드러낸 것이다!

체자레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법황의 손을 잡고 흔들지 않기 위해 그는 입술을 꼭 깨물어야 했다.

체자레는 실제로는 레오 3세의 서장자이므로, 알레망 법 대사면이 본인의 생년월일을 포함해 이루어지면 당연히 자신이 계승권이 있는 왕자가 되리라 기대했다.

루도비코는 체자레의 볼에 격렬하게 떠오른 홍조를 보며 인자하게 말했다.

“이번 대사면이, 재능있으나 소외된 청년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리아드네는 루도비코의 자애롭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고 웃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법황의 얼굴 뒤로 법황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게 너라고는 안 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 방에서 제일 못된 놈은 역시 루도비코 새끼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떠는 꼴이 추기경을 후계자로 확정 지었던 성황청 복도와 똑같아, 접어뒀던 분노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체자레 공작은 현재 국왕의 조카로 출생기록부가 조작되어 있었다.

문서주의 강화안을 알레망 법 대사면과 함께 가결해 버리면 체자레는 알레망 법 대사면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된다.

본디의 출생이 무엇이건 간에 서류대로의 신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 문서주의 강화안이기 때문이다.

적자—왕의 조카—를 다시 적자로 면천할 수는 없다.

체자레는 그걸 까맣게 모르니 저렇게 좋아하는 거고, 루도비코는 체자레가 닭 쫓던 개가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저렇게 빙글빙글 웃는 거고.

하지만 루도비코는 방 안을 떠도는 비난의 기운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귀만 후볐다.

귀가 좀 간지럽긴 했지만 이 정도야 법황 일에 수반하는, 일상적인 수준이다.

계획은 다 저 데 마레의 둘째 딸이 세운 거고, 하겠다고 결정한 사람은 데 마레 본인이고. 악당은 저쪽 부녀다.

난 추임새만 넣어주는데 이게 왜 내 잘못이야?

나중에 체자레 공작이 칼 들고 쫓아가는 상대 또한 데 마레겠지 나는 아니다.

잃을 것이 없어 자유로운 법황은 양심의 가책마저 잃어버리고는 히죽히죽 웃었다.

* * *

산 카를로의 사교계에는 데 마레 추기경이 실세 중의 실세라는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퍼져나갔다.

- “국왕 폐하께서 법황 성하께 독대를 요청하셨는데, 성하께서는 데 마레 추기경과 함께가 아니라면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 “법황께서 에트루스칸어를 못 하시는 것도 아닌데⋯⋯. 이건 진짜 신뢰의 표시네요.”

- “그뿐만이 아니에요. 지금 각종 결재서류가 다 데 마레 추기경을 통해야만 위로 올라간답니다.”

후계자 수업을 속성으로 시키는 것뿐이었지만 남들 눈에는 급작스럽게 부상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보였다.

어쩌면 확고한 이인자이자 권한이 많은 궁무처장으로 보인 것은 데 마레 추기경의 현재 입지를 평가절하 한 것일지도 모른다.

후계자는 이인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임이 죽으면 바로 법황으로 올라갈 사람이니 말이다.

- “성황청에서 이번에 수도원의 포도주세를 인상한다는 말이 돌던데, 인상 폭을 얼마로 예상하쇼? 3할? 4할?”

- “수도원에서는 2할 생각하던데⋯⋯. 그건 과하게 희망적인 예측이야.”

- “아무래도 그렇지? 나라에서 매기는 주세나 사치품에 매기는 세금을 생각하면 적게 잡아도 4-5할 정도가 맞는 건데.”

중남부 지방 영주들 사이에서는 최근 성황청에서 예고한 주세 인상안이 화제였다.

루도비코 법황 산하의 성황청은 마지막 정책으로 ‘음주로 인한 사건·사고가 잦아지는 풍속을 타파’한다는 대의명분을 걸고,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다음 차수 십자군에 대한 군비를 성황청 내부에서 최대한 조달하기 위해서, 수도원에서 생산하는 포도주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카드를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 “수도원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인상되는 주세가 높으면 수도원 포도주가 가격경쟁력이 없어질 것 아닌가.”

- “수도원 포도주세 인상은 중남부 지방 영지엔 엄청난 호재지. 자네 영지에서도 포도주를 담그지 않나! 생각해 봐. 옆 수도원 포도주가 생산 중단되면⋯⋯.”

- “이봐, 우리 이거 기회야. 그냥 넘기면 안 돼. 올라타야지!”

- “자네 추기경 예하께 당길 만한 끈 있어? 좀 팍팍, 많이 올리라고 누가 로비 좀 해봐.”

각종 이권에 관한 청탁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데 마레 추기경을 만나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물론 인제 와서 추기경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목을 막고 서 있어야 물이 들어올 때 크게 먹는 법인데 이미 추기경은 너무 높이 올라가 버렸다.

그럴 때 사람들은 주요 인사에게 연줄을 대기 위해 중요한 사람 근처의 사적인 인맥부터 포섭하려 들었다.

“이봐, 이폴리토. 자네 아주 몸값이 뛰었어.”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의 사촌인 레안드로 데 레오나티가 이폴리토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럴 사이가 아닌데 대놓고 친한 척이었다.

그는 최근에야 이사벨라의 친구인 사촌 여동생을 통해 이폴리토와 안면을 텄다.

이득으로 묶인 사이는 이득을 계속 가져다줘야 겸상하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레안드로는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내가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 들어봐. 무려 피나텔리 백작이 다음 살롱 모임 때 자네를 초대하고 싶다고 하네!”

“피나텔리 백작이?”

피나텔리 백작가는 중남부의 몬테포르지아 영지의 주인이었다.

몬테포르지아 공작가의 혈통이 끊겨 방계로 넘어가며 영지만 남고 공작의 작위는 사라졌으나, 호랑이 없는 산의 여우는 되는 집안이었다.

피나텔리 백작은 남부의 맹주 타란토 공작가와 동부의 유력자 구아티에리 후작가의 세력권 밖에 있는 중남부, 빈 땅의 우두머리로 행세했다.

이폴리토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 없어서 짓는 미소였다. 이 초대를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오나티 경을—이 친구는 그래도 어린 시절 열심히 살아 기사의 작위는 받았다—마부처럼 부리며 찾아간 피나텔리 백작의 살롱은 더더욱 만족스러웠다.

피나텔리 백작은 원래대로라면 투명 인간처럼 취급했을 평민 출신 사생아 이폴리토의 두 손을 꼭 잡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거기서 살롱의 신사들에게 새로운 어린 친구를 친히 소개했다.

“다들, 다들, 주목! 이쪽은 데 마레 추기경의 장남, 데 마레 백작가의 이폴리토 데 마레일세!”

‘데 마레’라는 말에 사람들이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이폴리토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

피나텔리 백작은 가문 칭찬뿐만이 아니라 이폴리토 개인에 대한 금칠로 미끼의 정신줄이 오락가락하게 만들었다.

“이폴리토는 아주 영명하고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이지!”

다들 한 자리씩 하는 귀족 가주들이 이폴리토를 향해 박수쳤다. 아드레날린이 치솟아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 “오오, 춘부장께서는 안녕하신가!”

- “거참 훤칠하게 생겼군!”

- “이리 오게, 이리 와. 한 잔 받아.”

이폴리토에게는 다행으로, 이 모임의 참석자들은 그의 짭짤한 최근 행각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대부분 한 가문의 가주인 이들은 못 해도 사십 대 후반은 넘은 사람들이었는데, 파왁 가루를 넣은 연초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이폴리토는 인정받는다는 느낌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성황청의 새로운 조세와 그 인상률에 관한 관심으로 이폴리토를 이 자리에 초대한 아저씨들은 이폴리토 자체에 대해서는 1 리브라의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이십 년은 더 묵어야 할 애송이 이폴리토에게 들킬 아저씨들이 아니었다.

중남부 영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칭찬 세례와 부추김,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찬 비전과 확신 어린 약속으로 이폴리토의 혼을 쏙 빼놓았다.

“자네 같은 훌륭한 젊은이가 궁의 관리로서 일하지 않는 건 국가적인 손실일세.”

“게다가 알레망 법 대사면이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게 통과되기만 하면 자네의 임용도 훨씬 수월해질 거야!”

궁의 관리로 취업하는 것 정도는 사생아에게도 열린 문이었지만, 아무래도 비슷한 후보자가 두 명 있으면 둘 중 출생 신분이 더 떳떳한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긴 했다.

그중 더 잘 보이고 싶었던 아저씨 하나가 자기 동료에게 쫑코를 주며 이폴리토를 두둔했다.

“아니, 데 마레 추기경께서 이 청년의 친부이지 않나. 설마 본인 아드님을 빼놓으시겠어?”

이폴리토는 헤벌쭉해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손해 보이는 말투로 공손하지 못한 내용 말하기였다.

“역시⋯⋯. 그렇겠죠?”

녹아내리는 이폴리토를 붙들고 아저씨들은 계속해서 그를 허공에 띄웠다.

“알레망 법 대사면만 통과되면 자네야말로 탄탄대로지!”

“알레망 법 대사면은 문제도 아니야. 이렇게나 능력이 있는데⋯⋯. 무조건 크게 쓰실 거야!”

“관리는 시작일 뿐이지! 관리로 두각을 발휘하면 국왕 폐하께서 자네를 가만두겠나?”

그들은 권력자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 주변인에게 작위를 내린 과거 사례들을 수없이 대며 이폴리토를 현혹했다.

이폴리토는 그만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이성을 놓고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하하하! 선배님들 저만 믿으십시오! 잘 되고 나면 제가 당연히 여러분께 한턱 쏴야죠! 하하하하!”

그들이 따라준 아주 비싼 그라파를 양손에 든 크리스털 잔에 가득 받고 나서 해롱대며 외친 한마디였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그들은 이폴리토에게 비싼 술을 먹인 대가로 데 마레 추기경도 그라파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쥐어 짜냈다.

피나텔리 백작은 옳다거니 하고, 춘부장과 함께 방문하면 이폴리토에게 50년간 숙성한 최고급 그라파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다.

“내 서재에서 오붓하게 들지! 1077년 산, 산페르치니 수도원에서 생산된 귀품이라네.”

“네? 1077년산 그라파가 있다고요?”

“그럼, 아주 귀한 건데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컬렉션으로 딱 한 병이 남아 있어.”

귀한 술인 건 맞았지만 못해도 열댓 병은 족히 더 남아 있었다.

귀족은 술을 살 때 애초에 박스떼기로 사기 때문에 적으면 수십 병, 많으면 수백 병씩 쟁여둔다.

그러나 품절 전 마지막 수량이라고 외치는 건 사기의 기본이었다.

허영이 조심성의 눈을 가려버린 이폴리토는 1077년산 산페르치니 수도원 생산 그라파를 마실 생각에 입술을 핥았다.

전국에 단 한 병 남은 귀한 술을 마셔본 남자가 되고 싶다.

이폴리토는 결국 피나텔리 백작과 오늘 살롱의 참가자들에게 아버지를 모셔 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말았다. 아직 화해도 못 했는데 말이다.

“저희 아버지가! 저만 딱! 믿으신다 이거 아닙니까!”

슬슬 꼬여가는 혀로 이폴리토가 신나게 외쳤다.

“모시고 오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 말이라면 어디든 가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장남 아닙니까! 하하하하하!”

하지만 술은 언젠간 깨고 미망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모임이 파하고 귀갓길에서야 약간 제정신을 찾은 이폴리토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를 모시고 살롱에 못 갈까봐는 아니었다.

‘내가 파왁 밀수를 한 게 내 발목을 잡으면 어쩌지?’

관리로서의 출세 가도를 달리면 각종 음해가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폴리토가 파왁 밀수 및 유통을 했다는 내용은 음해가 아니라 공익제보였다.

이폴리토도 자기가 가져다 파는 물건이 남의 인생 망치는 물건이라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극소량을 넣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자위했지만 본인은 파왁 연초를 절대로 피우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자명했다.

‘내 부귀영화⋯⋯. 내 승진⋯⋯.’

말도 안 되게 화려한 미래와 그 미래가 송두리째 날아가는 걸 동시에 상상한 이폴리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 날릴 수는 없었다. 암, 그럴 수는 없었다.

* * *

“있잖아, 마르코.”

이폴리토가 자기 일당의 아지트, 그러니까 파왁 연초를 쌓아두는 부둣가 창고에 앉아서 자기네 밀수 조직의 리더인 마르코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조직에 사람도 많아졌고⋯⋯. 장사도 잘되고⋯⋯. 굳이 나까지 필요할까?”

마르코는 온몸이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덮이고 얼굴에는 큰 흉터 자국이 있는 대머리 남자였다.

실제로는 이십 대 초반이었지만 겉으로는 마흔 살처럼 보였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여.”

아무것도 없는 머리와 대비되는 마르코의 숱 많고 굵은 눈썹이 꿈틀, 몸부림쳤다.

애초에 파왁을 구해온 것도 이폴리토였고 파왁을 배합한 사람도 이폴리토였다.

파왁의 거래선이야 밀수 실무를 맡은 아랫놈들이 이제는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파왁을 배합할 줄 아는 사람은 이폴리토뿐이었다.

마르코의 조직은 이폴리토가 옆 조직으로 이적한다거나 하면 치명타를 맞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딴 배 타려고 나간다는 소리여?”

이폴리토가 경쟁 조직으로 이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마르코는 목소리를 깔고 으르렁댔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는 먹물 냄새 진하게 나는 도련님을 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겁박이라고 판단했다.

“길바닥에서 얼굴 아작나고 코피 찔찔 흘리던 거 구해줬더니, 뭐? 나가?”

대머리 마르코는 자기 옆에 있던 똘마니들에게 물었다.

“은혜도 모르는 새끼는 우리가 어떻게 처리하냐?”

다종다양하게 못생긴 장정 네다섯 명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담가 버립니다, 형님!”

이폴리토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애들 얘기 잘 들었지?”

마르코는 음산하게 이폴리토를 쳐다보았다. 이폴리토는 고개를 착 숙이고 납죽 엎드렸다. 쫄아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두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구른 마르코는 이폴리토 새끼가 마음으로 승복한 게 아님을 곧장 간파했다.

지금은 숙이더라도, 언젠가는 기필코 제 뜻을 이루려고 들 것이다.

마르코는 자기가 가장 잘 아는 방법으로 이폴리토를 설득하기로 했다.

“항구의 마르코는 자비로운 남자라 내 똘마니들이 하는 저런 거친 방법은 안 된다고 생각해. 담가 버리다니 무식한 새끼들.”

그는 이폴리토를 바라보며 나름 다정하게—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모골이 송연하게—말했다.

“담그면 내장이 상하잖어. 무슨 조직 나가는데 내장까지 내줘. 내장이 상하면 죽는데, 그렇지?”

마르코는 오른손을 펼쳐 엄지와 검지만 접어 보였다.

“산뜻하게 손가락 세 개, 어때?”

이폴리토의 얼굴이 아주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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