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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07화 (710/733)

<제407화> 출셋길에 먹구름

갈레아초 마리아는 의외로, 돈도 다른 이득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친의 복수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 잔 갈레아초의 죽음에 영 결백하지만은 않았던 아리아드네는 갈레아초 마리아를 떠보았다.

어머님께서 저와도 트러블이 있으셨던 것 아시지 않냐고.

그러자 갈레아초 마리아는 루크레치아가 그들을 배신하면 안 됐던 이유들을 열거했다.

어머니가 루크레치아를 위해서 감수했던 위험부담, 무리한 업무처리, 떠맡은 더러운 설거지들. 루크레치아가 남발했으나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던 미래를 향한 사탕발림 약속들.

“전 그 여자의 혈육이 산 카를로에서 떵떵거리는 꼬락서니는 눈 뜨고 못 봅니다! 특히 그 여자가 싸고돌았던 그 끔찍한 망나니는요!”

한참이나 그런 말들을 늘어놓은 갈레아초 마리아는 끝에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아씨는⋯⋯. 아씨시니까요.”

그건 참 많은 함의를 가진 말이었다. 아리아드네의 힘을 이용해 어머니의 복수를 목전에 둔 갈레아초 마리아는 어딘가 무기력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단지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갈레아초 마리아가 떠난 후,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집 안에 루크레치아의 필적이 남아 있는 서류를 모두 찾아서 나에게 가져오고, 산 카를로에서 제일 잘한다는 필적감정사도 수소문해 와.”

산차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그리고 이것⋯⋯.”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입에서 불을 뿜는 용이 양각된 은 단추 하나를 내밀었다.

“이렇게 생긴 문장을 쓰는 가문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 이폴리토의 아버지 후보들이야.”

아리아드네는 산차가 주의해서 살펴야 할 부분들을 꼼꼼히 짚어주었다.

지금 삼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후반 사이의 아들이 있을 것, 그 아들의 이름이 ‘로렌조’라면 좋음, 그러나 사생아라던가 호적에서 파였다는 등의 이유로 집안사람 취급을 못 받을 수 있으니 그런 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문장의 일치도가 높다면 놓치지 말고 알아볼 것.

산차는 일을 영리하고 꼼꼼하게 하는 친구였다. 그녀는 또랑또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성하. 긴히 아셔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도비코 법황은 데 마레 대저택에 묵으며 어딜 가든 데 마레를 끼고 다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어 있는 시간이 전혀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적은 램프 밑이 어둡다는 격언을 십분 활용했다. 베비치 주교는 치리아니 교구의 목회자였다.

치리아니 교구는 산 카를로 대교구 바로 남쪽에 붙은 부유한 땅으로, 전통적으로 치리아니 교구의 주교가 산 카를로 대교구의 추기경으로 승급하는 곳이었다.

그것이 바로 루도비코 법황이 밟은 승진 루트였고, 베비치 주교가 그만 데 마레 추기경의 부상(浮上)으로 인해 놓친 커리어 루트이기도 했다.

베비치 주교는 다름 아닌 데 마레 추기경이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월례 대미사를 집전하는 시간에 루도비코 법황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법황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음? 그게 뭐든지 간에 데 마레에게 이야기하게.”

“성하. 바로 그 데 마레 추기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루도비코 법황은 숱 많은 하얀 눈썹을 굵게 찡그렸다. 그런데 베비치 주교로서는 그게 ‘썩 꺼지라’는 뜻인지 ‘데 마레 이놈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는 법황이 자신을 쫓아내기 전에 헐레벌떡 본론을 토해냈다.

“매관매직을 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뭐?”

이번에는 루도비코 법황의 표정이 확실히 일그러졌다.

“데 마레 추기경에게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 똘똘한 딸아이.”

이에 법황은 베비치 주교의 의심을 일축했다.

“걔가?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루도비코 법황이 생각하기에 이런 시시한 매관매직은 데 마레 추기경이 법황 자리를 목전에 둔 지금 하기에는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는 일이었다.

그리고 데 마레의 딸은 그걸 모르기엔 지나치게 똑똑했다.

“어⋯⋯. 딸 말고, 아들이 있습니다. 장남.”

루도비코는 데 마레의 아들에 관한 얘기는 딱히 데 마레 본인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법황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하지만 데 마레가 굳이 루도비코에게 자기 자식 자랑을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루도비코는 서운함을 구겨 넣고 물었다.

“그런데?”

“그 장남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제안을 하는 모양입니다. 자기한테 투자하면 공직으로 보답하겠다는⋯⋯.”

“데 마레는 그걸 알어?”

“부모와 자식 간에 설마 그런 교감도 없이 그따위 소리를 하고 다니겠습니까?”

누군가가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할 때 으레 있는 음해다. 아르튀르가 대주교위를 받을 때도 꼭 같은 종류의 투서들이 들어왔었다.

법황이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뭐라 하려던 참에, 베비치 주교는 얼른 한마디를 더 집어넣었다.

“게다가 성황청 조직을 이용해서 악마의 연기를 판다고 합니다!”

“악마의 연기⋯⋯?”

이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베비치 주교는 법황에게 언뜻 보면 평범한 연초처럼 보이지만—연초만 해도 성황청에서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악덕 중 하나였다—한 번 피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하얀 연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번 피우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황홀하고 자기가 이교도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전지전능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약을 끊으면 온몸의 자잘한 통증이 수천 배는 튀겨진 것처럼 과도하게 느껴지고 사지에 쥐가 나며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한 번 저 연기에 손을 대고 나면 다시는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없으며 연기를 더 피울 수 있게 무슨 짓이든 한다고⋯⋯.”

“잠깐만. 그걸 데 마레의 장남이 팔고 다닌다고?”

“예. 그냥 파는 게 아니라, 산 카를로 지역의 보스라고 합니다. 그런 놈이 이제는 성황청의 보직까지 팔고 있습니다!”

루도비코 법황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자세한 내용 가져와.”

법황은 딱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앉아 갓 시작하려는 미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연단에 오른 데 마레 추기경이 추기경의 붉은 외투를 입고 양손을 들어올리는 와중이었다.

이제는 법황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베비치 주교는 확신했다.

‘됐다.’

* * *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아버지께 연락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사벨라를 통해 운을 띄울까 고민하며 안절부절못하던 이폴리토를 먼저 부른 건 추기경 쪽이었다.

이폴리토는 신이 나서 바람과 같이 데 마레 대저택으로 찾아갔다.

어차피 조직에서도 손 턴지라 돈 없는 백수였다. 할 일도, 약속도 없고 있는 거라곤 시간뿐이었다.

“아버지!”

이폴리토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외쳤다.

“아버지의 장남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꼴도 보기 싫은 아리아드네의 빨간 머리 하녀가 그를 조용히 시키려고 했다. 배알이 꼴린 그는 일부러 더 시끄럽게 떠들었다.

빨간 머리 하녀는 그가 계속 떠들자 그를 제지하는 걸 포기하고 그를 곧장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로 안내했다.

눈치는 있는 아랫것이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래야지. 가주의 서재야말로 장남이 있어야 할 장소지.’

그는 의기양양하게 추기경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데 마레 추기경 앞에서도 외치려고 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장남이 왔습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의 일갈이 더 빨랐다.

“이―폴―리―토―!”

어 이거 아닌데. 이폴리토는 반사적으로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린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들어오자마자 덩치도 산만 한 것이 구부정한 자세로 눈알을 굴리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흉했다.

부러졌다가 제멋대로 붙은 우글우글한 콧대가 곁들여지니 더 그랬다. 행실이 엉망인 놈이 외양마저 엉망이니 데 마레 추기경은 속이 터졌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해명해 봐라!”

추기경은 이폴리토에게 종이 뭉치를 던졌다.

이폴리토는 얼이 빠진 얼굴로 추기경이 던진 종이 뭉치를 주섬주섬 집어 들었으나 눈앞에 어질어질해서 내용이 잘 읽히진 않았다.

추기경은 대로하여 그 중 핵심 내용 한 장을 들어 이폴리토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세줄 요약까지 해 줘야 하는 아들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악마의 연기 밀거래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종이는 루도비코 법황이 보낸 거였다.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이 매관매직에 연루되었고 그 자식이 마약류 유통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를 듣자 바로 거처를 팔라지오 카를로로 옮겨버렸다.

표면적으로는 국왕, 레오 3세의 초대를 사양할 수가 없어 며칠간 궁전에서 머물다 온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실은 조사가 이루어지고 베비치 주교의 발고 중 최소한 일부는 근거가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 데 마레 추기경에게서 떨어져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법황이 짐을 다 두고 갔기 때문에 법황의 부재를 크게 생각하지 않고 느긋하게 있었던 추기경은 루도비코가 집을 나가자마자 집에 날아온 이 종이를 보고 혼비백산했다.

다 온 법황 자리가 코앞에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게 첫 번째 공포였고, 이폴리토가 악마의 연기 유통 같은 끔찍한 짓에 손을 댔다는 경악이 그다음이었다.

“매관매직?! 네가 정신이 있어 없어?!”

그리고 세 번째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루도비코에게 자기가 매관매직이나 하는 놈으로 보이기 싫은 마음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나는 그런 적이 없다’라고 호소하고 싶었으나 추기경은 꾹 참았다.

그런 게 통하는 건 국왕과 그 정부 같은 관계에서뿐이다. 비즈니스적으로 얽힌 사람들은 해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들고 만나야 한다.

매관매직은 이폴리토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매직(賣職)에 성공해야 돈을 받을 것 아닌가?

“이건 진짜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임명시켜 준 사람도 없잖아요! 제가 언제 아버지한테 청탁하는 거 보셨어요?”

“그래, 말 한번 잘했다! 돈을 받았다는 건 사실이냐?!”

추기경은 버럭 소리질렀다.

“나한테 청탁은 안 하고 직위를 가지고 싶어 하는 놈한테 돈만 받으면 그건 매관매직에 사기까지 더한 것 아니냐!”

썩은 성직자인 건 일종의 악덕이었지만, 그중에도 급이 있었다. 정직한 거래상대조차 안되는 부패한 성직자는 정말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아버지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본 이폴리토는 그제야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를 집어 들어 내용을 읽어 보았다. 별의별 내용이 다 적혀 있었다.

「- 이폴리토 데 마레는 레안드로 데 레오나티의 알선으로 피나텔리 백작과 접촉

- 피나텔리 백작은 레오나티 경에게 이폴리토 데 마레를 데려오는 값으로 금전적 보상을 함

- 이폴리토 데 마레는 그날 36 두카토에 달하는 가치의 향응 및 용돈 5 두카토를 받아 간 것으로 확인」

“아니 아버지!”

여기에 대해서는 이폴리토도 할 말이 있었다.

“36 두카토라니, 구경도 못 해 봤어요!”

이폴리토가 억울할 만도 했다. 36 두카토는 이폴리토가 혼자 받은 게 아니라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체가 먹고 마신 값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을 낙마시키는 게 목적인 베비치 주교가 써서 올린 보고서이니 자연히 작은 것도 침소봉대되어 있었다.

“게다가, 5 두카토를 매관매직 뇌물이랍시고 받는 머저리가 어디 있어요? 그날 제 말이 그 집 마구간에서 다쳐서 준 거라고요!”

이폴리토의 말이 그날 마구간에서 살짝 다친 것은 맞았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다 큰 아들놈의 현실 인식에 이마를 짚었다.

“이 멍청한 놈아. 다 그런 거부터 시작하는 거야!”

“나 그런 거 안 받아도 될 만큼 돈 많다고요!”

안 그래도 추기경이 물어보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그의 아들이 무능한 건 추기경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그래, 네놈이 무슨 재주로 돈을 벌었단 말이냐? 설마 악마의 연기, 이, 이 흉측한 내용이 참말이야?”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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