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8화> 변명의 유통기한
데 마레 추기경은 당연히 파왁 이야기를 이폴리토가 부인할 줄 알았다.
아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거나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악마의 연기 운운하는 사건은 기본적으로 책상물림 샌님인 추기경으로서는 상상할 수 있는 악덕의 종류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그거 그렇게 나쁘게만 보실 거 아니에요.”
추기경의 눈알이 눈구멍에서 탈출하기 직전까지 튀어나왔다. 이폴리토는 아버지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그냥 냅다 마저 말하기로 했다.
그가 아까 흘긋 곁눈질한 베비치 주교의 리포트는 생각 외로 자세했다. 그리고 이폴리토는 실제로 파왁 밀수입과 유통을 했다.
대충 잡아떼다가 뭐가 더 나올 가능성이 충만했다. 이폴리토는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 다 털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애들 사이에선 다 하는 거예요. 안 하면 못 따라간다고요. 어차피 내가 안 했어도 남들이 했었을 거예요. 그런 데에서 한몫 짭짤하게 챙기는 게 뭐가 나빠요!”
이폴리토는 찜찜한 나머지 자기변명을 덕지덕지 짜기웠다.
그의 찝찝함은 겸연쩍음이 아니라 분노를 드러내는 식으로 처리되었다.
“아, 나도 먹고는 살아야죠! 돈도 따로 안 챙겨줬으면서 왜 이래라저래라합니까?”
“네 이놈!!”
추기경의 뒤늦은 노호가 그의 서재를 쩌렁쩌렁 울렸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추기경의 눈이 불신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악마의 연기’가 사람의 이지를 앗아가는 이교도의 주술 용품이라고 전해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베비치 주교는 영리하게도, 루도비코 법황에게 올린 보고서에 ‘파왁’을 ‘이교도가 악신을 기리는 난교 파티를 열 때 환각을 보려고 사용하는 연기’라고 기술했다.
루도비코 법황의 이야기를 들은 데 마레 추기경도 그래서 파왁에 대한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파왁은 강력한 마약이기는 해도 진정제 종류라 그런 용도로는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성황청엔 무어 대륙의 난교 파티에 참여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최소한 파왁이 무어 대륙 깊은 곳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말의 진실 위에 덧대어진 가짜 악명이 새로이 생겨났다.
추기경은 불같이 화를 냈다.
“악마의 연기라니! 심지어 그걸 대놓고 판 것도 아니고 연초에 몰래 섞어 팔아?!”
추기경은 자기 자식이 학교에서 친구와 주먹다짐을 하거나, 하다못해 컨닝을 하다 걸리는 것 정도는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잘한 도벽이나 심심풀이치고는 좀 과한 도박, 아니면 하녀에게 손을 대거나 아랫것을 두들겨 패는 등 자기와 다른 계급의 사람에게 보이는 잔인성도 있을 수 있다 여겼다.
그런데 멀쩡한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이교도의 약물을 산 카를로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뿌리는 건 그가 용인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꿈에서라도 제 자식의 죄로 보았을 범위 그 이상이었다.
지금 추기경의 눈에 이폴리토는 제 자식이 아니라 아주 이질적인 무언가로 보였다.
그러나 이폴리토에겐 파왁은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부유한 유학생 출신 룸펜들에게 무어 대륙에서 온 것, 환각, 중독성, 연기, 비밀은 그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였다.
“아 진짜 꼰대 틀딱처럼 구네!”
이폴리토는 더 세게 화를 냈다. 그는 아버지의 촌스러움이 자신에게 분노할 거리를 던졌다고 여겼다.
“파왁 그거 한두 번 한다고 병신 안 돼요, 그냥 기분 좀 좋아지는, 그런 거라고! X도 모르면서 호들갑 떠는 X꼰대⋯⋯!!”
예전의 데 마레 추기경이었으면 여기서 정치적‧경제적인 유불리를 따져 이폴리토의 처분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에게 대상에 대한 감정적인 평가는 그 뒤에, 느리게야 따라오는 것이었다.
지난 주말, 루도비코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악마의 연기 유통과 매관매직 고발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니 추기경은 사실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게 옳았다.
이폴리토를 집에서 쫓아냈다고 대외적으로 선언하거나 호적에서 파 버리고 꼬리를 자르는 게 예전의 그가 했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로 루크레치아의 부재가, 그리고 약간쯤은 새로이 쌓여가고 있던 둘째 딸과의 관계가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항상 더, 더 높이, 더 많이 원하는, 나를 수도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귀부인으로 만들어 달라던 집사람은 데 마레 추기경에게서 여유를 앗아간 주범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려면 추기경은 단 한 순간도 실수할 수 없었다.
가진 것 이상의 퍼포먼스를 내야 하니 너그러움도 그저 사치일 뿐이었다.
그런데 사랑하던 그녀가 없어지고 난 후 아이러니하게도 추기경은 자기 감정을 들여다볼 짬을 얻게 되었다.
법황 직이 코앞에 있었지만 그는 차안대를 찬 경주마처럼 달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약간의 여백과 인간적인 교류가 들어왔다.
덕분에 생긴 공간에서, 오늘 추기경이 자기 아들인 이폴리토를 보고 느낀 감정은⋯⋯. 혐오감이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믿음도 없어, 도덕도 없어, 자기반성도 없어. 먹을 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 길거리의 부랑아조차도 이보다는 착할 것이다.
아니, 길거리 부랑아이던 시절의 데 마레 추기경은 확실히 이놈보다는 착했다.
이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가졌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서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폴리토는 ‘사람 새끼냐’는 말에 일차원적으로 반응했다.
“사람 새끼? 내가 사람 새끼지 그럼 짐승 새끼요?”
“뭐?”
“당신이 키운 당신 자식인데 그러면 댁이 짐승이냐고!”
이폴리토는 제풀에 못 이겨 점점 더 막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내 어머니도 짐승이냐고!”
“윽!”
루크레치아의 이야기에 추기경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폴리토는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쳤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추기경은 호흡곤란으로 헐떡거렸다.
아버지가 숨만 몰아쉬고 있는 와중에 이폴리토는 그간 차곡차곡 속에 쌓아왔던 본인을 위한 변명을 노도처럼 쏟아냈다.
“기다려줬으면 어련히 다 했을걸, 파왁 거래에서 손 다 씻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래?!”
항구의 마르코에게 다 주고 왔는데! 손씻느라 파왁 재고부터 부둣가 창고까지 진짜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렸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나한테 이래!
“조직에서 나왔다고, 조직에서 나왔다고 X발!! 내가 저런데 손대는 게 싫었으면 미리 좀 떼어 주던지, 울 엄마 죽이고 완전히 다 버려놓고는 왜 이제 와서 이러시냐고!!”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안온한 생활은 데 마레 추기경이 끝까지 보장해주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지켰을 뿐인데 이런 지적이라니, 말도 안 됐다.
“죄다 그 계집애한테 몰아줬잖아! 작위도, 재산도, 집안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추기경은 반박했다. 절절한 심정이었다.
“작위는 내가 준 게 아니야! 걔가 제 힘으로 따낸 거지!”
이폴리토 너도 충분히 바르게 갈 기회가 있지 않았느냐는 심정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폴리토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합시다! 국왕이 여자라고 그저 헤벌쭉해서 눈깔 뒤집혀서 거저 준 거 아니요!”
현상에는 여러 가지 면이 있는 법이다.
레오 3세가 아리아드네에게 작위를 준 것은 그녀를 자기의 왕비로 삼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으니 이폴리토의 지적은 일부는 옳았다.
그러나 아리아드네가 그 위치까지 올라가게 된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강건함 덕이었다.
그러나 이폴리토는 자기에게 가장 간이하게 위안이 되는 방면에만 꽂혔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걔도 서출, 나도 서출! 그런데 걔만 국왕 앞에 나설 기회가 있었던 게 뭐에요! 여자라서잖아요!”
“흑사병 때 네가 곡식을 풀고 간호를 하던가!”
“아버지가 언제 나한테 그럴 기회 줬어요?!”
이폴리토는 아리아드네가 대역병 시대 직전에 곡식을 사재기할 수 있었던 비결이 루크레치아 대신 안주인의 인장을 지니고 있었던 덕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심해의 심장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린 건 극비였으니 그럴 수 있었다.
“여자의 일이라고 집안 살림에도 손 못 대게 해, 그렇다고 데리고 다니면서 바깥일을 알선해 준 것도 아니야,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어쩌란 소립니까!”
“그래서 파두아에 보내 줬지 않아!”
“파두아 군사학교 따위에는 산 카를로 애들 오십 명도 넘게 가 있다고요!”
이폴리토의 본심이 나왔다. 그는 대학이라는 곳에 가서 뭘 배우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 자체가 마뜩지 않았다.
명예와 권세는 그에게 거저 주어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시험에 들게 했다고 여겼고, 그것이 신뢰의 미비를 상징한다 생각했다.
“그딴 미적지근한 지원으로 나보고는 집에서 제일 잘 돼야 한다고? 아리아드네 계집애보다 더 잘하라고? 집안에 넘쳐나는 게 재물이고 영향력인데 이따위로만 지원해주는 거 자체가 나 따위한텐 당신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소리잖아!”
이폴리토는 나름의 분에 차서 아버지에게 욕지거리 섞은 대거리를 했다.
“나도 하려고 했어, 했는데! 왜 자꾸 재촉해요? 느긋하게 기다려주질 못해? 왜 내가 공부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작위를 그 계집애한테 넘겨요?”
“내가 정한 게 아니래도!”
“거짓말! 누가 믿어!”
그는 아버지를 때릴 듯이 상체를 갖다 대고는 으르렁댔다.
“충분히 국왕 폐하께 일러서 작위 수여를 뒤로 미룰 수 있었잖아! 나한테 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냥 될 대로 돼라 흘러가는 대로 뒀던 거잖아!”
데 마레 추기경은 뒷목을 잡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혔다.
“엄마도 구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냥 뒀던 거잖아! 어떻게 우리 엄마를 죽이고 이제는 엄마의 소생인 나랑 이사벨라한테 이래요?!”
“이, 이⋯⋯!”
“키운 적이 없었으니까! 맨날 엄마한테 미뤄뒀지 저희한테 관심이라도 있으셨어요?!”
추기경은 이제 뭐라고 대거리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눈을 꽉 감고 뒤통수에 지긋이 손을 대고 있을 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혈관이 분노로 터지기 일보 직전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 쾅!
이폴리토가 집에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곧장 서재로 찾아온 아리아드네였다.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아리아드네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상태였다.
그녀는 얼마 전 치리아니 교구의 베비치 주교로부터 아주 불쾌한 서신을 받았다.
치리아니 교구의 신도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다가 불미스러운 연초가 유통되고 있음을 인지하였는데, 귀하의 재산 형성 과정에 해당 연초의 밀매가 기여한 점이 있는지 여부를 소명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저 그뿐이었으면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을 것이다. 치리아니 교구의 주교에게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강제할 힘이 없었다.
게다가 온 산 카를로가 그녀의 재산은 대역병 시절에 곡식을 풀며 쌓은 것임을 다 알았다.
문제는 그 공문 밑에 법황의 인장이 찍혀 있단 거였다.
루도비코 법황이 팔라지오 카를로로 거처를 옮기게 된 연유를 뒤늦게 깨달은 아리아드네는 쌍욕을 하며 소명서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이폴리토 뻐꾸기가 눈앞에 있었다.
“아버지한테 쳐든 그 손 당장 내려.”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의 오만불손한 자세를 지적했다.
그는 안 그래도 추기경에게 달려들 듯한 태세로 손을 들고 있던 터였다. 이폴리토는 벌컥 화를 냈다.
“어딜 어른들 이야기하시는데 쪼끄만 게 끼어들어서 지랄이야!”
자기가 혼나는 걸 여동생이 보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추기경과 달리, 어려서부터 이폴리토에게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던 그녀는 이폴리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넌 어른한테 손을 올리냐?’라고 반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쓸데없는 짓에 기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인생의 모든 고난에 대해 부모 탓을 하는 건 대학교 졸업했으면 그만둬라, 이 뻐꾸기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