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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09화 (712/733)

<제409화> 옛날에는 왜

‘뻐꾸기 새끼’란 단어를 들은 이폴리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러나 찔리는 게 있는 이폴리토와 달리 이쪽으로는 아예 더듬이조차 돋아나지 않은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의 이 단어를 흘려들었다.

‘빠끔이 새끼?’

그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폴리토가 기회주의적이란 소린가?’

이폴리토는 당장 아리아드네를 방에서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눈치채게 둘 순 없었다.

지금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추기경과 여동생은 같은 집에서 사니 영원히 감추는 건 불가능했지만 이폴리토는 그렇게 멀리까지 내다보고 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개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오빠 말 들어서 당장 나가라.”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에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아, 졸업자가 아니지. 학위 못 따고 도망쳤지.”

사실 이폴리토는 아리아드네에게 들이박아서 이긴 역사가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여동생은 피식, 웃으며 조그만 입술을 닫지도 않고 조잘거렸다.

“근데 그래도 그렇지, 친자식도 아닌 뻐꾸기 새끼 대학까지 보내줬는데 감사함은 알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이폴리토는 초조함에 그만 고함을 질렀다.

“아 당장 꺼지라고!!”

데 마레 추기경은 이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눈치챘다.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폴리토가 평정심을 잃은 게 결정적이었다.

“잠깐만,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정타로 핵심을 박아버렸다.

“아버지. 이폴리토 오빠가 아버지 자식이 아닌 건 알고 계셨나요?”

추기경의 눈이 눈알 흰자와 눈꺼풀 사이에 바람이 통하기 직전까지 커졌다.

반대로 추기경의 나머지 신체 모든 부분은 옴짝달싹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반면에 이폴리토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는 삿대질을 하며 위협적으로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려 했다.

“씨X 지금 당장 나가 미친X아! 안 나가기만 해봐 내가 지금 당장⋯⋯.”

“넌 닥쳐―!”

그러나 추기경의 일갈이 폭발적으로 터졌다. 이폴리토는 놀란 나머지 흠칫, 동작을 멈췄다.

이렇게 확보된 빈 공간에서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를 향해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추기경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이폴리토 오빠를 7개월 만에 낳으셨지요. 칠삭둥이치고는 참 건강하고 활발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랬다. 어린 이폴리토는 병치레 한번 없고 또래보다 항상 덩치가 큰 우량아였다.

추기경은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 입맛만 다셨다.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그게 칠삭둥이가 아니었다면요?”

“우리 엄마 모욕하는 쓰레기 같은 상상 그만해!”

이폴리토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돌아가신 분한테! 누가 어미 뒤진 X 아니랄까 봐 못 배워먹은 티 내지 말고!”

아리아드네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넌 어미 잡아먹은 새끼 주제에 입 다물어!”

아리아드네는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전장의 장수처럼 호통쳤다.

“말레타가 다 불었어!”

이폴리토의 눈동자에서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말⋯⋯레타?”

데 마레 추기경의 표정이 굳었다. 이폴리토의 자식을 품었다가 죽은 그 하녀, 당연히 기억했다.

“그래, 말레타. 네가 책임지기 싫다고 죽여 없애려다가 엄한 사람 죽여서, 너희 엄마가 너 대신 책임지고 돌아가셨던 그 여자 말이야, 이 불효자식아!”

그랬다. 그 사건 때문에 그가 루크레치아를 잃은 것 아닌가. 데 마레 추기경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폴리토의 표정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다만 어머니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하필이면 지금 그 이야기가 아버지 앞에서 나온 게 두려워서였다.

“그렇게 큰 희생까지 치르며 죽여 없앴는데 그만 좀 늦었지 뭐니! 말레타가 죽기 직전에, 나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다 불었어.”

이폴리토의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폭로했다.

“‘이폴리토 도련님이 루크레치아 마님께 ‘내 진짜 아빠는 누구냐’고 묻는 걸 들었다고!”

이폴리토는 참지 못하고 포효하고 말았다.

“헛소리!”

그는 울부짖었다.

“더러운 미친X아, 개구라 까지 마!!”

눈가에서 눈물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아가리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야!! 나도 제멋대로 다 말할 수 있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고!!”

“오, 우리 맞춰 보자. 죽은 말레타에게 거짓말을 할 유인이 있을까, 산 이폴리토에게 거짓말을 할 유인이 있을까?”

아리아드네는 거짓이 매개될 수 있는 사람이 아리아드네가 아니라 말레타인 것으로 노련하게 거짓말의 주체를 바꿔쳤다.

이폴리토는 이런 장난질에 날카롭게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콧물을 들이키며 폭력적으로 고함이나 질렀다.

“증거도 없이 개소리하지 말라고 이 미친X아!!! 돌은 X아!! 아악!!!”

그 모습은 가련하다기보다는 추했다. 어머니를 기리는 눈물이 아니라 미래를 두려워하는 눈물이라는 게 모두에게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건 아리아드네가 바라마지않던 반응이었다.

“증거? 증거가 왜 없어?”

아리아드네는 히죽 웃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참지 못한 데 마레 추기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증거⋯⋯?”

멍청한 이폴리토도 이걸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이미 뒈진, 입만 열면 거짓말인 하류 인생한테 다 덮어씌워서 구라치는 거 자제해라!”

“그건 네 자기소개고.”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따닥, 박수를 두 번 쳤다. 저 ‘증거’를 가져올 사람을 불러오려는 모양이었다.

이때, 이폴리토는 견디지 못하고 황소처럼 아리아드네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 뒤로 서재의 커다란 문이 미처 닫히지 않은 채였다. 그는 이대로 그녀를 복도 너머의 계단으로 밀쳐낼 작정이었다.

아라벨라가 이사벨라를 밀었던, 그리고 이사벨라가 아라벨라를 죽였던 바로 그 층계참이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데 마레 추기경이 황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한 타임 늦었다. 이폴리토는 아리아드네에게 전속력으로 뛰어들었다.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 옆으로 빠졌다. 본능적으로 오른쪽 문틀에 딱 붙은 것이다.

이폴리토는 그대로 덤벼들었고, 그의 손아귀에 아리아드네의 드러난 볼이 스쳤다. 맨살과 맨살이 닿았다.

[ 파밧! ]

바닥이 위로 치솟아 올랐고 아주 밝은 빛이 불꽃 튀듯이 사방으로 튀겼다.

지금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는, 회귀 직후에 산차와 말레타의 과거를 봤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눈을 감았다.

* * *

- ‘추기경. 추기경께서⋯⋯ 트레베로⋯⋯ 힘을 써 주셔야 하겠습니다. 알레망 법 대사면⋯⋯.’

화려하고 가벼운 테너 톤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이려 했으나 어투 어딘가에서 어쩔 수 없이 사정하는 태가 났다.

얇고 하얀 커튼처럼 뭔가 불투명한 장막이 나부끼며 그 사이로 새빨간 머리카락이 보였다. 체자레였다.

- ‘이게 말이지요.’

체자레 앞에 선 나이 든 남자는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익숙한, 추기경의 붉은 모자와 예복을 걸친 채였다.

그런데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추기경이 요사이 입고 다니는 붉은 예복은 어깨에 둥글게 붙어 뼈대를 그대로 드러내는 모양이었다.

지금 눈앞의 추기경은 피부에도 지금보다 주름이 많았고 입고 있는 옷에도 주름이 가득했다.

추기경이 입은 붉은 예복은 어깨에 주름을 넣어 크게 부풀려, 본인 체구보다 훨씬 큰 실루엣을 만든 옷이었다.

‘회귀 전이로구나!’

이어진 추기경의 호칭으로 아리아드네의 직감은 확신이 되었다.

-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섭정공.’

전생의 데 마레 추기경은 섭정공 체자레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당당했고, 여유가 있었다.

그는 왜 알레망 법 대사면에 체자레를 끼워 넣을 수 없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대는 수많은 논리적인 이유 중 결정적인 것은 없었다.

- ‘985년의 성황청 칙령의 예외에는 왕의 서장자는 포함이 되지 않⋯⋯.’

칙령 따윈 바꾸면 되는 거였다. 이 레벨에서는 그랬다. 체자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참다 못한 젊은 섭정공이 끝내 노회한 추기경의 말을 끊었다.

- ‘뭘 원하시오.’

데 마레 추기경은 같잖다는 듯 체자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런 건 세련된 정무적 언사도 아니고,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 그의 눈빛을 받고 주눅 든 체자레는 마지못해 고쳐 여쭈었다.

- ‘⋯⋯무얼 원하십니까, 장인어른.’

데 마레 추기경이 웃었다. 그가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건 ‘장인어른’보다는 ‘추기경 예하’였겠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충분한 굴종의 표시였다.

이 늙은이는 바라는 게 없다느니, 원하는 것은 예삽교의 번영과 에트루스칸 왕국의 융성뿐이니 하는 무의미한 미사여구를 한참이나 읊은 후, 그는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 ‘내 아들, 이폴리토 데 마레를 타란토 공녀 비앙카와 결혼시켜 주시오.’

‘!’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랐다. 아리아드네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데 마레 추기경의 요구는 이어졌다.

- ‘둘의 결혼에 결실이 있다면 타란토 영지는 대대로 데 마레의 후손이 잇도록 하고, 그 가문에 공작위를 보장하여 주시오.’

후안무치한 요구였다.

- ‘혹여나 아이가 생기기 전이라도 이폴리토가 공녀의 남편으로서 타란토 영지를 다스리도록 섭정공이 교통정리를 잘 해 주셨으면 좋겠소.’

체자레가 승낙만 하면, 바야흐로 추기경의 평생 야심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커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에 흥분의 홍조가 떠올라 있으리라 확신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요구에 기가 막힌 건 섭정공 체자레도 마찬가지였다.

이폴리토 데 마레는 어느 모로 보나 타란토의 비앙카에 갖다 댈 주제가 되지 않았다. 이는 수도의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급한 건 체자레였다. 그는 이번 알레망 법 대사면 명단에 포함이 되어야 섭정공 딱지를 떼고 정정당당히 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은 백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했다. 이번이 지나면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였다.

체자레는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가 죽기 전까지 왕이 되지 못하면 차기 에트루스칸 왕국의 왕좌는 타란토의 비앙카, 혹은 그녀의 남편이나 아들이 가져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 ‘⋯⋯그 전에.’

그러나 알레망 법 대사면을 받아 사생아의 낙인을 벗어버리는 게 아무리 중요한 안건이라도 이렇게 호구처럼 승낙할 수는 없었다.

-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데 마레 추기경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네? 같은 종류의, 호기심과 약간의 짜증이 섞인 반응이었다.

그는 부러 유유히 답했다. 본인이 윗사람이라는 거드름을 한껏 부리면서였다.

- ‘말해 보시게.’

체자레는 짐짓 거침없이 말했다.

- ‘나의 왕비로는 이사벨라 데 마레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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