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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10화 (713/733)

<제410화>사람이 바뀔 수 있나요

추기경의 얼굴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 ‘이사벨라 말입니까?’

추기경이 알기로는 큰딸 이사벨라는 수녀원에서 얌전히 지내는 중이었다.

- ‘갑자기요?’

그러나 이사벨라는 전혀 얌전히 지내고 있지 않았다. 체자레는 이미 이사벨라 본인과 상당한 정도의 교감을 이룬 상태였다.

섭정공 체자레가 우연히 사냥터에서 마주친 고 알폰소 왕세자의 미망인, 이사벨라 데 카를로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예전보다 더욱 처연했다.

국왕의 사냥터는 젊은 미망인이 머무는 수녀원의 뒤뜰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련한 전 왕세자비는 수행원도 없이 산책을 하다 길을 잃었고, 정처 없이 헤매다가 섭정공 체자레와 딱 마주쳤다.

체자레가 없었으면 그녀는 그 가을 숲에서 얼어 죽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는 그렇게 믿었다.

곤경에 처한 금발의 미녀를 구한 체자레는 그 이후로도 종종 그 사냥터로 사냥을 떠났다.

사냥을 하는 김에 겸사겸사 왕가의 우두머리로서 불우한 처지에 처한 전 왕족을 면회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왕세자비에 대한 처우를 상향하라고 명령했고, 그다음에는 수녀원에선 구할 수 없는 향유고래 기름 같은 생필품을 보냈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개인적인 편지를 썼고 그 뒤에는⋯⋯.

섭정공은 이듬해 눈이 녹고 나서부터는 주말마다 그 사냥터를 방문했다. 그들의 시간은 만년설도 녹여버릴 만큼 뜨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속삭였다.

- ‘나를 여기서 꺼내 줘요.’

어떻게?

체자레가 처음부터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갈가마귀 머리털을 가진 강철같은 성정의 예비 섭정공비가 겨울철 빈민가 원조에 대해 그와 다른 의견을 피력할 때 균열이 났다.

그리고 그 균열에 금빛 두근거림이 스며들었다.

예비 섭정공비의 의견은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 은근히 중하게 여겨졌다. 그 또한 지긋지긋했다.

아리아드네가 구아티에리 후작의 일당을 중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의 어깨에 쌓였던 피로감은 이사벨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풀어주었다.

그는 그 안마가 피아노 선율을 타는 연주자의 그것 같다고 느꼈다.

아리아드네가 죽은 왕비의 일당과 지금까지도 화해하지 못하고 또 충돌해 그의 낯에 먹칠을 했을 때 생각나는 건 이사벨라의 얼굴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그를 잠식했다.

‘이사벨라 데 마레는 알폰소의 비였으니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면 친 알폰소 측 귀족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행동하고 싶어서 이유를 만들어 덕지덕지 붙였다.

그리고 이사벨라의 소원은 데 마레 추기경이 분수에 넘치는 요구를 했을 때, 체자레가 그러면 나도 말도 안 되는 짓 하나쯤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이 들었을 때 비로소 체자레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반쯤은 충동적인 처사였다. 그는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추기경의 말에 대꾸했다.

- ‘잘못 들으신 것 아닙니다. 이사벨라 데 마레가 맞습니다.’

추기경의 입 모양이 둥글게 열렸다가, 말을 않고 그대로 다물렸다.

아리아드네는 아버지의 입에서 ‘아리아드네는 어쩌고?’라는 말이 나오려던 것임을 확신했다.

‘아버지, 아버지, 제발⋯⋯!’

아리아드네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대관식을 훔친 이사벨라는 왕비의 성장을 하고 그녀가 갇힌 서쪽 탑을 찾아왔었다.

뜨끈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이사벨라는 원하던 바를 이뤘고 아리아드네는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필사적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나를 배신하지 말아요. 아버지, 아버지, 아빠⋯⋯!’

추기경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리아드네는 그 침묵이 죽을 만큼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민했다. 작은딸과, 큰딸과, 그들의 가치와, 그들의 개인적인 인생과, 추기경 본인, 큰딸, 작은딸, 장남, 그들 모두가 속한 가문의 영속성을.

어차피 이사벨라는 죽은 왕세자의 미망인으로, 본인에게 생래적인 왕위나 영지의 계승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왕위계승권자인 자녀의 후견권을 휘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즉, 좋은 혼처와의 재혼은 힘들었다.

이사벨라가 새 시집을 가서 얻을 남편은 아리아드네가 새로 얻을 수 있는 혼처와 크게 급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럴 바엔 이렇게 바꿔 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추기경은 계속 고민했다.

작은딸은 답답했고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데에 반해 큰딸은 빠릿빠릿하고 자기의 모든 계산을 어머니를 통해 데 마레 가문에 전달했다.

게다가 이폴리토와 동복형제이기 때문에 가문 그 자체에도 더 헌신적일 것이다.

그리고 루크레치아의 웃는 얼굴. 집에 가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병아리같이 부들부들한 목소리로 아주 드문 칭찬을 그에게 퍼부을 그녀의 얼굴.

빠른 시간 동안 모든 계산을 돌린 데 마레 추기경은 짧게 대답했다.

- ‘좋습니다.’

‘아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이렇게 된 일이었구나.

진실을 알게 될 때의 후련함은 이번에는 없었다. 가슴에 쐐기라도 박힌 것 같았다.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이 통증은 진짜일까, 상상 속의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에서 흘린 눈물은 현실에서도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눈을 떴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서재로 들어서는 문의 문지방 위에 쓰러진 채였다.

“얘야, 얘야!”

데 마레 추기경이 달려왔다. 그는 쓰러진 아리아드네의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그의 작은딸은 이폴리토가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뒤로 넘어갔다.

황금률이 야기한 어지럼증 때문이었지만, 추기경이 선 자리에서는 이폴리토가 밀어서 아리아드네가 다친 것으로 보였다.

아리아드네에게 딱히 피가 나거나 눈에 보이게 깨진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한 추기경은 이폴리토를 보며 고성을 질렀다.

“이―폴―리―토―!!”

이폴리토는 목표물을 잃어버린 황소처럼 분노와 멍청함이 섞인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그런 이폴리토에게 추기경은 무시무시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지금 네 여동생에게 뭐 하는 짓이냐!!”

아리아드네는 쓰러진 채 추기경의 무릎팍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지금처럼 이폴리토를 적대했다면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알아버린 이상 더는 멍청하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가문. 영원불멸히 영속할 아버지의 가문. 그리고 그 가문을 이을 아들.

추기경에게서 저걸 뺀다면 시체나 다름없다. 그리고 저건 그녀가 아버지에게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결국에는 그랬다. 이폴리토가 줄 수 있는 것을, 그녀는 줄 수 없었다.

“아직도 저 계집만 싸고돌면서!”

이폴리토가 울부짖었다.

“내가 안 했다고! 내가 안 밀었다고! 언제 한번 나 믿은 적 있어요?! 나 믿은 적 있냐고요?!”

이폴리토는 아버지—최소한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있었던 아버지—에게 믿음을 호소했다.

“난 잘못한 게 없다고!! 다 저 계집애 때문이라고!! 아니, 저 계집애가 저렇게 굴게 내버려 두는 아버지 때문이라고!!!”

아리아드네는 반대로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그때 날 버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이폴리토를 위해서, 눈앞에서 꽥꽥대는 저 상스럽고 만고에 쓸모없는 놈을 위해서 내 목숨줄을 끊어버렸으면서 왜 지금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느냐고, 날 자식으로 보기나 했느냐고.

그녀는 그 순간에 추기경이 자기를 쓰다듬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샌가 장년에서 노인이 되어 버린 그의 손가락은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가느다란 뼈대 위에 두꺼운 가죽이 주름져 끼워진 나뭇가지 손은 정신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머릿결을 쓰다듬던 추기경의 손이 아리아드네의 이마를 함께 쓸었다. 맨살과 맨살이 닿았다. 그 순간, 다시 한번 지축이 흔들렸다.

* * *

- ‘예하. 올해에만 벌써 세 번째 방문이십니다.’

- ‘그런가.’

이번엔 베르가모 농장이었다. 첫 서리가 내린, 추수가 끝난 가을 논밭 사이로 그녀가 어린 시절 증오했던 농장 건물이 보였다.

기억보다 작았지만 깨끗한 신식 시설이었다. 벽의 회칠도 아직 희었다. 지어진 지 몇 년 안 된 것 같았다.

- ‘올겨울은 추울 거라고 합니다. 여름에 코렐라 강이 범람했어요.’

- ‘음?’

- ‘코렐라 강 범람은 칠 년에 한 번 있는 일인데, 코렐라 강이 범람하는 해는 겨울에 강추위가 온다고 하죠.’

아리아드네는 그 말을 듣고 이게 그녀가 아주 어렸던 시절인 걸 깨달았다.

코렐라 강은 귀신같이 7년마다 범람했다. 그녀가 14살 되던 해와 7살 되던 해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일곱 살이라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가 농장에 갓 도착했던 해다.

- ‘들여다보고 가시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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