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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11화 (714/733)

<제411화> 마음의 온기

추기경이 이 농장에 자주 들르는 이유가 여기에 맡겨진 셋째, 아리아드네 아가씨 때문이라고 넘겨짚은 집사 니콜로가 추기경에게 권했다.

권력자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일은 이런 식의 시시콜콜한 눈치가 발달해 있지 않으면 금방 일자리를 잃기 일쑤였다.

그러나 추기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 ‘⋯⋯일 없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농장을 거닐었다.

딱히 생산담당자를 만나거나 창고의 재고를 확인하거나 마을의 고충을 듣는, 성황청에서 파견된 최고 관리자로서의 업무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의 딸이 있다고 생각되는 건물 근처를 하염없이 돌았다.

마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하지만 절대로 아이 본인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데 마레 추기경이 빙글빙글 도는 건물은 아리아드네가 자란, 허드렛 일손의 기숙사처럼 쓰인 별채가 아니라 잔 갈레아초 할멈과 그 식구들이 쓰던 본관이었다.

추기경은 문득 물었다.

- ‘이거 봐, 니콜로.’

- ‘예, 예하.’

- ‘배가 고파 죽겠는데 먹을 걸 코앞에 들이밀고 끝내 주지 않으면 화가 나지 않겠는가.’

- ‘그렇죠.’

- ‘아예 먹을 걸 안 보여줬을 때보다 화가 더 나지 않겠나?’

- ‘아무래도 그렇겠죠?’

- ‘⋯⋯그래.’

추기경은 본관을 돌다가 말했다.

- ‘돌아갑세.’

그는 딸을 만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산 카를로의 저택으로는 데리고 돌아올 수 없는 아이였다.

‘내 얼굴을 본다면 화나 나겠지,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어린 소년 시몬이 수도원 부설 고아원에서 항상 했던 공상은 멋지고 아름다운, 세련되게 차려입은 귀족 부부가 나타나 그를 꼭 안아주고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소년 시몬의 공상 속에는 귀족 나리가 ‘오, 네가 우리 아들이로구나. 잘 있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 데려가지는 못해. 나는 너를 버렸단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그런 건 참을 수 없었다. 꿈을 쥐고 있어서 견딜 수 있었던 나날이었다.

꿈과 희망이 산산이 조각나면 더는 살아갈 동력이 없게 된다.

그는 최소한 한가지는 지켰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대접할 것.

어느 모로 보아도 부모·자식 간의 애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배운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이었다.

추기경이 성황청의 은마차에 올라 출발할 때, 본관 구석에서는 잔 갈레아초 할멈이 심술궂은 눈빛으로 추기경 일행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 ‘얘!’

잔 갈레아초 할멈은 지나가던 좀 큰 여자애를 불러 지시했다.

- ‘2층에 있는 아리아드네 아가씨의 물건을 3층으로 빼내. 빼고 나서 그 방은 우리 막내한테 줘.’

일 년이 다 되도록 추기경은 제 딸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 쥐방울만 한 계집애가 제 아버지한테 쪼르르 이를 길은 없는 게 확실하다.

- ‘그 애 식사는 따로 준비하지 말고 그냥 우리 먹는 대로 줘. 그것도 다 돈이다.’

아리아드네가 3층의 다락방으로, 1층의 집안 하녀 방으로, 별채의 농장일손 방으로 쫓겨났던 다운그레이드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추기경은 다음 해 봄에도 여전히 베르가모 농장에 왔다. 그는 딸이 없는 본채를 빙빙 돌았다.

간혹 마주치는 잔 갈레아초는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잘 먹고 잘 지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추기경은 들어가 아이를 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예 잊을 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본관 앞을 도는 그의 얼굴에 늘어 가는 주름은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를 잊지도 무시하지도 못하고, 그렇지만 해결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미뤄둔 사람이 감당하는 무게였다.

* * *

“아리야, 아리야. 괜찮니! 괜찮니!”

그녀의 시야에서 암흑이 걷히자마자 바로 보인 건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쓰다듬는 아버지였다.

“예하! 예하! 의사가 오고 있습니다!”

아래층에서부터 집사 니콜로의 목소리도 다급하게 울렸다. 조금 전에 들은 것보다 십 년은 늙은 음성이었다.

“당장 뛰어오지 않고 뭐 하는 짓이야!”

추기경은 있는 대로 언성을 높여 호통쳤다. 아리아드네는 아버지의 손을 옆으로 치웠다.

의사는 필요 없었다. 딸이 움직이자 추기경은 깜짝 놀라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얘야, 정신이 드니!”

아리아드네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추기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뿌옇고 흐렸다.

“⋯⋯아버지.”

아리아드네는 원래 이폴리토의 출생 비밀을 만천하에 알려 이폴리토와 출세를 코앞에 둔 데 마레 추기경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했었다.

마침 이폴리토는 지난 초여름, 집에서 비앙카를 두고 사고를 치고 집을 나간 상태였다.

그 시점에 추기경이 이폴리토와 절연했으며, 그때부터 이폴리토는 데 마레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게 그녀의 애초 구상이었다.

여론의 추이를 봐서 추기경이 원래부터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나 키운 정을 가엾이 여겨 거두었으나 행실에 실망해 내쫓았다는 정도의 양념을 좀 더 칠까 정도의 계산 또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산이 무슨 소용이랴. 지금은 추기경이 정녕 사랑한 대상은 이폴리토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선택한 당신의 몰락이라면 껴안고 침몰하셔야지, 남이 강제로 꺼내 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당신을 구해드려야 할까요, 아버지.’

아니, 내가 당신을 구해드리는 것을 당신이 과연 원하실까요.

하지만 추기경을 아예 놓기 전에,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평소에는 무서워서 묻지 못했던 말이었다.

모든 게 다 파국으로 가기 전에, 다 쓸려 내려가 버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이 한 문장이 떠올랐고 또 이걸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아버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를 사랑하세요?”

데 마레 추기경의 답은 즉각적이었다.

“당연하지!”

체자레가 이사벨라를 달라고 했을 때 대답의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빨랐다. 아리아드네가 마음 졸일 틈도 없을 정도였다.

눈을 질끈 감고 대답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각오가 필요없었다는 걸 머리로 깨닫기도 전부터 가슴에서부터 이상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추기경은 딸을 껴안았다.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냐,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고!”

웃긴 타박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만 눈물을 터트렸다. 계속 울고 있었지만 새롭게 나올 눈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딸이 왈칵 울음을 터트리자 추기경은 그만 또 당황해 버렸다.

“왜, 울어, 왜 또 울어.”

그의 주름진 손이 이제는 일어나 앉아 있는 아리아드네의 등을 계속 쓸었다.

딸은 우느라 답할 수가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큰 딸을 아기처럼 쓰다듬는 것뿐이었다.

아기 때도 쓰다듬어보지 않았던 자식이라 손놀림이 어색했다. 장성한 딸과 스킨십이라니,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어려서 했었어야 할 일의 타이밍을 한 번 놓치자 이를 뒤늦게 다시 하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그리고 어려서 제시간에 마음을 보듬었을 때 만들었을 그 따스함은 영원히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늦은 온기라도 마음에 가서 닿기는 했다. 아주 늦은 온기라도 차갑게 식어버린 사람의 마음을 감싸 따스하게 데워 주었다.

부녀는 아주 오래,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한쪽은 품에 안겨 울었고 반대쪽은 껴안긴 딸을 쓰다듬었다.

시내에서 부른 의사는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다 다른 이들은 그보다는 빨랐다.

집안에서 소란이 나자 제일 먼저 나타난 외부 사람은 알폰소 왕자가 파견한 기사들이었다.

저택 외곽을 순찰하던 그들은 주세페의 꺼리는 기색에도 불구하고 곧장 집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소동의 원인이 외부인의 침입이 아니라 이 집 큰아들이라는 걸 알자 그들은 당장 제압하려 들진 않았다.

그러나 슬슬 자리를 잡아가며 서재를 반원형으로 둘러싸는 진을 그렸다.

그다음으로 나타난 사람은 커다란 일기장을 꼭 껴안은 중년 부인, 갈레아초 마리아였다.

이폴리토는 갈레아초 마리아의 얼굴을 몰랐고 그녀도 딱히 자기가 왜 왔다고 이야기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종이 꾸러미를 꼭 껴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못 보던 여자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이폴리토도 멍청이기는 했지만 감 하나는 엄마를 닮아 훌륭했다. 그는 지금 여기서 몸을 빼지 못하면 처지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추기경이 아리아드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이폴리토는 슬슬 복도에 등을 댄 채 조금씩 몸을 뒤로 빼냈다.

그러다가 일 층 현관문에 충분히 가까워진 순간 냅다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주세페가 외쳤다.

“이폴리토 도련님을 잡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이폴리토의 위치는 ‘도련님’이었다. 상황정리를 해 주어야 하는 윗전은 지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주세페 선에서 ‘때려도 좋고 죽여도 좋으니 무슨 짓을 해서든 저 놈을 잡아와라’라고 명령을 내리기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여기서 가장 유능한 자들인 검은 투구 기사단원은 주세페의 지휘 라인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업무 범위는 어디까지나 ‘저택 경호’와 요인의 보호였다.

기사단이 끼어들까 말까를 고민하는 틈을 타 이폴리토는 무사히 자기가 타고 온 점박이 말에 올라타 대저택 정문을 돌파하고 말았다.

이폴리토의 운이 하늘에 닿은 날이었다.

* * *

이폴리토는 탈주했지만 당사자가 출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진실을 밝히는 날이 미뤄지는 건 아니었다.

갈레아초 마리아의 증언을 모두 들은 추기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키우지 않은 내 딸과 내가 키운 남의 아들이로구나.”

그는 이폴리토의 유년 시절을 회고했다.

대부분의 양육을 루크레치아에게 맡기고 바깥으로 나돈 것은 맞았지만 같은 집에 사는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역시 몇몇 찬란한 순간을 함께 했다.

이폴리토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던 날을 기억했다. 말이 느린 아이였다.

젊은 루크레치아는 남아인데다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그렇다고, 불쌍한 아이라고 눈물을 찍어냈다.

그런데 유독 ‘아빠’라는 말만 빨랐다. 젊은 데 마레는 머릿속에서 환희와 행복이 폭죽처럼 터지는 경험을 했다.

이것이 그의 가족, 이것이 그의 미래, 이것이 그와 그의 가족들을 보호할 가문의 시작이었다.

첫아들을 품에 안은 젊은 아버지인 그는 이 아이를 위해 찬란한 미래를 그려갔다.

그런데 이게 모두 다 헛된 꿈이었다. 모두, 헛짓이었다.

“이사벨라와 아라벨라가 내 딸은 맞을까.”

그는 손에 얼굴을 문댔다.

아리아드네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루크레치아의 일기장을 내밀었다.

“⋯⋯읽어 보시겠어요?”

그녀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좀 충격적일 수도 있어요.”

이사벨라의 출생에 대해선 일기장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시몬을 닮아 못생겼을까 봐 걱정했지만 태어나자마자 콧대가 높아 놀랐다, 첫 세례를 받으러 대성황당에 가는 길에 아기가 예쁘다고 다들 칭찬해줘서 으쓱했다, 등등.

아라벨라를 낳았을 때쯤에는 이미 살림이 피어 일기장을 쓰는 조그만 취미는 없어졌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아라벨라가 추기경의 자식이 맞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기록은 있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대신 묵묵히 아리아드네만 바라보았다.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이 처량했다. 그녀는 결국 동정심을 이기지 못하고 토설해 버렸다.

“루크레치아는 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았어요.”

배신 시도를 했지만 실패한 건이 있기는 해도. 그녀는 굳이 자기가 그걸 아버지에게 전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사벨라와 아라벨라는 아버지의 딸이에요. 걱정 마세요.”

아리아드네는 제일 좋은 건 추기경이 이사벨라와 아라벨라조차 자기의 소생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건 이 일기장을 추기경이 직접 보는 거란 사실을 알았다.

루크레치아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러야 이폴리토도 더 깔끔하게 잘라낼 것이고, 이사벨라에 대한 미래의 지원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계산적으로만 접근하기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평생을 사랑한 여자가 자기를 향해 쓸모없다, 매력 없다, 끔찍하다고 저주한 기록을 자기 눈으로 읽는 건 그 누구도 당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듣고만 있던 추기경은 루크레치아의 일기장을 밀어냈다. 그러나 영영 볼 생각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중에, 나중에 보마.”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고 버텨내는 것은 아버지와 딸이 똑 닮은 부분이었다.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은 할 일이 있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쳐내는 성품 또한 아리아드네와 데 마레 추기경이 공유하는 성정이었다.

“당장 내일이 공의회다. 그 전에 루도비코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소명해야 알레망 법 대사면과 문서주의 강화안에 대한 표결이 우리 계획대로 흘러갈 거야.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도비코를 만나고 와야겠어. 만나 준다면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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