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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12화 (715/733)

<제412화> 불변하는 진실이라고 인정한다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루도비코 법황은 별 저항 없이 추기경을 만나 주었다.

법황이 바라는 것은 해명과 확신이었지 단죄와 처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람들끼리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진실 그 자체를 알리고 함께 논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 건 가족이나 혼인동맹을 맺은 운명공동체 정도의 유닛일 때에나 하는 일이다.

법황과 추기경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추기경은 적당히 가공된 버전의 진실—그러니까, 이폴리토는 사실 자기 친자식이 아니며 그것이 밝혀진 지난 5월에 이미 집에서 쫓아냈다, 이폴리토는 가족관계를 참칭하며 개인적인 이득을 취했다, 고 법황에게 알렸다.

이렇게 되면 추기경에게는 이폴리토가 데 마레 가문의 일원이라는 잘못된 외관을 내버려 둔 죄만 남게 되는 거였다.

추기경은 ‘아이가 불쌍해서 공식적인 공표만은 참았는데 내 이름을 팔아 이런 끔찍한 짓을 하다니 참을 수 없다’며 적당히 피해자인 척도 곁들였다.

고의의 매관매직과 이교도 마약 유통과는 비견할 수조차 없는, 순전히 연민에 의한 과실이다.

루도비코는 데 마레의 변명을 모두 받아주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진실임을 담보할 한 가지 요구를 했다.

“공식적으로 이폴리토 데 마레가 자네 가문과 상관없다고 공표하게.”

합리적인 요구였다. 실질적인 필요도 있었다.

“추가적인 피해자를 막으려면 그래야 해.”

데 마레 추기경 역시 동의했다. 다만 이 발표는 데 마레 추기경의 명의가 아닌,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의 명의로 나갔다.

아무래도 추기경은 성직자이니만큼 있어서는 안 되는 자식을 호적에서 팠다고 선언하기엔 꼴이 좀 우스웠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임박한 지금, 작위를 가진 가문 구성원이 따로 있는데 감수할 이유가 없는 위험이었다.

「이폴리토 데 마레는 본디 데 마레 추기경이 거두어 키운 고아로서, 27년간 사랑과 애정으로 돌보았으나 성정이 추악하고 행실이 악랄하며 배은망덕하기 그지없다. 더는 보듬을 수 없어 가문에서 제명하니, 이와 관련되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주의하시기를 바람.

- 데 마레 가문의 가주,

데 마레 백작 아리아드네 배상.」

이렇게 아리아드네는 이제 공식문서에서도 명실상부한 가주가 되었다.

이폴리토와 이사벨라가 가주의 권위를 들먹이며 그녀를 늙은 부자의 재취로 보내버린다고 협박하던 과거가 전생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이폴리토를 묘사하는 단어들이 흉악한 이유는 루도비코를 향한 보여주기가 반, 아리아드네의 개인적인 분풀이가 반이었다.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빼고 저 공고문의 내용만을 해석하자면, 이건 이폴리토 데 마레의 일에 데 마레 가문은 더는 보증을 서지 않으니 저 놈 개인이 아닌 데 마레 가문을 믿고 이폴리토 놈과 사업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저 강경한 워딩을 보고 제일 기겁한 사람은 이폴리토 본인도 본인이지만 자기 시누이 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있던 이사벨라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와 오빠로부터 아무런 귀띔도 듣지 못했던 이사벨라는 난데없는 제명공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진짜야, 아니면 오빠를 쫓아내려고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아버지를 들쑤셔서 저지른 짓이야?”

이사벨라의 입장에서 후자가 훨씬 더 나빴다.

만약에 이게 아리아드네가 멀쩡한 오빠를 쫓아낸 거라면 이사벨라 본인도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 그 연유다.

현재 남편과의 사이가 최악에 다다라 있는 만큼, 이사벨라는 절대로 친정에서 축출당하면 안 됐다.

하필이면 이럴 때 이폴리토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책임감이라고는 먹고 죽으려도 없는 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사벨라로서는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여전히 이사벨라의 유일한 친구 노릇을 해 주는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는 변함없이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아버지께 여쭤봐.”

이사벨라는 뭐라 말을 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퍽이나 순순히 이야기해주시겠다. 이게 멀쩡한 친아들을 쫓아낸 거였으면 눈에 띈 김에 나까지 세트로 쫓아내겠지.

이걸 쟤한테 설명할 기력도 없었고 사실 알아듣게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뇌가 없는 사람 붙들고 무슨 짓인가.

이사벨라는 자기도 늙었다며 내심 한탄했다. 처녀 적이었으면 눈물 쏙 빼게 했을 텐데. 대신 그녀는 대안을 찾았다.

“니콜로, 집사 니콜로에게 물어보자.”

그러나 화무십일홍에 권불십년이라, 루크레치아가 살아 있을 시절에는 니콜로의 무등을 전용 당나귀처럼 타고 다니던 이사벨라에게 노집사, 구 당나귀의 응대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바쁘시다고⋯⋯.”

이사벨라는 애먼 하녀를 잡았다.

“편지라던가 전갈이라던가 이런 거 하나도 없었어?!”

“그냥 눈앞에서 문이 쾅⋯⋯.”

이사벨라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루크레치아가 부리던 충직한 하녀들은 이미 아리아드네가 싹 갈아치운 지 오래였다.

도저히 연락창구가 없었다.

그러나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는 재 속에서 비상하는 불사조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넘치는 생명력은 끈질긴 데 마레 추기경과 뒷일 생각 안 하는 루크레치아를 반반씩 닮아 나온 것이었다.

“잠깐만,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안 되면⋯⋯. 그 지인을 노리면 되지.”

아리아드네가 집안 기강을 빡빡하게 잡은 건 사실이지만 아버지 직속 하인까지 모두 다 갈아치우지는 못했다.

집사 니콜로만 해도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니콜로가 줄을 너무 잘 타서 문제였지.

아직 집안에 남아 있는 오랜 하인이라면 몇 명 생각나는 자가 있었다.

“이쪽으로 다녀와 봐.”

이사벨라는 자기 하녀에게 연락처 몇 개와 금화가 담긴 조그만 자루 하나를 같이 내밀었다.

“막무가내로 물어보지 말고, 이것부터 보여주면서 이야기 꺼내.”

그녀는 하녀의 귀에다 대고 속닥속닥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이사벨라의 눈은 아주 조그매져 있었다.

* * *

추기경의 자식들이 무슨 궁리를 하건 달은 지고, 해는 뜨고, 산 카를로 공의회가 개회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승승장구 중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주교위 이상의 성직자들이 산 카를로 공의회에 참석하며 추기경에게 예를 표했다.

법황은 추기경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한 걸음 옆으로 빠져 있었다.

온 산 카를로가, 성황청 전체가 추기경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 “제발 추기경 예하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 “어떻게 다리를 놓아주실 분이 안 계시겠습니까?”

그러나 이폴리토마저 쫓겨난 지금 데 마레 추기경에게 닿을 수 있는 비공식적인 통로는 아무 데도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서슬 퍼런 철권 통치와 이폴리토 도련님마저 날아갔다는 두려움에 집안사람들은 물론이요, 성황청의 수하들도 감히 나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 “알레망 법 대사면의 적용 범위를 알아 와요! 우리 애가 거기 들어가는지 확인해야 해!”

- “밉살스러운 남편의 서자 놈이 집안에 들어와선 안 돼요!”

- “이번에 우리 딸에게 들어온 혼처, 그놈이 인지만 되면 그 집 막내아들보다 나이가 앞이니 그쪽이 백작이 되는 것 아니냐? 지금이라도 답장 보내봐?”

추기경의 결정에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갈릴 예정이었다.

만인의 눈이 모여든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낭보, 누군가에게는 비보인 소식이 사방으로 퍼졌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처소에 하인 한 명이 날 듯이 달려들어 왔다.

“공작님! 공작부인! 통과되었답니다, 통과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루비나 공작부인의 거처에서 산 카를로 공의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체자레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집주인인 루비나 공작부인도 빨개진 눈으로 소리쳤다.

“어떻게 됐대!”

루비나의 하인이 울부짖었다.

“알레망 법 대사면이 통과되었습니다! 체자레 공작님의 출생연도인 1101년도 포함입니다!”

체자레는 주먹을 쥐고 허공을 향해 힘차게 어퍼컷을 올렸다. 루비나는 아들을 껴안았다.

“됐다, 됐어!”

“경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경하드립니다, 공작부인!”

전갈을 알린 왕실 하인이 허리를 연신 굽히며 축하했다. 옆에서 시녀 데보라가 분위기를 타고 격정적으로 박수를 쳤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수석 시녀 자격으로 그녀의 처소에 들어와 있던 미니핀, 바톨리니 백작부인도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를 덧댔다.

“공작 각하라뇨⋯⋯.”

시녀 데보라는 도대체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 멍청하게 클레멘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니핀은 다 계획이 있었다.

“⋯⋯명실상부한 레오 3세 폐하의 후계자이시니, 이젠 왕자 저하⋯⋯.”

그 말을 듣자마자 루비나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체자레의 입가 역시 실룩,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갔다.

“아이고, 우리 복덩이!”

루비나는 다시 한번 격하게 아들을 껴안았다.

“우리 왕자, 국왕 폐하의 맏아들, 미래의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왕!”

오늘은 루비나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정말이지, 체자레를 낳길 잘했다.

* * *

그러나 루비나 공작부인의 처소에서 이런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것과 꼭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가문의 후계자 지위는 타고났지만 자기 발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러 떠난 다른 남자가 새로운 판을 짜려 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중앙대륙의 교역자(敎役者) 여러분.”

라파엘 데 발데사르였다.

그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장이 사망함으로 인해 부수도원장에서 원장으로 승급했고, 이와 동시에 자동으로 흑사병 이후 공석이었던 칼리엔다 주교위의 대행이 되어버렸다.

관운 하나만은 천신께서 보우하신 수준이었다.

칼리엔다 주교 대행, 라파엘은 연단 위에 서서 목청을 돋웠다.

“대륙 전체의 주교위 이상의 성직자분들을 모두 모시는 이렇게 귀한 자리가 어렵게 성사된 만큼, 중차대한 안건 하나를 올리고자 합니다.”

라파엘은 사람이 숱하게 죽어 나간 대역병시대 이후로 토지와 그 소유자가 대응되지 않고 서류에 쓰인 배우자와 실제로 살고 있는 배우자가 다른, 문서로 된 기록이 엉망이 된 세태를 규탄했다.

그 뒤로 시간이 더 지나고 나니 위조한 문서와 오래된 문서가 엉켜 기록이 말도 아니라는 한탄과 함께였다.

“혼돈의 시대가 우리를 할퀴고 간 상흔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걸 다 재조사해서 원위치한다는 건 제한된 행정력 상 어려운 일입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종교인이기도 했지만 중앙대륙의 구조상 행정가이기도 했고, 기록관이기도 했다.

그들은 현실적인 한계에 십분 공감했다.

“그리하여, 현 상태의 문서고를 ‘불변하는 진실’로 인정하는 칙령을 이번 산 카를로 공의회의 가장 큰 업적으로 하면 어떨까, 감히 여기 모이신 여러 현명하신 분들께 여쭙니다.”

이것이야말로 사생아 쟝의 왕좌와 체자레 공작의 환희를 단박에 쳐부술, 문서주의 강화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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