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순진무구한 마음
성황청 공의회는 교리상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보통 100년에 한 번씩 열렸다.
이번처럼 갈급한 교리 문제가 없는데도 열리는 건 루도비코 법황이 십자군 전쟁을 성공시킨 절대권력자가 아니었다면 성사되지 않았을 일이었다.
연단 아래 앉은 고위 성직자들이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눴다.
- “안 그래도 알레망 법 대사면만 의결하고 돌아가기엔⋯⋯.”
- “그렇죠?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자들쯤 되면 이번 공의회에 알레망 법 대사면이 안건으로 올라온 게 갈리코 국왕 필리프의 입김이었다는 것 정도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남들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던 소리를 했다.
- “공의회는 속세 권력에 복무하는 기관이 아니에요.”
그게 기점이었다. 주교들 사이에서 자부심과 의기양양함이 불씨의 온기처럼 퍼져나갔다.
- “우리는 천신의 대리인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 “그분의 말씀을 퍼트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기도 하지요. 지저분한 권력 다툼 따위, 여기로 가져오면 안 되는 겁니다!”
모인 사람 중 한 명이 부지불식간에 문서주의 강화안을 최초로 들고 나온 라파엘을 치하했다.
- “역시 젊은 사람의 시각이 남다릅니다.”
- “그⋯⋯. 칼리엔다 주교위 대행이던가?”
- “행동력도 있네요. 벌써 눈에 띄는데 크게 될 싹이 보입니다.”
라파엘의 주장은 오늘 그들을 감정적으로 몹시 만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참 고마운 젊은이였다. 그 외로, 문서주의 강화안의 파급력에 대해서도 토의가 있었다.
- “이렇게 되면 성황청의 영향력이 올라가려나요?”
- “등기의 공신력이 더욱 중요해지니, 등기를 관리하는 성황청 문서보관소의 힘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몸담은 조직이 강력해지는 건 기본적으로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직의 일원이었지만 동시에 연륜이 쌓인 종교인이자 학자라는 특성상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뭔가가 급격하게 바뀐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 “뭐 꼭 그렇게만 볼 일도 아닙니다. 저 젊은이가 황금 밸런스를 잘 잡아냈어요. 아예 처음부터 문서의 진실성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하자고 했으면⋯⋯.”
몇몇 성직자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건 주로 욕심 없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 위주로 그랬다.
- “부패사건이 터져나가겠네요.”
- “이거 봐달라, 이거 새로 넣어달라, 아이고, 생각만 해도⋯⋯.”
이쪽 부류는 라파엘의 안을 적극적으로 밀었다.
- “지금처럼 특정 시점을 고정시켜서 ‘오늘부터 진실’이라고 잡는 것,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봅니다.”
- “분탕질할 공간이 생기면 절대로 안 되죠, 그렇고 말고요.”
이 선량하신 분들의 생각 속에 저 제안을 꾸민 놈들은 이미 다 조작할 건 조작하고 없앨 건 없앤 상태일 거란 것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 “오늘이야말로 중앙대륙 기록의 원년입니다!”
순진무구한 학자 스타일의 노주교 한 분이 크게 외쳤다. 공부만 하느라 정치를 놓아 승진이 안 된 분이었다.
- “드디어, 기록에 공신력이 생기는 거라고요!”
먹물들만 공유하는 일종의 잔잔한 감동이 장내에 퍼져나갔다.
바깥의 민초들에게 물었으면 저 사람들 뭐 때문에 저렇게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거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표결에 부치겠소!”
진행을 주재하는 데 마레 추기경의 힘찬 목소리가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안에서 울렸다.
“투표 용지를 준비해 주십시오!”
* * *
레티시아가 ‘이폴리토의 상황에 대해 아버지께 여쭈어 보라’고 한 건 남의 일이라서 대충 대답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나름 그게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여겨서 그렇게 말한 거였다.
이사벨라가 데 마레 추기경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고 답답한 상태로 며칠이 지나자 레티시아는 이사벨라에게 도대체 왜 아버지께 여쭤보지 않냐고 광분하기 시작했다.
짜증이 난 이사벨라는 팩 내쏘았다.
“너 도대체 왜 그래?! 내가 알아서 한다고!”
“넌 오빠가 걱정되지도 않아?!”
이사벨라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레티시아에게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오빠지 니 오빠냐?! 왜 니가 나대?”
레티시아는 나댄다는 말에 분개했다.
“넌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내가 이제껏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레티시아는 그간 이사벨라의 인생에서 감초 같은 활약을 했다.
행동대장이 되어 아리아드네를 괴롭히는 거라던가,체자레 공작과의 뜨거운 시간을 만인에게 공개하는 실무자가 되었다거나 등등.
굽이굽이에서 쓸모는 확실히 있었지만 이사벨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낀 일 중에 결과가 좋은 일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감사한 마음도 없었다.
“나대는 게 나대는 거지. 야, 니가 뭔데 이폴리토 오빠를 걱정해?”
여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뭔가 깨달은 이사벨라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잠깐만. 너 설마 이폴리토 오빠를 진짜로⋯⋯.”
이사벨라는 그간 레티시아를 이폴리토에게 이모저모 엮어주기는 했었지만 그게 정말로 둘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작위가 없는 이폴리토가 각종 행사에 참가하려면 자작 영애인 레티시아를 출입증 삼아 가는 게 가장 간이해서 그랬을 뿐이다.
“이폴리토 오빠는⋯⋯.”
이사벨라는 이폴리토가 너보다 두 급은 윗급이지, 라고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판단 근거는 단순했다.
이폴리토가 레티시아에 비해 작위 같은 걸 내세울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순전히 레티시아가 너무 못생겨서 그랬다.
이사벨라는 나쁜 년이기는 해도 현실 인식이 안 되는 년은 아니었다.
남자를 대할 때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지점은 그의 경제력과 성적 능력이고, 여자를 대할 때 하면 안 되는 짓은 그녀의 성적 매력에 관한 비하이다.
지금 저 말을 입 밖에 냈다가는 칼 맞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하필이면 이사벨라가 하려던 말을 기민하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항상 말귀를 더럽게 못 알아듣다가 이럴 때만 눈치가 빨랐다.
“이 XX XXX⋯⋯!”
얼굴이 시뻘게진 레티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쳤다.
절반은 욕설이고 절반은 발음이 뭉개져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단어만은 확실했다.
“나쁜 년!”
레티시아는 저렇게 외치고 이사벨라의 응접실—정확하게는 이사벨라의 시누이 클레멘테의 응접실—에서 뛰쳐나갔다.
이사벨라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레티시아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라 타격감은 전혀 없었으나, 황당한 상황은 맞았다.
“쟤가⋯⋯. 이폴리토 오빠를 좋아했다고?”
* * *
여자 사람이 준 아픔은 남자로 치유하는 게 제격이었다.
“이게 말이 돼?”
“진짜 주제도 모른다.”
디파스칼 백작 안드레아는 마차 안에서 이사벨라의 말에 맞장구쳤다.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 자작 영애가 저런 발칙한 꿈을 꾸고 있었다니, 객관적으로 웃긴다는 게 그의 의견이긴 했으나, 사실 전혀 동의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두손 두발 다 들어 이사벨라의 말에 적극 찬성했을 것이다.
디파스칼 백작은 바로 얼마 전에야 드디어 이사벨라와 말을 편하게 하게 되었다.
이사벨라의 조막만한 입술이 조잘조잘 사람의 말을 한다는 건 감동스러웠다. 그녀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는 건 더더욱 감동적이었다.
“안드레아, 나 진짜 화나!”
이사벨라는 가감 없이 자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안드레아 디파스칼 백작은 순전히 반반하게 생기고 잘 해주는 걸로 간택된 남자였다.
거물의 정도라거나, 주머니를 잘 여는 걸로 선택한 남자였다면 대영주 중 최소 후작급 이상으로 골랐을 것이다.
그게 아닌 이상 디파스칼 백작에게는 이사벨라를 위해 해 줘야 하는 노무가 있었다.
즉, 그녀의 감정 찌꺼기를 충실한 쓰레기통처럼 모두 들어주는 거였다.
“시누이네는 도대체 멀쩡한 게 하나도 없어! 클레멘테는 하녀도 멍청해!”
전 불륜 상대의 이름이 나오자 디파스칼 백작은 움찔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반응하지 말아야 했다. 이사벨라처럼 완벽한 여자에게 자기의 지저분한 과거를 들킬 수는 없었다.
“오? 바톨리니 백작부인 집이 불편한가?”
“끔찍해,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어!”
이사벨라는 두카토 금화까지 긁어서 쥐여 보냈으나 자기가 뽑아준 리스트 중 아무도 섭외하지 못하고 돌아온 클레멘테의 하녀에 대한 분통을 터트렸다.
“도대체 왜 들어가다가 니콜로한테 걸려? 내가 보낸 거라고 이야기 안 했으면 됐잖아! 거기서 관등성명을 곧이곧대로 대는 게 말이나 돼?! 제길!”
“지금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알아보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니콜로도 진짜 너무해, 내가 무슨 땅문서 내다 팔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겠다는 건데 왜 얼씬도 못 하게 하는 거야! 나는 딸도 아니야?!”
거기까지 말한 이사벨라는 눈물을 찍어냈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저녁 먹는 자리에서 소식을 들은 클레멘테가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한 게 너무 속이 쓰렸다.
- “⋯⋯오라비만?”
거기서 뭐라고 더 말을 얹는 건 교양 없는 짓이었다.
순전히 그 이유로 차마 바톨리니 노백작이 있는 앞에서 이러쿵저러쿵하진 못했지만 오타비오도 십분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어린 처남댁인 이사벨라를 예뻐하는 바톨리니 노백작은 자기 아내를 혼냈고, 클레멘테는 약이 올라 죽으려고 했다.
그 꼴을 보고 속이 좀 풀리긴 했지만 이렇게 올가미가 죄여 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살면서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사벨라가 그 예쁜 얼굴로 울먹이자 디파스칼 백작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울지 마, 울지 마. 가여운 이사벨라.”
그는 지금 눈이 뒤집혀서 보이는 게 없는 상태였다.
“내 아내의 친정 유모가 너희 가문과 친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
이사벨라를 돕기 위해서라면 끌어오면 안 되는 인맥까지 총동원할 수 있었다. 이사벨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루이사? 루다? 뭐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그의 음성에 자신이 없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면 확실했지만 그러기엔 좀 조심스러웠다. 마지막 위험감지능력이었다.
그러나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그는 아내의 유모의 친분에 대해 기억나는 걸 전부 다 주워섬겼다.
“너희 사용인 중에 좀 높은 사람이라던데? 그, 남쪽 사람이고. 나이는 좀 있고. 우리 아내 유모도 그쪽 지방 사람이라 알게 되었다던데⋯⋯. 좀 덩치 있고 목소리 큰⋯⋯.”
“혹시 루이자 아니야?!”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사벨라의 호명에 디파스칼 백작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는 거 같다?”
“그거 집사 니콜로 아내 이름이야!”
이사벨라가 신이 나서 외쳤다. 디파스칼 백작도 함께 흥이 나 외쳤다.
“우리 아내 유모가 아는 사람 집사의 와이프였던거 맞는 것 같다!”
디파스칼 백작은 박수를 짝 쳤다.
“내가 바로 알아봐 올게. 걱정하지 마, 귀여운 이사벨라. 네가 걱정 같은 걸 한다니 네 남편은 멍청이임이 틀림없어.”
그는 오늘 이사벨라의 입술을 훔칠 작정으로 이 자리에 나왔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눈물을 훌쩍이는 가여운 작은 새를 성적으로 범하는 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었다. 암, 아니고말고.
신사가 하는 건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