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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14화 (717/733)

<제414화> 미래의 국왕을 위하여

“저기, 라비냐.”

디파스칼 백작은 아주 은근한 어투로 아내의 유모를 불렀다. 늙은 유모는 우리 아가씨의 난봉꾼 남편이 이제 자기까지 건드리는 건가 싶어 기겁했다.

우려를 전혀 숨기지 않은 채 그녀는 아주 떨떠름하게 답했다.

“⋯⋯왜, 왜 부르셔요, 백작님?”

“아니아니아니아니,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고.”

얻어내야 할 게 있는 디파스칼 백작은 아주 우호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유모는 만만치 않았다.

“제가 어떤 표정으로 보는데요, 백작님?”

그러나 디파스칼 백작은 프로 바람둥이였다. 그는 여자와 대화하는 법을 알았다.

백작은 결국 넘치는 유모의 경계심을 뚫고 어찌어찌 약을 파는 데에 성공했다.

“프란체스카한테 선물로 줄 포도주 농장 때문에 그래.”

“⋯⋯우리 아씨한테 백작님이 선물을요?”

‘니가 웬일로?’가 생략된 건 화자와 청자 모두 알았다. 그러나 현재 몸이 닳은 디파스칼 백작은 이 모든 오만불손함을 용서했다.

이사벨라의 기뻐하는 얼굴, 그녀 앞에서 뿌듯해질 자신을 생각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알랑방귀를 뀌었다.

요약하자면 아내를 위해 포도주 농장을 사려고 하는데, 디파스칼 백작부인에게 쓰레기 사업을 선물로 줄 수는 없으니 이게 유망한지 여부를 수도원 포도주의 주세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데 마레

추기경을 접촉해 확인하려고 한다는 거였다.

“호오⋯⋯. 전 세금이니 사업이니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어쨌든 데 마레 추기경께 여쭤보면 된다는 거군요.”

“그래! 그 집사의 아내를 불러낼 때, ‘이사벨라 데 마레’가 부르는 거라고 알려주게.”

디파스칼 백작은 집사의 아내가 나와 이사벨라를 만났을 때 분위기가 험악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요새 데 마레 가문의 위세가 대단해, 디파스칼 가문의 이름이나 부인 유모의 개인적 친분보다는 그 집 딸 이름을 파는 게 집사의 아내를 꾀어낼 때 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디파스칼 백작부인의 유모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여자 얘기는 왜 해야 하는데요? 남의 집 부부 선물에 외간 여자 이름이 왜 나오죠?”

“고마운 여자지!”

디파스칼 백작은 필사적으로 자기 행동을, 그리고 이사벨라를 옹호했다.

“지금 아무도 데 마레 추기경에게 컨택을 할 수가 없단 말이오. 이사벨라 데 마레가 지금 자기 이름을 빌려줘서 프란체스카가 이득을 보는 거란 말이야!”

늙은 유모 라비냐는 투덜투덜했으나 이게 프란체스카 아씨를 위한 비밀 선물이며, 프란체스카가 자기만의 포도 농장을 선물 받으면 정말 기뻐할 거라는 이야기에 끝내 설득되고 말았다.

“정말, 정말 프란체스카에게는 비밀이오! 깜짝 선물이거든!”

유모도 칠십이 훌쩍 넘은지라 판단력이 전 같지 않았다. 바람둥이는 대개 여자를 잘 설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결국 깜빡깜빡하는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넣어 볼게요.”

* * *

“문서주의 강화안의 통과를 선언하는 바이오!”

1127년의 산 카를로 공의회는 결국 알레망 법 대사면과 문서주의 강화안을 통과시켰다.

완연하던 단풍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한,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어느 날이었다.

“Salute!” (건배!)

“Alla nostra!” (우리를 위하여!)

데 마레 대저택의 깊숙한 곳, 아리아드네가 따로 쓰는 호실에서는 흥겨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서주의 통과를 축하합니다!”

“이게 다 라파엘 덕이지!”

줄리아 데 발데사르의 축하에 데 마레 추기경이 얼큰하게 취해서 답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따스한 벽난로 앞에는 이번 한판 승부에 관여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축배를 드는 중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알폰소, 데 마레 추기경, 라파엘은 물론이요, 줄리아 데 발데사르와 그녀의 연인 프랑수아 생트-샤펠, 그리고 어린 왕자 루이까지 모인 모임이었다.

모두 좋은 친구들이었다. 추기경의 손에는 귀한 손님이 오는 날에만 꺼내는 오래된 그라파가 들려 있었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추기경이 가장 좋아하는 품종이 가장 작황이 좋았던 해에 생산한 술이었다.

“자네 오빠, 똘똘해! 젊고, 패기 있고, 밀어붙이는 힘도 있고! 아주 마음에 들어!”

추기경은 줄리아에게 라파엘에 대한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막상 그 대상자인 라파엘은 뾰로통하게 답했다.

“사윗감으로는 싫어하셨잖아요.”

“아, 그거랑 그거랑 다르지!”

데 마레 추기경은 발끈했다.

“자네한테 내 딸은 못 줘!”

라파엘도 발끈했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요! 아 진짜 너무하시네. 주는 거 없이 평생 부려 먹으려고!”

“노임을 딸로만 받아 갈 거면 썩 꺼져!”

중앙에 앉은 딸과 진짜 사위는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줄리아가 끼어들었다.

“이 집에 딸 하나 더 있는 건 알지 오빠?”

라파엘은 질색했다.

“거긴 유부녀잖아! 아니 그리고 그쪽은 유부녀인 게 문제가 아니잖아!”

다들 까르르 웃었다.

데 마레 추기경과 아리아드네는 이번 산 카를로 공의회에서 목적했던 바를 다 이뤘다.

알폰소는 거사가 잘 된 이후엔 고생했던 사람들끼리 모여 축하하는 날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마련된 자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이게 꼭 필요한가 했지만, 의외로 괜찮았다.

알폰소의 이 제안에 아리아드네는 새삼스레 놀랐었다. 그들은 참 다른 사람들이었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아득바득 기어 올라간 아리아드네에게는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 쉰다’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한 개의 목표 달성 이후에는 언제나 그다음 허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생각보다 좋은 거 같아.”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소곤소곤 귓속말했다. 일 한 건을 성공시키고 친구들과 아빠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은 진짜로 재미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지 않고, 아무것도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고, 말조심 따위 안 해도 되는, 탁 놓는 경험. 그리고 공기 안에 떠도는 흥분,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기세.

알폰소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아드네에게 그녀가 처음 해보는 경험을 시켜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강아지에게 첫눈을 밟게 했을 때, 아기에게 처음으로 과일을 먹여보았을 때 그 생물의 경탄을 보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었다.

“난 자기가 좀 더 쉬었으면 좋겠어.”

알폰소는 고개를 자기에게 귓속말하느라 몹시 가깝게 다가온 아리아드네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곤 속삭였다.

“더 많이 자고, 좀 더 게으름을 부리고,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그 말을 들은 아리아드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치만. 나 없이는 일이 안 돌아가는걸.”

그녀는 타고난 마이크로 매니저였다. 남한테 맡기고 답답할 바에야 그냥 내가 해치우고 만다는 게 그녀의 신조였다.

이건 지위고하와 상관없었다. 전생에 예비 섭정공비로서 왕궁 살림을 전담했을 때도 그녀는 사소한 것을 놓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짝은 그걸 적극적으로 장려하긴 했지만.

알폰소는 그녀에게 권했다.

“생각 외로 괜찮을 수도 있어. 아랫사람들을 믿어봐.”

태어날 때부터 왕자궁의 조직이 자기 밑에 있었던 남자의 말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가서 소대 인원을 지휘하면서 비로소 인간 개개인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그 전의 알폰소에게 일이란 특정 사람이 아닌 조직이 해치우는 것이었고, 일 처리가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원래 그런 거니까.

반면에 자수성가한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리아드네는 내가 관여하지 않는데도 일이 알아서 돌아갈 거라는 믿음 자체가 없었다.

그녀가 전적으로 믿는 사람은 산차 뿐이었다.

사실 산차를 믿는 것도 그녀의 충성심과 영리함을 믿는 것이지 산차가 아리아드네의 부재 시에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산차가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면 아리아드네의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남들한테 내리고 좀 쉬자, 응?”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말이 금수저의 여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논박하진 않았다. 그럴 짬이 없었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짧은 버드 키스를 넘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쪽. 쪽. 간격이 좁아졌다. 입술과 입술이 붙어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가슴팍에 밀어내려는 태세로 손을 댔다.

“아, 음, 그게―.”

“야!!”

그러나 알폰소를 멈춘 건 아리아드네의 밀어냄이 아니라 라파엘의 저지였다.

“진짜, 양심도 없다!”

까인 전 구혼자를 앞에 두고 스킨십이라니! 난 니 친구도 아니냐!

그러나 저렇게 곧이곧대로 외치기엔 라파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에둘러쳤다. 에둘러쳤다고 생각했다.

“성직자도 있고 어린애도 있는데! 무슨 짓이야!”

아줌마 아저씨들의 음주 파티에 플로트 소다를 들고 끼어 있던 어린 루이 왕자는 자기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오빠의 불행이 나의 기쁨인 줄리아가 깔깔대며 끼어들었다.

“성직자? 오빠를 배려해달라는 말이야?”

라파엘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줄리아는 속으로 잭팟을 외치며 급소에 칼을 꽂았다.

“차였다고 언제까지 징징댈 거야! 천신님의 품에 귀의했으면 주접 그만 떨고 기도나 해!”

“아니! 아니! 나 말고!!”

라파엘은 벌게진 얼굴로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그는 데 마레 추기경을 가리켰다.

“아버지도 계시잖아!”

좋았어. 완벽해. 잘 넘겼어.

그러나 제아무리 개과천선을 했어도 데 마레 추기경은 평범한 부친과는 여전히 거리가 좀 있었다.

추기경은 싹 비운 그라파 대신 데운 포도주를 홀짝이며 태연하게 답했다.

“왜, 부부 사이에는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건 안방에서의 일이고 친아버지 앞에서요?

라파엘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그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어린 루이 왕자를 옆에 꼭 끼고 있던 프랑수아였다.

“맞습니다. 교육에 나빠요.”

프랑수아는 대 줄리아 전용 병기였다. 줄리아가 대번에 조용해졌다.

“미래 갈리코 왕의 여성관이 비뚤어지면 큰일납니다.”

프랑수아의 옹호에 라파엘은 기세등등해졌다. 그러나 알폰소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왕이 결혼한 아내 한 명만 보고 사랑을 쏟으면 그거야말로 올바르게 된 여성관 아닌가? 도리어 추가적인 교육을⋯⋯.

사위의 주접은 장인어른이 끊었다. 끊어주려고 한 건 아니고, 그저 얼큰하게 취해 흥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자기 집 안에 갈리코 왕국의 미래 국왕이 있단 생각에 기분이 제대로 좋아진 데 마레 추기경이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갈리코의 차기 왕을 위하여!”

아리아드네가 아버지의 축사를 냉큼 받았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차기 왕을 위하여!”

레오 3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와중에 어디 가서는 절대 못 할 말이었지만, 여기는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곳이었다.

줄리아와 라파엘, 프랑수아가 흥겹게 재창했다.

“목표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왕국을 위하여!”

어린 루이도 자기 손에 쥔 플로트 소다를 들어 올렸다.

“위하여!”

* * *

산 카를로 공의회의 소식은 시린 바람이 섞여 부는 프리노약 산맥을 날 듯이 넘어 몽펠리에 궁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필리프 4세에게 닿았다.

“드디어!”

젊은 국왕은 옥좌의 손잡이를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꽉 잡았다.

“날짜는, 날짜는 잘 적혀 있겠지?”

필리프 4세의 눈에서 광기가 흘렀다. 오늘에야말로 그의 아들을 당당한 국왕의 후계로 삼을 것이었다.

그의 사랑은 잘못되지 않았다. 다들 안 된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권력은 추문을 찍어누른다.

갈리코 국왕의 권력으로 잘못된 일도 올바른 일로 바꿀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오늘은 그의 힘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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