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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15화 (718/733)

<제415화> 좌절

필리프는 이번 사안을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챙겼다. 성황청의 약속을 받기는 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약속한 군자금을 줄여버린 짓이나 죽은 외드 대공이 제멋대로 한 짓이지만 십자군의 보급에 친 장난질 등등 상당히 찔리는 게 많아서였다.

그가 제일 걱정한 건 루도비코 법황이 알레망 법 대사면을 통과시키며 쟝의 생년을 빼놓는 사태였다.

루도비코 법황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제아무리 피사리노 항구를 약속받았다 할지라도 무슨 수를 쓰든 필리프에게 엿을 먹이고도 남을 인간이다, 라고 필리프는—올바르게—판단했다.

그러나 결론을 맞췄다고 반드시 과정까지 다 맞추는 건 아니다.

오늘 보고에 들어온 사람은 둘, 성황청 쪽의 동향 담당인 몽펠리에 대주교와 외교라인 실무진인 르비엥 백작이었다.

몽펠리에 대주교가 먼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쟝 님의 생년이신 1122년은 틀림없이 알레망 법 대사면 기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리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물었다.

“뭐지? 표정이 왜 그따위야.”

몽펠리에 대주교는 산 카를로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과거의 본인을 프라이팬으로 때리고 싶었다.

그는 필리프 4세의 의제인 알레망 법 대사면을 밀기 위해 산 카를로 공의회에 갔어야 했고 공의회에 참석할 자격도 있었으나 가지 않았다.

애초에 이 건은 필리프 4세가 그를 제치고 바로 루도비코 법황에게 찌른 건이었다. 자기 일이 아니었다.

굳이 갔다가 만에 하나 부결되면 그 책임소재를 뒤집어쓸텐데, 그러기 싫었기 때문이다.

부결은 아니다. 그런데 부결보다 더 나쁘다. 그는 나쁜 뉴스의 전달책이 된 자기 신세를 자책했다.

“폐하, 확인해보셔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필리프가 콧김을 뿜었고 몽펠리에 대주교는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새파랗게 질린 몽펠리에 대주교를 옆에 두고 르비엥 백작이 보고를 시작했다.

그는 본디 발로아 대공의 측근이었으나 대공의 몰락 한참 전에 지저분한 업무에 넌더리를 내고 아예 영지로 틀어박혀 버렸고, 그 덕에 살아남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이를 아깝게 여긴 주변인들 덕에 이후 필리프의 몽펠리에 궁정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일이 더럽기는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였다.

아니, 라리에사에서 필리프로 바뀌었으니 더 나빠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상사 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인생 같으니.

“문서주의 강화안이라는 것이 함께 통과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몽펠리에 대주교를 흘긋 곁눈질했다.

‘저 양반 일을 대체 왜 내가⋯⋯.’

그러나 이건 일개미의 타고난 숙명이었다. 르비엥이 이런 걸 모르쇠 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면 애초에 이 보고 자리에 같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몽펠리에 대주교는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발발발 떨고 있었다.

“⋯⋯문서주의 강화안이란 현재 성황청 문서보관고에 들어가 있는 서류에 대해서만 그 진실함을 인정하기로 한 시책으로⋯⋯.”

필리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생아 쟝의 존재는 일반적인 왕의 사생아보다 더더욱 숨겨져 있었다.

왕의 사생아는 보통 그 모친 남편의 성을 따르고 그 작위를 물려받게 하거나 아예 새로운 작위를 창설해 하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쟝의 경우 바깥에 내세울 수 있는 어머니가 없었다. 자연히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필리프는 알레망 법 대사면을 받고 나면 쟝을 어머니 란을 공백으로 해서 자신의 아들로, 당당한 브리앙 왕가의 적자로 입적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보고는 도대체 무엇인가.

“알레망 법 대사면도 마찬가지로⋯⋯. 현재 성황청 문서보관고에 들어가 있는 서류에 대해서만 효과가 있다고⋯⋯.”

라리에사에게 단련된 르비엥은 고개 한 번 쳐들지 않고 보고를 쭉 읊었다. 안 좋은 상품을 파는 장사치 같은 발언속도였다.

르비엥도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 물건이 날아오기 전에 빨리 최대한 많이 보고를 해 둬야 나중에 두 번 할 일이 없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쟝 님의 출생신고서가 아직 성황청에 제출되지 아니하였다고⋯⋯.”

이 타이밍에 옆의 몽펠리에 대주교가 털썩, 주저앉았다. 르비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국왕 폐하의 표정이 어마어마한가 보다. 그러나 보고는 완료되어야 했다.

“⋯⋯그 말인즉슨, 쟝 님은 출생 연도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사면에서 사면받으실 수 없다는⋯⋯.”

드디어, 필리프 4세가 르비엥 백작의 말을 끊으며 울부짖었다.

“루도비코!!!”

마치 짐승의 흉포한 울음소리 같았다.

“네가 감히!! 어찌 감히!!”

- 와장창!

국왕의 손에 들려 있던 주석 잔이 허공을 날았다. 도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안도는 잠시, 필리프는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것을 쥐고 던졌다. 아, 라리에사 대공녀는 힘이라도 없었는데.

“루도비코! 이 쓰레기 같은! 에트루스칸의 더러운 수캐!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릴!”

욕은 자기소개라는 옛말이 정말로 맞나, 라고 르비엥 백작은 아득하게 생각했다. ‘더러운 수캐’라니, 본인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별개였다. 르비엥 백작은 눈짓으로 얼른 하급 하인들을 왕의 집무실에서 나가게 했다.

나가는 김에 아예 주저앉은 몽펠리에 대주교도 들고서 말이다.

‘대주교, 저기 오줌 싼 건 아니겠지⋯⋯.’

확인은 나중이다. 르비엥은 한숨을 삼켰다.

‘이게 필리프 집무실이지 내 집무실이냐⋯⋯. 카펫이 소변으로 젖었어도 내 카펫 아니다⋯⋯.’

이것이 월급쟁이의 장점이었다. 책임을 안 진다!

그러나 그는 손해 보는 월급쟁이였다.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본인과 국왕의 직속 시종들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오귀스트! 오귀스트!”

반려를 잃은 삼십 대 후반의 젊은 왕은 죽은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이러면 몇 날 며칠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발광한다.

“다 나가, 주변을 막고 사람들을 치우고.”

또 시작이었다. 이번 광증은 좀 길 것 같았다.

* * *

몽펠리에 궁전까지 소식이 닿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일단 알게 된 후에는 모든 것이 빨랐다.

아주 빠른 상황 파악 후 필리프 4세의 분노가 터졌다.

그러나 산 카를로의 빌라 소로토네에선 아주 뒤늦게야 이번에 일어난 일의 여파를 제대로 평가하게 되었다.

원래 루비나 공작부인의 무리에서 이런 쪽 일은 클레멘테와 오타비오의 아버지, 고 콘타리니 백작의 담당이었다.

그의 사망 후 생긴 빈자리가 너무 컸다.

클레멘테는 사교모임에는 능통했으나 궁정에서 돌아가는 정치 외교나 행정 쪽은 전혀 배운 바가 없었고, 오타비오는 교육이고 나발이고 그냥 아버지의 공백을 메울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리의 우두머리인 루비나 공작부인은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해야 했다.

감투는 포커 쳐서 딴 건 아니라고, 그래도 이 아사리판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가장 빨리 느낀 사람은 루비나 공작부인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알레망 법 대사면—과 문서주의 강화안—이 가결된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였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그들 둘만이 쓰는 가족 식당으로 내려가 레오 3세를 만났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그를 보자마자 아주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제 적장자의 어머니가 된 그녀를 레오 3세가 축하하거나, 치하하거나, 그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 3세는 뚱한 표정으로 올리브유를 뿌린 브로콜리를 세 토막 냈을 뿐이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한 루비나 공작부인이 남편에게 물었다.

“저에게 뭐 하실 축하 없으세요, 여보?”

호칭부터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원래 레오 3세를 ‘폐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간드러진 ‘여보’에도 레오 3세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축하? 무슨 축하.”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브로콜리를 헤집다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그 냉랭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루비나 공작부인의 레오 3세에 대한 호칭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게 루비나 공작부인이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만 받을 축하가 아니죠. 폐하께서도 받으실 축하죠.”

의지의 여인, 집요함의 아이콘 루비나 공작부인은 냅킨을 입가에 대고 수줍게 웃었다.

“폐하께서도 아들을 하나 새로 얻으신 것 아닙니까?”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단어를 스타카토로 끊어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적.장.자.를요.”

레오 3세는 그제야 브로콜리의 사체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가뜩이나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못했다.

산 카를로 공의회의 결과 때문은 아니었다.

루도비코, 이 발칙한 인간이 자기 앞에서는 실실 웃으며 서자에게 기회를 어쩌고 하더니만 ‘왕의 조카’로 등록된 체자레를 싹 건너뛰고 알레망 법 대사면을 펼친 건 썩 기분이 나빴다.

체자레를 위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무시를 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며칠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오늘 아침에 레오 3세를 슬프게 한 건 다리에 난 쥐였다.

젊은 놈들은 아침에 바지에 천막이 쳐지느니 안 쳐지느니 같은 걸로 쌩쌩하네 다 죽었네 하는데, 예순이 넘은 레오 3세가 보기에 그건 다 배가 처불러서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천막 같은 건 사치였다. 레오 3세는 자다가 새벽녘에 ‘악’ 소리가 나게 종아리가 아파서 잠에서 깼다.

찌릿찌릿 저리고 나을 기미도 없이 욱신거리는 게 정말이지 고약했다.

눈을 비비고 시종에게 시간을 물어보니 새벽 세 시였다. 다시 잠을 청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늙어버린 몸뚱이는 잠들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해가 뜰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눈그늘이 가득해진 상태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게 되었다.

부하랍시고 있는 것들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침이 밝자마자 궁정 의사를 불러 다리에 쥐가 났다고 징징댔더니, 의사는 단호하게 ‘붉고 노란 음식을 드셔서 그렇다’고 선언했다.

-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데 먹을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자네는 다리에 쥐가 나 본 적도 없잖아!”

- “의학적 진실입니다.”

의사는 그의 아침 식단에서 고기를 다 빼 버렸다. 고기뿐이랴, 토마토, 치즈, 사프란 밥, 고춧가루, 고구마, 전부 다 뺏겼다.

남은 건 이 끔찍한, 나무처럼 생긴 풀떼기뿐이었다.

그런데 루비나까지 나타나서 시비를 걸었다. 오늘은 레오 3세의 일진이 나빴다. 일진이 나쁜 레오 3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봐, 임자.”

레오 3세는 자기 일진이 나쁜 날 남의 일진이 좋은 꼴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

“임자가 뭐 착각하는 모양인데.”

만고에 쓸모없는 여자 같으니. 새벽에 곁에 있었으면 다리라도 주무르게 시켰을 것 아닌가.

“난 여전히 외동아들뿐이야.”

루비나의 표정이 무너졌다. 옳지, 저래야지. 레오 3세는 루비나와 잠자리를 따로 한 지 오래되었다. 아마 그때 그 매독 사건 이후였을 것이다.

혼자 자는 것의 쾌적함에 익숙해지자 더는 루비나 옆에서 잘 수가 없었다.

루비나와 따로 자기로 결정한 건 자기였지만, 그리고 더는 같이 잘 생각은 없었지만, 루비나가 밤에 다리는 주물러 줘야 했다.

모순과 불만족에 가득 찬 레오 3세는 루비나에게 쿡, 쿡, 의미가 가득한 말 한마디 한마디씩을 눌러 담아 그녀의 분수가 어디까지인지 알려 주었다.

“임자가 머리가 나쁜 건 알아. 근데 정도껏 이어야지. 머리가 나쁘면 착하기라도 하던가! 머리도 나쁜데 욕심도 많아! 무슨 여자가 이래?”

레오 3세의 언성이 점점 더 올라갔다.

“산 카를로 공의회 결과로 체자레는 내 조카임이 온 천하에 확실하고 명백해졌다고!”

루비나도 그때는 좋다고 박수를 치더니 이제는 제 아들이 왕의 적자까지 되어야겠다고 나대는 꼴이 눈꼴시기 짝이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없으면 이걸 설명해 줄 사람 하나 없나? 이걸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임자한테! 설명해야겠어?”

나처럼 중요한 사람이 왕국에 없는데, 내가 이 귀한 시간을 멍청한 저 여자를 계몽하는 데에 써야 한단 말인가?

“지금 안사람 노릇이 도대체 몇 년째야. 마르그리트가 죽고 다 당신 천하잖아. 근데도 이 모양 이 꼴! 당신의 쓸모가 도대체 뭐야?!”

루비나 공작부인은 새파랗게 질려서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손수건을 깨문 채 울음을 참았다.

그래서 원래 그걸로 찍어냈어야 했을 맺힌 눈물이 그대로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젊어서 봤으면 천하절색이라고 좋아했을 것이다. 루비나는 원래 산 카를로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다.

그러나 이제 다 늙어서 주름진 피부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몰골은 청승맞고 주책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 잠이나 자!”

레오 3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꼴도 보기 싫었다.

“가뜩이나 속 시끄러운데!”

그는 식당에서 폭풍우처럼 나가버렸다.

루비나를 쫓아내지 않고 자기가 나간 건 루비나에 대한 마지막 존중⋯⋯. 이라기보다는 그녀에 대한 마지막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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