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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17화 (720/733)

<제417화> 본의치 않은 사기 결혼

“시나데노스 후작령이⋯⋯. 어디였더라?”

레오 3세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제 기억력이 전과 같지 않았다.

사실 이건 어느 정도는 레오 3세를 탓할 계제가 아니기도 했다.

국왕이 혼처를 알아보라고 델피아노사 경에게 명을 내리며 주문했던 상대는 어디까지나 ‘왕국의 공주’였다.

언뜻 듣기에 후작령의 후작 영애는 그 조건에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레오 3세가 갑자기 왜 자기 보좌관이 엄한 후작령 이야기를 꺼내는지 못 알아들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정확히 그 부분 때문에 경을 칠까 봐 두려웠던 델피아노사 경은 조심스레 국왕의 기억을 환기했다.

“그⋯⋯. 왕위계승권이 있는 공주 위주로 혼담을 넣어보라고 명령하셨던 일 말입니다.”

델피아노사 경은 억울했다. 이건 심지어 델피아노사 경의 업무 범위도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마르케즈 백작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혼처를 찾으며 찔리는 요구조건을 몇 가지 건 레오 3세는 능력은 있어도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할만한 마르케즈 백작보다는 전문성은 떨어져도 입 안의 혀처럼 구는 델피아노사 경을 선택했다.

“아. 그랬지. 그런데 후작령?”

“시나데노스 후작은 만치케 후국(侯國)의 지배자이고⋯⋯.”

“아!”

늙은 국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 그, 맞아. 그런 곳이 있었어. 거기는 후작령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땅에 왕위를 요구할 계승권이 있지 않았는가.”

“맞습니다! 영명하십니다, 폐하.”

델피아노사 경은 레오 3세의 뿌듯해하는 기색에 이때다 싶어 물개박수를 쳤다.

여기서 국왕이 최대한 만족해야 왕국의 공주를 못 데려오고 후국의 후작 영애를 데려온 자기의 실책 아닌 실책이 묻힌다.

“안 그래도 시나데노스 후작가가 가진 클레임은 복잡해서 한 번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델피아노사 경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서 국왕에게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레오 3세가 디테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핵심적인 사항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그의 기억력 감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인 양 재차 보고를 올렸다.

“우선 부계로 내려오는 만치케 후국이 있는데⋯⋯.”

시나데노스 후작가가 지배하는 만치케 후국은 라트갈린 지방, 백중해에서 예사크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영지였다.

시나데노스 후작가는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동라탄 제국 프린시키포의 방계 후예로서 군주 가문과의 통혼은 가능한 신분이었다.

다만 그들이 지금 다스리는 후국은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척박한 땅입니다. 경작도 어렵고. 그런데⋯⋯. 마침 예사크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이번 성전을 틈타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델피아노사 경은 그렇지만 이 부가 오래 가지는 않을 거라고 알렸다.

“성전 때문에 양측 군대가 급하게 필요한 보급을 만치케 후국에서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양측?”

“예. 이교도에게도 가격만 맞으면 공급했다고.”

레오 3세는 혀를 찼다.

“신앙심도 없는 것들!”

신앙심이 투철하지 못하다는 건 1127년의 중앙대륙에서는 타인을 비난하기에 딱 좋은 재료였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왕 역시 딱히 신실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사돈이 될 수도 있는 상대를 험담했다.

델피아노사 경은 자기 주군만큼 양심이 마취된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성심성의껏 맞장구쳤다.

“원래 이교도와 어울려 살면 이교도와 비슷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들어 보십시오, 폐하.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제 성전은 끝났고 그쪽에 정기적인 무역로가 있는 건 아니라서 특수는 끝입니다. 한 철 장사였던 건 맞아요.”

델피아노사 경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부분이 핵심이었다.

“다만 시나데노스 후작가는, 정확하게 말하면 후작가의 고명딸인 율리아 헬레나 공녀에게는, 도데사 왕국의 승계권이 있습니다.”

레오 3세는 느닷없이 손뼉을 쳤다. 갑자기 예비 사돈이 마음에 들게 되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뿌듯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그래. 기억났어, 기억났어. 도데사 왕궁 몰살사건 말이지!”

성전이 끝나고 중앙대륙의 주력 병력이 예사크 왕국에서 빠져나가자마자 헤자즈 반도는 혼돈에 빠졌다.

무어 제국의 조력을 받은 현지 이교도는 산발적으로 예삽교 측 국가들을 공격했다.

예사크에서 밀려난 이교도는 어딘가에 새로 자리를 잡으려 들었으므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권력 역학상 당연한 결과였다고 해서 그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마저 당연해지는 것은 아니다.

델피아노사 경은 그 일을 어떻게 입에 올려야 할지 몰라서 말끝을 흐렸다.

“예⋯⋯. 그 사건이요.”

도데사 왕국은 이교도의 공격을 당해 궁전이 함락당했고, 끝까지 항전하던 왕을 비롯해 성을 탈출하려던 왕비, 소년 왕세자, 그리고 나머지 어린 왕자와 공주들까지 전부 다 이교도의 손에 도륙당하고 말았다.

“⋯⋯포로조차 잡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델피아노사 경은 그 참상을 상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레오 3세는 발랄하게 답했다.

“우리의 신부 율리아 헬레나 후작 영애에게는 아주 잘된 일이었겠군.”

델피아노사 경은 간신히 표정 관리에 성공했다. 도데사 궁전 함락 건은 중앙대륙 전체가 술렁인 비극이었다.

왕비와 왕의 자식들을 데리고 도망치던 왕의 남동생마저 살해당해 왕국은 최선순위 왕위계승권자부터 8순위 왕위계승권자까지를 한 번에 잃었다.

여자와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몰살당한 대사건이었다.

총사령관을 겸직하던 국왕의 사망으로 수도를 포함한 국토 대부분이 이교도의 지배에 들어간 건 덤이다.

중앙대륙의 지배층은 이 끔찍한 사건에 경악했다. 이교도의 발호를 막지 못하면 언젠간 자기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사태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 3세는 지금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타국의 왕족에 대한 공감 능력마저도 상실한 모양이었다.

“거, 인척관계가 어떻게 되지? 몰살당했다니까 직계 공주는 아닌 것 같고.”

“율리아 헬레나 공녀께서는 도데사 왕국 공주의 따님 되십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공주는 선선대 왕의 딸, 죽은 선왕의 누나로, 왕위계승순위 10위였으나⋯⋯.”

델피아노사 경도 헷갈리는 모앙이었다. 그는 보고하다 말고 손가락을 접으며 잠시 숫자를 헤아리다가 멈췄다.

“아,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율리아 헬레나 공녀의 어머니이신 도데사 왕국의 공주 본인도 작년에 병으로 돌아가셨으니까요. 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율리아 헬레나 후작 영애, 아니 공녀가 도데사 왕국의 1순위 왕위계승자입니다.”

레오 3세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데사 왕국! 갈리코 왕국처럼 국경을 인접한 나라도 아니고, 큰 나라도 아니다.

그러니까, 먹으면 단번에 중앙대륙 최강자로 떠오를만한 그런 먹잇감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국왕의 로망은 국경 확장인 법이다. 그도 역사서에 ‘에트루스칸 왕국을 위대하게 만든 대왕’으로 남고 싶었다.

도데사 왕국은 바다 건너 있었고, 그 왕궁과 국토는 이교도로 득시글댔으며, 그 왕국을 진짜로 집어삼키려면 배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이겨야 했지만 레오 3세는 이미 그 땅에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기가 꽂혀 나부끼는 상상을 하며 흐뭇해했다.

델피아노사 경이 레오 3세의 즐거운 상상에 장작을 지폈다.

“만치케 후국 측에서 말하길, 고명딸인 율리아 헬레나 공녀를 에트루스칸 왕국에 보낼 의향이 있답니다.”

“허허허,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늙은 왕은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연신 손뼉을 쳤다. 그의 불그스름한 눈매에 일말의 기대가 엿보였다.

델피아노사 경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는 레오 3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런데 조건이 있답니다.”

“무슨? 뭐든지 들어주지, 왕국이 생긴다잖아!”

“그것이⋯⋯. 왕비로는 안 보내고 왕자비로만 보내겠답니다.”

“끙.”

레오 3세는 신음성을 냈다. 좋다 말았네.

“썩을 놈의 버러지 같은 쥐새끼들 같으니. 고작 후작 주제에 무슨 놈의 욕심이 그렇게 많아서⋯⋯.”

이 망측한 상상력으로 가득 찬 국왕은 사실 이번에 아들보다는 본인의 독신 상태를 먼저 해소하려 들었다.

델피아노사 경에게 혼담을 뿌릴 때 강대국 상대로는 왕위계승자인 알폰소 왕자를, 좀 급이 떨어지는 나라에는 돌아온 독신인 본인을 남편감으로 내밀라고 명했던 것이다.

국왕이 바라던 최상의 결과를 가지고 오지 못한 델피아노사 경은 황급히 변명했다.

“시나데노스 후작가가 지금 갑자기 벼락부자가 돼서 콧대가 높습니다. 주제를 모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현재 중앙대륙에 마땅한 신붓감이 품귀인 것은 사실이라⋯⋯.”

만치케 후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레오 3세보다는 알폰소 왕자였다.

그들은 군대가 없으면 점령할 수 없는 클레임만 들고 있는데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그 군대를 부리는 사람은 레오 3세가 아닌 알폰소 왕자다. 꼭 나이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레오 3세는 이것을 개인적인 공격 비슷하게 받아들였다. 델피아노사 경은 푸들푸들 떨고 있는 국왕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진행할까요?”

레오 3세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다른 제안은 없어?”

“⋯⋯이게, 우리한테 딱히 도움이 안 되는 혼처들만 내밉니다.”

공주는 공주인데 사생아 논쟁이 붙어서 도저히 그녀의 계승권으로 나라를 내놓으라고 할 수 없는 네 살 아기 공주, 적통 딸이자 혼인 적령기 여성이지만 작은 대공국의 확고한 후계자인 오빠가 아들을 일곱 낳은 바람에 궁전에 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는 한 대공위 승계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대공녀, 강대국 왕족이기는 하나 왕좌 접근권으로 따지자면 자기 앞에 서른두 명쯤 대기 줄이 있고 외모가 추하다는 소문 탓에 혼기를 훌쩍 놓치고도 미혼인 왕의 사촌, 뭐 이런 혼담들만 남아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나라를 통째로 들고 오는 여자는 극히 드문 거.”

“끄응⋯⋯.”

“지금 율리아 헬레나 공녀가 열여섯 살 나이에 시장에 남아 있는 것도 도데사 왕궁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도데사 왕국을 먹으려면 이교도를 무찔러야 해서, 딱 이 두 가지 이유입니다. 아니었으면 이 아가씨도 세 살에 이미 약혼 끝났어요.”

“떼잉⋯⋯.”

레오 3세는 불만스럽게 신음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진행 시켜.”

“저기, 국왕 폐하⋯⋯.”

델피아노사 경이 한 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나데노스 후작가에서⋯⋯. 계약서에 적어 달라고 하는데요⋯⋯.”

레오 3세는 거칠게 물었다.

“뭘?!”

“결혼 상대가⋯⋯. 왕자님 쪽인 걸⋯⋯.”

레오 3세는 정말로 기분이 팍 상해버리고 말았다.

“아, 적어 줘. 적어 줘! 마음대로 하라 그래, 진짜.”

그는 내가 늙은 게 죄냐, 합법적으로 사별했구먼 후작가 주제에 도대체 뭘 그리 따지는 거냐, 중얼중얼하기 시작했다.

델피아노사 경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이 구시렁거림이 길어지면 레오 3세는 기필코 ‘아, 됐어!’라며 판을 엎어버린다.

변덕스러운 국왕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뛰쳐나가야 했다.

“그럼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최대한 속도를 높인 뒷걸음질로 국왕의 집무실에서 신속하게 물러난 델피아노사 경은 실무진을 불렀다.

“얼른, 그 계약서 가지고 오게. 지금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옥새 찍어서 내보내야 돼.”

“아, 저기, 그게⋯⋯.”

실무진은 합당한 포인트를 지적했다.

“그⋯⋯. 시나데노스 후작가는 혼인 상대를 ‘알폰소 왕자’로 특징지어달라고 했었는데요. 왕국 문서에 그렇게 쓰려면⋯⋯. 왕자님 본인의 인장도 찍어서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델피아노사 경은 인상을 찡그렸다. 왕자궁의 인허가까지 받고 났다가는 도저히 레오 3세의 수프 끓는듯한 변덕에 맞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건 어때. ‘혼인 상대는 젊은이로 한다.’”

“⋯⋯그렇게 쓰면 아무 젊은이나 되게요?”

“아 자네는 누구 편이야!”

참을성 많은 델피아노사 경도 결국 콱 짜증을 냈다. 시간이 없었다.

“일개 후국(侯國)에 우리가 이만큼 맞춰 주는 거면 많이 맞춰 주는 거지! 뭘 계약서 문언 하나하나 다 따지려 들어! 대충 써 대충!”

지금은 도저히 알폰소 왕자의 도장을 받을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서류에서 그의 이름을 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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