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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18화 (721/733)

<제418화> 꼭두각시일 줄 알았지

갈리코 왕국의 라리에사 대공녀와 혼담이 오갈 때, 갈리코 왕국은 대표단까지 파견해 혼인동맹 계약서에 들어갈 단어 하나, 수행원 하나에까지 온갖 참견을 했다.

그러나 만치케 후국은 그렇게 굴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시나데노스 후작이 군주와 통혼할 자격을 갖춘 지배자인 건 맞지만 그가 다스리는 땅은 어디까지나 중앙대륙 본토에도 끼지 못하는 변방의 조그만 후작령이었다.

척박하고, 낙후되었고, 이교도가 득시글대는 땅. 어느 모로 보나 중앙대륙 중남부에 자리 잡고 역사와 전통을 쌓아 올린 에트루스칸 왕국과 사돈을 맺을 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이 나라가 지금 상대방으로 거론이나마 되는 이유는 지난 성전으로 인해 라트갈린 지방에 대한 관심도가 사상 최고조이고, 죽은 후작부인의 친정이 횡액을 당한 바람에 원래 그들의 것이 아닌 횡재수가 생겼으며, 그로 인해 동군연합을 이루겠다는 욕심에 눈이 뒤집힌 레오 3세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게 다였다.

델피아노사 경은 이 모든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세 배로 났다. 그는 실무자에게 쏘아붙였다.

“그럼 ‘왕자비(principessa)로 맞는다’라고 써! 그것도 꼬우면 시집오지 말라고 해!”

여기서 ‘왕자비(principessa)’란 왕자의 아내에게만 붙는 명칭이 아니라, 왕위계승자의 배우자 일반과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가의 여자 혈족에게 붙는 명칭이었다.

엄정히 따지자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문언이다.

실무자는 ‘그럼 문언대로라면 율리아 헬레나 공녀를 입양해서 공주(principessa) 삼아도 되게요?’라고 묻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 올랐으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질문을 했다간 분명히 뒤통수나 맞는다. 지금은 시간이 없었고, 만치케 후국에는 협상력이 없었다.

‘내가 만치케 후국에서 돈 받은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을 위해 상사에게 혼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실무자는 사전에 준비된 계약서 초안을 가지러 허겁지겁 뛰어갔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실무자의 열정은 이렇게 사그라들었다.

그가 가지러 간 계약서는 율리아 헬레나 공녀를 ‘왕자비’로 맞는다는 가필이 추가되어 오늘 중에 도장이 찍혀 만치케 후국으로 발송될 것이다.

그리고 만치케 후국은 이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이었다.

* * *

한때 나름 강력한 왕자비 후보군이기도 했고 전생에서는 최종 승리자였던 이사벨라 데 마레, 아니, 콘타리니는 이번 생에선 전생의 영광 근처에도 못 간 채 시시껄렁하게 친구를 괴롭히고 있었다.

“레티―. 나 돈 좀 빌려줘.”

“⋯⋯.”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는 굳은 표정이 더 일그러지는 걸 이사벨라에게 보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이사벨라는 건성으로 레티시아에게 매달렸다.

“아이, 레티―.”

레티시아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돈이 없어.”

정말로 가용할 자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말은 입 밖으로 가장 꺼내기 힘든 말이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애교와 무신경함이 섞인 놀라운 조합으로 레티시아의 팔을 잡고 치댔다.

“조금이면 돼, 응?”

이사벨라는 바로 며칠 전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와 대판 싸웠다. 그리고 오늘 여기, 레오나티 자작가에 돈을 빌리러 와 있었다.

화해한 건 아니었다. 그냥 레티시아는 이사벨라가 뭐든 요구하면 해 주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나타난 것이다.

“오래 쓸 돈은 아니야.”

이사벨라는 레티시아가 쉽게 넘어오지 않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무섭게 겁박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녀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뾰로통 입술을 내밀었다. 회유할 때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가장 잘 먹히는 표정이었다.

“집사 니콜로의 부인을 만나고 나면 집에 다시 아빠 뵈러 갈 수 있을 테니까, 거기서 용돈 타서 메꿔줄게. 응?”

레티시아의 귀가 쫑긋 섰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을 끈 건 빠른 변제의 약속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이사벨라는 지나치게 자주 돈 갚을 날짜를 어겼다.

“집사 니콜로의 부인⋯⋯?”

“그래, 집사 니콜로의 부인!”

이건 이사벨라의 마음에도 드는 화제였다.

“안드레아가 주선해 준 거야.”

새 남자 자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레티시아에게 디파스칼 백작의 호의에 대해 으스대기 시작했다.

아직 돈도 빌리지 못했는데 대단한 배짱이었다.

사실 배짱이라기보다는, 레티시아는 자기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던 자기가 원하는 걸 내놓을 거라는 자신감이었다.

“오빠는 너무 스윗한 거 같아. 착하고, 내가 필요한 걸 다 그때그때 배려해주고⋯⋯.”

레티시아는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부인이 있잖아.”

이에 이사벨라는 대번에 기분이 상해 쏘아붙였다.

“그래서 뭐? 내가 뭐 바람이라도 피우니?”

키스까진 했지만 이사벨라의 세계에선 ‘그저 호의’였다.

“내가 이 남자랑 잤어?”

게다가 레티시아는 이사벨라가 디파스칼 백작과 키스한 사실을 모른다. 굳이 알릴 생각도 없었다. 이사벨라는 레티시아를 몰아붙였다.

“너 말을 왜 그따위로 해?”

좋게 말할 때 곧장 돈주머니를 내놓지 않는 걸 보니, 이젠 슬슬 다그칠 때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기세에 눌린 레티시아는 바로 사과했다.

“미, 미안해⋯⋯.”

“미안하지? 미안해야 마땅하지, 나 원 참!”

얼굴에 홍조가 돌 정도로 화가 난 이사벨라는 다시 ‘안드레아 오빠’가 주선해 준 좋은 기회에 대해 한참을 떠들고야 분을 삭였다.

이사벨라도 사실 요새 처지가 곤궁했다. 디파스칼 백작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은 클레멘테의 집에는 없었다.

오타비오한테 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고. 그녀는 레티시아를 붙들고 실컷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반면에 그 이야기를 통으로 들어준 레티시아는 그 오랜 ‘오빠’ 얘기 중에 친오빠 이폴리토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나온 것에 감탄했다.

“어쨌든, 그래서 오늘 오후에 집사 니콜로의 아내가 우리 집에 오기로 했어.”

엄밀히 따지자면 클레멘테의 집이었지만, 이미 한번 경을 친 레티시아는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소득도 없는데 이사벨라를 긁을 생각이 없었다.

너무 두렵기도 했고, 좀 전에 이사벨라가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으니 이제 슬슬 조심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궁금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와서 뭘 하는 거야?”

“뭘 하긴! 집안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 주고!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좀 듣고!”

“드디어 집안사람과 연락이 됐구나. 축하해.”

레티시아의 이 축하는 진심이었지만 아버지와의 사이가 나쁜 게 현재 약점인 이사벨라의 귀에는 이 또한 고깝게 들렸다.

“빈정거리지 마라?”

“내, 내가 언제 빈정거렸다고.”

“아, 자꾸 짜증 나게 할래?”

“미, 미안해.”

이사벨라는 레티시아를 노려보았다. 두 번째 사과이니 이제는 이 말이 나올 때도 됐다.

“미안하면 돈 빌려줘.”

레티시아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선심 쓰듯 말했다.

“25 두카토. 큰돈 아니야.”

레티시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게 객관적으로 큰돈이 아니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그만큼은 좀 어렵고⋯⋯.”

“25! 한 푼도 더 못 깎아.”

이사벨라는 레티시아에게서 결국 원하던 금액을 우려냈다. 레티시아는 아끼고 아끼던 쌈짓돈을 이사벨라에게 내주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집사 니콜로의 아내는 왜 오는 거래?”

“글쎄?”

이사벨라는 짜증스레 답했다. 매우 부주의한 일이었다.

“두 시간 뒤에 내 방에서 만나면 알 수 있겠지?”

두 시간 뒤. 바톨리니 백작가의 이사벨라의 방. 레티시아는 속으로 되뇌였다.

* * *

이사벨라가 바톨리니 저택으로 돌아간 뒤, 레티시아는 자신의 방에 조심스레 올라갔다.

“저기⋯⋯.”

“쉬잇.”

어둠 속에서 키가 크지만 어딘가 여물지 못한 인영이 쓱 나타나 커다란 손으로 레티시아의 입을 막았다. 레티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그건 로맨틱한 손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거칠게 으르렁댔다.

“조용히 해. 남들이 듣잖아.”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는 이폴리토 데 마레, 아니, 이제는 뿌리를 모르는 이폴리토였다.

“아아, 알았어요.”

대답하는 레티시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연극적이었고, 동시에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레티시아는 이폴리토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는 이폴리토에게 귓속말할 핑계가 생겨 진심으로 기뻤다.

“오늘 오후에 이사벨라가 집사 니콜로의 아내와 만난대요.”

이폴리토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물었다.

“무슨 일로?”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집안 상황을 알아보러 부르는 거고, 집에서 이것저것 들고 오라고 했다고⋯⋯. 오라버니도 이사벨라가 그 하인 만날 때 같이 껴서 만나면 좋지 않겠어요?”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폴리토는 신음성을 냈다.

그가 레티시아의 집으로 숨어들게 된 데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다. 그중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항구의 마르코였다.

마르코가 이폴리토가 넘긴 파왘의 배합식이 완벽하지 않다고 노발대발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 "글쎄, 손맛인가?"

이폴리토는 그 말을 전해준 놈에게 저렇게 대충 둘러댔지만 찔리는 게 없지는 않았다.

부두의 창고까지 넘기게 된 거에 뒤늦게 약이 올라 배합식의 인수인계를 개판으로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냥 개판도 아니고 핵심적인 과정을 하나 뺐다. 지금 시중에 유통 중인 파왘 연초는 재료비는 재료비대로 들어간 주제에 이전 같은 중독성이 없었다.

어쨌건 그래서 지금 마르코가 제대로 분노한 상태에서 길거리를 쏘다닐 수는 없었다.

원래 어울리던 왈패들에게 돌아갈 수는 없고 그들의 손이 안 닿을 고상한 곳에 있어야 했다. 예컨대⋯⋯ 귀족 영애의 규방 같은.

“가만히 있어.”

그는 레티시아를 어르며 그녀를 자기 곁으로 잡아당겼다. 레티시아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폴리토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마룻바닥 말고 카펫이 깔린 곳만 밟고 앞으로 가고 싶어서 카펫 위에 있는 레티시아를 잡아당긴 거였다.

‘이 여자 왜 이래.’

하지만 일단 그녀가 물주다. 이폴리토는 굳이 자기의 감상을 밝히려 들지는 않았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기다려.”

“어디 가세요?”

레티시아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사벨라네 집으로? 그럴 거면 제가 바로 이사벨라한테 하인을 보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폴리토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멍청한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사벨라의 집도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다.

이사벨라의 집—정확하게는 바톨리니 백작가—은 그가 한창 파왘 유통을 할 때 자주 드나들었다.

마르코의 똘마니들에게는 제집 앞마당 같을 것이다. 그 집을 대놓고 방문할 수는 없었다.

“조용히 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레티시아가 간절하게 물었다.

“다시 돌아오실 거지요?”

이폴리토는 저기에 ‘낭군님’ 같은 소리가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등골에 오한을 느꼈다.

그 빨간 머리 하녀가 이거랑 비슷하게 굴었던 것 같은데.

자기는 왜 안 예쁜 여자만 꼬이는지 참 갑갑했다. 아니, 안 예쁘더라도 타란토의 비앙카쯤이 이렇게 매달려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그에게 붙는 건 급이 한참 떨어지는 여자밖에 없었다.

이폴리토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지만, 레티시아한테는 충실하게 숙소 값을 지불했다.

“오빠 출세해서 너 데리러 갈 테니까 단단히 기다려라.”

그가 제일 잘하는 짓, 허세를 부려 본 것이다. 레티시아의 얼굴이 다시 발개졌다. 이폴리토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먹혀?’

이폴리토는 자기가 부리는 수가 먹혀 신이 난 나머지 대충 입에 와닿는 대로 달콤한 약속을 남발했다.

“데 마레 가문을 다시 손에 넣을 수만 있으면 네가 데 마레 백작부인이야.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가지고 있는 건 다 네 것이 된다고!”

레티시아의 얼굴이 다시금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거한 위세가 다 자기 것이 될 것이라는 부분보다는 다른 부분에 감동했다.

‘백작부인! 이폴리토 오라버니는 나를 자기 부인감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이폴리토의 말은 지킬 생각이 전혀 없어서 마구 뿌릴 수 있는 공약(空約)이었다.

이폴리토는 레티시아가 끈적해지는 순간 언제든지 달아날 준비가 된 남자였다.

“나갔다 올게.”

지금도, 분위기가 너무 달아오르자 그는 바로 발을 뺐다. 그러나 잘난 척은 잃을 수 없었다.

이폴리토는 짐짓 멋있게 1층인 레티시아의 방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 풀썩!

그는 바닥이 아니라 관목에 잘못 착지했다. 조그맣고 뾰족한 가지들이 종아리, 허벅지, 사타구니를 가리지 않고 난타했다.

‘아이쿠!’

그러나 고개를 들어 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레티시아가 전설 속 기사도 소설의 주인공 보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폴리토는 따가워 미치겠는 다리로 절뚝이는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멋있게 정원을 뚜벅뚜벅 걸었다.

‘아, 남자의 길이란!’

* * *

루도비코 법황이 탄 마차가 아주 느리게 산 카를로 시내를 가로질렀다. 법황의 노구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아주 조심히 말을 몬 덕이었다.

“있잖소, 데 마레 백작.”

루도비코 법황은 아리아드네에게 말을 건넸다. 법황이 시찰을 요청한 랑부예 구휼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법황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생각일까 헤아려 보았다.

‘랑부예 구휼원에 후원?’

어딘가 깨끗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그때, 법황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하하하, 백작은 그 나이대 아가씨 같지 않아.아무리 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부인처럼 원숙한걸.”

그는 가볍게 덧붙였다.

“아니면 인생 이 회차라거나.”

그 말에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올라가 뒷골까지 쭉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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