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화> 새 친구
‘회귀가 티가 나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리아드네는 본능적으로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복기했다.
아무래도 살만 무녀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만나는 부분이 가장 걸렸다.
- “잡신은 큰 신 앞에서 힘을 못 써. 큰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떼로 도시에 몰려오니 네 팔에 거는 주술이 효험이 떨어질까 걱정이다.”
- “자기가 부리는 신을 잡신이라고 불러도 돼요?”
할머니는 벌컥 화를 냈다.
- “객관적 진실에 화를 내는 쪼잔한 놈들은 신의 자격이 없어!”
아리아드네는 깔깔댔지만 할머니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살만 무녀 할머니는 평범한 사람과는 조금 다른 가치 체계하에서 살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신에게 얼마나 가까운가’였는데, 살만 무녀 할머니에 따르자면 예삽교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성직자인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딱히 신기가 없었다.
먼발치에서 추기경을 살피고 그 결론을 내린 살만 무녀는 그 뒤로 추기경을 평범한 아저씨 취급했다.
아리아드네도 거기에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다른 의미에서 이 세계의 규칙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회의 규칙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았다.
자기 아버지라고 반드시 타인에게 존경받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세계관이 어디 있나. 존경은 얻어내는 것이고, 데 마레 추기경은 살만 무녀 할머니에게 존경을 획득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무녀 할머니의 태도에 그녀는 별 불만이 없었다.
무녀 할머니가 잘못 봤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의 생각에, 높은 성직자라고 꼭 천신께 가까운 건 아니었다.
신실한 평신도가 들으면 뒤로 넘어갈 말이었으나 어떤 집단의 본질에 가까운 일을 잘하는 것과 관리에 재능이 있는 건 아주 다르다.
데 마레 추기경은 애초에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니 신앙심이 깊을 것을 요구하는 실무자의 요건도 건너뛰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내내 아주 유능한 관리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직자 중에선 좀 특이한 사람이었고 아리아드네도 어쩔 수 없이 예삽교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할 뿐이지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흐름 자체는 믿었다. 그녀 본인부터가 과거로 되돌아오지 않았는가.
천신의 대리자, 법황이라면 사바세계 그 너머를 꿰뚫어 보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잔뜩 긴장한 아리아드네는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선선히 웃었다.
“너무하십니다, 법황 성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인다는 말씀이신가요.”
법황은 두 손을 들어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먹혔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그러나 그는 아리아드네를 쉬이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외모가 늙었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법황은 말을 이었다. 하필이면 표정이 짓궂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눈빛이 젊은이의 그것이 아니라는 소리지.”
루도비코 법황의 눈빛이 아리아드네를 헤집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지만 이 늙은 구렁이의 속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뭘 알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냥 해 보는 말일까?
아리아드네는 설사 법황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녀는 웃음으로 뭉개며 싱겁게 답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봅니다.”
데 마레 추기경의 둘째 딸이 도대체 무슨 고생을?
법황이 고민하는 틈에 아리아드네는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법황 성하께서도 노인의 눈빛은 아니십니다.”
“껄껄껄!”
법황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도 먹혔다.
루도비코는 이 먹이를 덥석 물었다. 마음에 드는 주제였다. 그는 이 새로운 평가를 되씹어 보았다.
작년쯤에, 그러니까 자기가 곧 죽는다는 걸 알기 전에 들었으면 참으로 흡족했을 말이었다.
“이상하게도 말이지.”
노년의 법황은 입을 열었다.
“육신이 약해져 가는 와중에도 내 정신은 날로 더 명징해져만 간다오.”
법황이 시원스레 다음 주제로 옮겨가는 걸 보고 아리아드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나더러 노안이라고 한 거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자기가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루도비코 법황은 이걸 슬퍼하는 태도로 잘못 받아들였다.
“아냐, 아냐. 난 이런 숙연한 반응 원하지 않아.”
그는 손사래 쳤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과에 대해선 슬퍼하는 것조차 낭비라오.”
정해진 숙명에 대해 애통해하느라 시간을 소모하는 건 최소한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루도비코에게 시간은 금보다 소중했기 때문이다.
“내가 갈 날까지는 며칠 남지 않았는데,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거워요.”
이걸 죽기 싫다는 소리로 알아들은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뒤늦게 엄숙해졌다. 법황은 재차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말래도!”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난 인생의 막바지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이 몹시 마음에 들어요.”
그는 ‘친구’라는 단어를 쓸까 잠시 망설였다. 죽는 마당에 못 할 짓이 무엇이랴.
“새 친구들.”
‘친구’라는 단어에 아리아드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자기가 법황에게 정보를 드러내기 싫어 꽁꽁 싸맨 게 미안해졌다.
“삶이 지금처럼 생생했던 적이 없어. 매일 웃음이 터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있지.”
이제야 법황과의 대화에 진심으로 응하게 된 아리아드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죽음은, 두렵고 무서워요. 그분의 품 안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다시 윤회의 큰 흐름 속으로 떠나게 되니까.”
아리아드네는 물었다.
“윤회의 사이클을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실 수도 있지요.”
예삽교 교리에서는 성인(聖人)이 되면 더는 윤회하지 않고 기억과 형상을 유지한 채 천신의 가르침을 설파한다고 했다.
살만 무녀 할머니는 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향에서 했다. ‘눈뜬 자들’이 되면 윤회라는 억천만겁의 업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고.
평소의 루도비코라면 미지근한 웃음을 지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파안대소했다.
“나 같은 인간이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면 그거야말로 예삽교의 가르침이 잘못됐다는 증명이지!”
아리아드네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난 성인 못 돼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난 내가 관리자였다고 생각해. 참 신앙인들이 천신님에 대한 믿음이란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그 밭과 주변 수로 정비하는 일을 한 사람인 거지.”
아리아드네는 이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은 본질적으로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회귀 이야기는 그냥 해 본 말이었을 것이다. 눈치는 더럽게 빠르고, 신의 세계는 믿지 않고.
혹시나 영적인 힘이 있을까 법황이 데 마레 대저택에 머무는 동안 살만 무녀 할머니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게 후회되었다.
조만간 무녀 할머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빠졌던 아리아드네는 법황의 말에 퍼뜩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살았지만 그게 꼭 영적이거나 고귀한 삶이었다고 생각은 안 한다오. 물론 비밀이야! 법황이 이런 소리 떠들고 다니면 안 되니까.”
그는 눈을 찡긋, 해 보였다.
“그대 아버지에게도 잘 말해둬요. 법황은 추태를 부리고 다니면 안 돼. 그게 천신님과 예사크의 곤을 믿는 신도님들에 대한 예의야.”
“꼭 전달하겠습니다.”
“관리자로서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어요. 나는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
루도비코 데 주스티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를 따랐던 많은 휘하 성직자와 제자들. 어린 그를 애지중지 길러 주었던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던 어린 시절. ⋯⋯그리고 아르튀르.
그를 죽이려 들었던, 그가 가장 사랑했던 단 하나의 후계자.
“지나치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
그가 읊조리는 와중에 마차가 수면 위를 미끄러지는 물방울처럼 부드럽게 유영하다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마부가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으나 법황은 마차가 멈추자 자기가 어디에 당도했는지 바로 알아챘다.
“랑부예 구휼원이군.”
“예.”
루도비코는 한쪽 팔을 들었고, 아리아드네는 법황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랑부예 구휼원 사람들은 낯선 마차를 보고 혼란스러워하다 아리아드네를 보고 달려왔다가 법황을 발견했다.
“서, 성하?!”
당황하며 의전을 준비하려 우왕좌왕하는 관계자에게 법황은 간단하게 손을 내저어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
아리아드네 역시 구휼원 관리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뜻을 밝혔다.
“내가 직접 보여드리면 됩니다.”
죽음이 임박한 법황과 젊으나 젊지 않은 백작은 아주 천천히 랑부예 구휼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삶이 샘솟는 공간이었다.
“⋯⋯이쪽은 ‘스쿠올라 디 그레타’, 학교입니다. 젊은이들의 기초교육과 취업 알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법황은 미소를 지었다.
“중력을 거스르려 하는구료.”
“예?”
그러나 늙은 법황은 말을 아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소한 인간의 노력으로 대륙 단위의 인간이 다 같이 잘살게 되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믿음을 버렸다.
산 카를로의 젊은이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고 상계를 휩쓸게 된다면 타란토의 젊은이들은 직업을 잃을 거고, 에트루스칸 왕국의 인력이 다 같이 우수해지면 갈리코 왕국의 젊은이들은 비교경쟁력을 잃을 것이다.
그뿐인가. 중앙대륙이 다 함께 유능해지면 무어 제국의 작은 마을은 수탈을 당할 거다. 결국엔 아래 돌 빼어서 윗돌 괴기다.
눈앞의 젊은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을 맞고 돌 세례를 받아도 아랑곳없이, 제아무리 작은 진보라도 사소하다 여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부터 뚜벅뚜벅 발자국을 내디딘다.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과욕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은 그저 환하게 웃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지 반년이 훌쩍 넘었다. 성직자보다는 장군 같던 체구의 그도 뼈와 가죽만 남았다.
가지런한 이가 앙상한 얼굴과 이상한 병치를 그렸다. 루도비코 데 주스티니는 태어나서 최초로 성직자처럼 보였다.
그는 문득 말했다.
“고마워요.”
“예?”
“젊게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요.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그에게 주어졌던 시간을 너무 안이하게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가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을 계획했고 성공적으로 완수시켰다.
예사크를 함락시킨 십자군은 최초였다. 그는 예삽교의 성지를 수복하면 신도들의 마음을 위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흘려보냈던 작은 시간의 조각들은 분명히 있었다. 조금 더 힘을 낼 수도 있었다. 아까웠다. 그러나 이 또한 다 지나간 일이었다.
“오후에는 추기경이 온다고 했지요?”
“예. 공의회 관련해서 뒤처리가 조금 남아, 그레도 왕국 쪽 주교들과 미팅을 가지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좋아요.”
법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할 일이 있었다.
“오후에는 갈리코의 필리프 4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이야기를 한번 해 봅시다. 그놈은 필시 피사리노 항구를 순순히 넘기려 들진 않을 겁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아주 잘 써야 했다.
루도비코 법황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데 마레 추기경과 그 딸, 그러니까 그의 새 친구들에게 모든 것을 다
넘기고 갈 작정이었다.
* * *
데 마레 추기경이 랑부예 구휼원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루도비코 법황과 만날 무렵, 집사 니콜로의 아내인 자노타는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 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니콜로는 절대로 외부인을 만나지 말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이사벨라 큰아가씨도 포함이라고 했지만 자노타는 남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망할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