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0화> 더러운 빨랫감은 밝혀지기 마련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끼리끼리 모인다.
데 마레 추기경이 랑부예 구휼원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루도비코 법황과 만날 무렵, 집사 니콜로의 아내인 루이자는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 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니콜로는 절대로 외부인을 만나지 말라고, 그리고 거기에는 이사벨라 큰아가씨도 포함이라고 했지만 루이자는 남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망할 인간.’
루이자는 루크레치아의 심복이자 전 하녀장이던 지아다의 친여동생이었다.
지아다와 루이자는 타란토 출신으로, 시골 마을의 지인 소개로 데 마레 가문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리 친정이 아니었으면 데 마레 가문에서 절대로 집사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했을 거면서.’
자매는 여주인과 같은 동네 출신인데다 이 집에서 아주 초장기부터 있었다는 이점을 십분 살려 데 마레 가문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니콜로가 데 마레 추기경 눈에 처음 든 것도 루이자와 결혼해 내부자로서의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인 지아다는 루크레치아 마님의 일을 하다가 미스테리어스하게 실종되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추기경이 밖에서 낳아 온 천덕꾸러기, 아리아드네 아가씨였다.
추궁할 법도 하건만 추기경은 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일 자체를 묻어버렸다.
‘언니가 없었으면 추기경 근처에 얼씬도 못 했을 주제에, 감히 어떻게 추기경한테 찰싹 붙어서 언니의 죽음을 묻어버릴 수가 있어!’
루이자는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명백백히 밝히고 싶었다.
하녀장이 어디로 갔는지 둘째 아가씨한테 끝까지 따져봐야 한다는 루이자에게 니콜로는 자기 입장을 확실하게 밝혔다.
- “둘째 아가씨한테 그거 관련해서 한마디 입 떼기라도 해봐, 가만 안 둬! 이게 나만의 입장인 줄 알아? 그때 뒤집어지면 나도 당신 못 도와줘.”
집사 부부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만 사랑이 사그라진 이후로도 나름 괜찮은 비즈니스 파트너로 살았다.
니콜로는 역량을 출세에 부었고 루이자는 친정 식구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하녀장 지아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빠그라졌다.
루이자가 니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루크레치아 마님을 등에 업은 호가호위였다.
그런데 그 위세의 본체인 루크레치아 마님이 흑마술을 부렸다며 집에서 쫓겨나 버렸다.
니콜로는 더는 루이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루이자에게는 돈도, 뒷배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에겐 도저히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가용할 만한 자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언니를 해친 흉수는 찾지 못했고 그 뒤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인제 와서 지아다의 죽음은 그냥 지나간 일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최소한 그녀의 남편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 “처형? 옛날 일을 뭣 하러 또 꺼내! 아니, 게다가. 그만하면 살 만큼 살았지. 누가 들으면 갓 성인식 치른 생때같은 젊은 애가 죽은 줄 알겠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절대로 언니의 죽음을 그렇게 흘려보내진 않겠어!’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며칠 전 손수건 한 장을 보았다. 남편의 손수건이었다. 어린 하녀 아이의 소지품 속에 있었다.
50대 아저씨와 10대 여자아이이니 손수건의 본래 용처대로 쓰라고 건전하게 건넸을 수도 있다.
하녀에게 도벽이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루이자는 해명 따위 들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분개했다.
손수건 한 장은 그저 낙타의 등에 마지막으로 얹힌 지푸라기 한 올이었다.
그녀는 니콜로를 해칠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었다.
분노로 씨근대며 걷던 루이자 앞에, 길쭉한 남자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게 누구야.”
길고, 껄렁하고, 꼬였다.
“루이자 아줌마 아니야?”
“이, 이폴리토 도련님?”
루이자는 유령이라도 본 듯이 말을 더듬었다.
루이자는 니콜로의 부인이니만큼 이폴리토가 추기경의 씨가 아니며, 루크레치아가 혼전에 제멋대로 배어온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련님으로 모셨던 세월이 워낙에 길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게 익숙한 호칭으로 이폴리토를 불렀다. 그리고 언어가 관계를 규정했다.
이폴리토는 호의적인 루이자 아주머니의 태도를 놓치지 않고 씨익 웃었다.
“아줌마. 나 도움이 필요해.”
“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려던 루이자의 말을 이폴리토가 끊었다.
“난 저 씨X 데 마레들을 다 불태울 거야.”
루이자는 흠칫, 했다. 그의 악의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데 마레가 몰락하면 집사 니콜로도 같이 망하는 것 아닌가?
이폴리토가 이에 쐐기를 박았다.
“데 마레만 불태울 줄 알아? 거기에 매달려서 호가호위한 연놈들, 날 무시한 새X들, 다 같이 태워버릴 거야.”
이폴리토는 지금 대화 상대방의 직장과 남편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렀다. 멍청한 짓이었다.
그러나 될 일은 된다. 계산 없이 내지른 바보 같은 소리가 가뜩이나 복수심으로 몸부림치던 루이자 아주머니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간단한 거야.”
물고기를 잡는 미끼 같은 단어들이 연달아 던져졌다.
“다 끝나고 나면 아줌마는 내가 단단히 챙겨줄게.”
조악한 미끼였지만 물고기는 이미 물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 * *
이사벨라는 바톨리니 백작가에서 자기가 쓰는 응접실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왜 아직도 안 와?”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지금 사람 무시하는 거야 뭐야? 싫으면 안 오겠다고 해야지 이게 말이나 돼?!”
“⋯⋯.”
이사벨라의 짜증을 편면적으로 받아내고 있는 건 아고스토였다. 요즈음 이사벨라의 곁에는 아고스토밖에 없었다.
“디파스칼 이 새끼는 순전히 입만 살아서! 나한테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했잖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분이 식지 않아 씩씩대던 이사벨라는 응접실에 놓인 클레멘테의 편지지 세트로 개발새발 분노의 메모를 작성했다.
「다신 나한테 연락하지 마 이 쓸모없는 새X야」
이사벨라는 이 편지라기보단 쪽지, 쪽지라기보단 낙서에 가까운 물건을 아고스토한테 던졌다.
“당장 디파스칼 가에 갖다주고 와!”
아고스토는 내용을 슥 훑어보았다. 그에게 이사벨라의 불호령이 날아들었다.
“미적대지 말고 당장 가라고! 오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똑똑히 전해!”
그는 두말없이 고개를 숙여 승낙을 표한 후 응접실에서 걸어 나왔다. 평소보다 몸놀림이 쟀다.
여주인의 짜증이란 짜증을 다 뒤집어쓴 직후였으나 그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사벨라의 주위를 맴도는 남자 중 디파스칼 백작이 가장 꼴 보기 싫었다. 제일 재수 없었고⋯⋯. 제일 성공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디파스칼에게 이 쪽지를 전달할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아고스토 외에도 이 사건으로 기분 좋은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자기 응접실에 들어가려다가 군식구한테 장소를 뺏긴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 백작부인이었다.
클레멘테가 자기가 들어가려던 응접실에 사람이 있는 걸 깨닫고 황급히 문을 다시 닫았을 때 이사벨라는 안에서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짜증이란 짜증은 있는 대로 다 부리는 중이었다.
“디파스칼 개XX! 진짜! 악!”
물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좋아한다며! 좋아한다며!”
여기까지만 들어도 대충의 상황 파악이 되었다. 클레멘테의 입가에도 커다란 미소가 걸렸다. 환희의 웃음이었다.
‘날고 긴다는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이사벨라.’
안드레아 디파스칼은 잡아둘 수 없는 남자였다. 적어도 클레멘테에게는 그랬다.
클레멘테는 다른 남자들과는 그저 하룻밤 불장난을 저지른 뒤에 순순히 집으로 기어들어 왔다.
두근거리는 일탈 뒤에 그녀가 결국 잠을 청하는 곳은 나이 든 남편의 곁이었다.
하지만 디파스칼 백작에겐 진심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클레멘테를 진심으로 만든 남자였다.
-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마요.”
그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외박이었다.
미리 아내에게 밖에서 자고 오겠다고 언질하지 않았고 가짜로 댈 친구들도 없는 상황. 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클레멘테. 당신도 가진 게 많잖아.”
그는 거리감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 “자기, 전부 다 버릴 수 있어? 그걸? 다?”
일견 클레멘테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기실 본인은 클레멘테를 위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클레멘테가 엉겨 붙기 시작하자 남자는 그 뒤로 급격히 사무적으로 변했다.
그녀의 외박 요구 직후 남자는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고 열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그들의 밀회는 그렇게 끝났다.
‘디파스칼이 나한텐 다 해주니, 손도 안 잡는 신사네 뭐니 웃기지도 않았어. 이사벨라 너도 눈물 콧물 쏙 빼봐라.’
자기 집 응접실을 못 쓰고 쫓겨났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클레멘테는 오늘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발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피사리노 항구는 내놔야지요. 그놈이 찍은 문서가 있는데.”
데 마레 추기경은 루도비코 법황과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내부, 추기경의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옆에 그의 둘째 딸, 아리아드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성직자의 자식은 죄의 증거이므로, 법황 앞에 성직자가 자식을 데려간다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딸을 법황에게 성사를 받는다거나 하는 일 따위로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이제 정치 게임의 플레이어였다.
“자네라면 내놓겠나? 원하는 건 아무것도 못 이뤘는데?”
루도비코 법황은 농을 던졌다.
“그놈이라면 항구를 내놓느니 군사를 끌고 트레베로로 쳐들어올 놈이야. 그래서 내가 산 카를로로 도망 온 거 아닌가. 죽기 싫어서.”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알폰소 왕자가 날 지켜주겠지.”
아리아드네는 오늘 법황 때문에 여러 번 등골이 오싹했다.
회귀 사실을 아나? 하며 불안해한 게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이번엔 또 비밀 결혼 사실을 아는지 아닌지로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이럴 때가 아니었다. 법황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현 정세를 가늠해 보았다.
“이제껏 조용한 걸 보면 건강이 다시 나빠진 것 아닐까요. 이런 종류의 일은 우두머리가 결정을 내려주지 않으면 아래에서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어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더러운 성질은 무너지는 육신으로만 제어되는 법이니까. 내가 되어봐서 잘 알지.”
데 마레 추기경이 물었다.
“항구 양도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도 윗대가리의 윤허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힘으로 강제로 찍게 해야 하나요?”
“안 내놓으려 드는 필리프 놈에게 군대를 끌고 들어가서 목에 칼을 대는 건 마지막 수단이야.”
자체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은 트레베로로서는 불가능하거나, 또는 콘도티에로를 고용해야 하는 아주 비싼 옵션이었다.
“협박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오늘 법황은 자기가 가진 카드를 전부 다 주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필리프 놈에게는 절대적인 약점이 있다네.”
데 마레 추기경과 아리아드네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설마?
루도비코 법황은 상대방이 놀랄 거라는 장난꾸러기 같은 기대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데 마레 추기경과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갈리코의 국왕 필리프 4세는 자신의 친족인 오귀스트 공주와 부적절한 관계를 한, 천신님 앞의 죄인이야. 모두 공개될 시 즉시 파문당할 수도 있는 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