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1화> 새 시대의 석양
아리아드네와 데 마레 추기경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을 연신 끔벅이면서였다.
똑같이 생긴 둘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여간 웃기지 않았다.
눈치가 더럽게 빠른 루도비코 법황이 물었다.
“표정들이 왜 그래? 알고 있었어?”
“⋯⋯네.”
“예.”
루도비코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같이 심통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필리프 놈이 연애편지를 사방이 흔들고 다니기라도 했나? 같은 집에 살던 놈들끼리 연애편지를 쓰나? 나한테도 특급 비밀이었는데⋯⋯.
이걸 가져온 놈은 이렇게 공지의 사실인 물건을 비밀이랍시고 갖고 왔단 말인가!
데 마레 추기경은 딸의 눈치를 살폈다. 본인들이 알게 된 연유를 이야기하자면 필연적으로 갈리코의 죽은 루이 왕자와 어린 루이 왕자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 건은 추기경과 아리아드네 사이에서는 전적으로 아리아드네가 주도하고 만든 판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생각하기에, 그렇다면 법황에게 오픈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딸이 하게 두는 것이 맞았다.
일반적인 산 카를로의 가주라면 절대로 이 상황에서 자식에게 방향키를 쥐여주지 않았겠지만 이게 데 마레 방식이었다.
어쨌든 아주 성공적으로 운용되고 있지 않은가.
데 마레들이 순순히 입을 열지 않을 것으로 보이자 루도비코 법황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자기 패부터 깠다.
오늘은 어차피 다 양보하는 날이다.
“난 몽펠리에 대주교로부터 알게 되었다. 참고로 쓰레기 같은 놈이지.”
몽펠리에 대주교는 필리프의 병세가 깊어지는 기미를 보이자마자 루도비코 측에 투항했다.
국왕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판단에 더해, 필리프의 패악질을 트레베로에서 빨리 치워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루도비코 법황은 늙은 사자답게 몽펠리에 대주교가 퍼오는 각종 신변잡기의 이야기와 사소한 증거들을 모으기만 하며 묵묵히 부동을 지켰다.
그로서는 몽펠리에 대주교가 필리프 4세에게 문진으로 맞든 말든 움직일 유인이 없었다.
법황이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에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둘 사이에 사생아가 있는 건 알고 계셨나요.”
루도비코 법황의 얼굴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패를 전부 다 까지 않은 몽펠리에 대주교가 괘씸해서, 다른 하나는 자기가 들은 내용이 상상 이상으로 추악해서였다.
“알레망 법 대사면을 원하는 꼬락서니에서 짐작은 했었네만, 진짠가?”
“네. 확실합니다.”
법황은 욕설을 하며 성호를 그었다.
“죄로 더 무거워져서 천국에서 더 멀어져 버린 제 귀를 씻어주시기를. 아멘.”
루도비코 법황은 이내 그가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필리프를 파문하지 않은 이유를 털어놓았다.
“성전 중에 알게 되기만 했어도 이 사실을 공개하며 당장 자금 압박을 그만두라고 했을 걸세. 그렇지만 몽펠리에 대주교 이 박쥐 같은 인간이 너무 늦게 가지고 왔어. 알게 됐을 때는 딱히 필리프로부터 새로이 받아낼 것도 없어서⋯⋯.”
아리아드네가 답했다.
“항구를 받아낼 때 쓰라고 알려주시는 거군요.”
“그래.”
법황은 낮게 욕설했다.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그렇게 비장하게 선언하지 않았을 텐데.”
아리아드네는 킥, 하고 웃었으나 데 마레 추기경은 무엇을 예감한 듯, 심각한 표정으로 루도비코 법황을 바라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의 표정에 루도비코 법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로 정했어.”
삽시간에 무거운 정적이 공간을 메웠다.
* * *
“데 마레. 그, 소형 기도실 뒤에 있던 발코니는 아직도 그대로인가.”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의 부축을 받아 걸으며 물었다. 단둘이었다.
“추기경 집무실 옆에 붙은 그곳 말인가요.”
“그래. 석양이 보고 싶어.”
다행히 데 마레 추기경은 실용주의자였다. 전임자의 색깔을 지워버린다고 실내장식을 싹 새로 한다는 등의 사업은 그의 구미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루도비코가 산 카를로 교구의 추기경이었을 시절 오렌지 절임 한 조각과 함께 매일 오후를 보냈던 발코니는 많이 낡은 것을 제외하곤 예전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타고난 관리자야.”
쓰지도 않는 공간이 먼지 한 톨 없이 관리된 걸 본 법황이 칭찬을 내뱉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거 욕이죠?”
“눈치도 빠르셔라.”
루도비코 법황은 발코니 정중앙에 놓인, 라탄을 꼬아 만든 큰 등받이 의자에 힘겹게 앉았다.
그의 눈앞에는 그의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바로 그 풍광이 익숙한 모습을 드러냈다.
감동적인 석양이었다.
거대한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끝도 없는 구릉지의 사이프러스 나무 첨탑 사이로, 아름드리나무를 넘어 단단한 어머니 대지로, 그리고 또 그 너머로. 거스를 수 없는 무거운 하강이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가 없었는데.”
법황은 반지 낀 손을 들어 반지 뚜껑을 열었다.
“오늘 이곳이로군.”
두꺼운 황금 반지는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두툼한 게 아니었다. 반지 안은 찐득한 흑색 액체로 가득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고향에서 끝마무리를 할 수 있어서 참 행운일세.”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옆으로 숙인 채 대꾸 없이 어깨만 들썩였다.
“울어? 왜 울어, 이 머리 나쁜 친구야.”
법황은 기운 없는 손으로 옆에 선 데 마레 추기경을 툭, 쳤다. 데 마레 추기경은 그제야 울음을 꾹 누른 목소리 대꾸했다.
“⋯⋯공부 더럽게 못 했으면서 누가 누구한테 머리가 나쁘다는 겁니까.”
신학 학교에서 데 마레에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던 법황은 당당하게 말했다.
“다 늙어서 아직도 학교 등수 같은 거에 집착하나? 쯧쯧.”
땅이 빛을 집어삼켰다. 태양은 대부분 다 가라앉아 눈부시게 빛나는 광환의 끄트머리만이 남아 있었다.
해가 떨어지는 속도는 의외로 빨랐다. 삶의 마지막을 부여잡고 있다는 감상을 제외해도 그랬다.
마지막 빛이 대지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루도비코는 반지의 액체를 쭉 들이켰다.
“⋯⋯늘그막에라도 만나서⋯⋯. 즐거웠네.”
데 마레 추기경은 눈물을 끝까지 숨기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좀 더 오래 같이⋯⋯.”
“아니, 그건 좀.”
법황의 단호한 거절에 막 콧물이 나오려던 데 마레 추기경이 입을 벌린 채 법황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웃고 있었다.
“자네가 기⋯⋯.”
자네가 기어오르잖아, 라고 말하려던 법황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억!”
법황은 코로 공기를 들이쉬었지만 숨을 쉴 수는 없었다. 맥박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크게 벌린 입으로 통증을 호소하는 비명과 호흡을 갈구하는 숨이 섞인 무언가를 내질렀지만 둘 다 해소되지 않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죽어가는 루도비코의 남은 반대쪽 손을 잡고 그 손등을 쓰다듬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조용히 임종 기도를 외우는 데 마레 추기경의 손길 아래 루도비코 법황의 몸뚱이가 경련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천신이시여, 당신의 제일가는 종을 긍휼히 굽어살펴주시옵소서.”
그러나 루도비코가 경련하는 주기는 점차 뜨문뜨문해지고 있었다.
“그가 믿음으로 윤회의 고리에 합류할 때 가장 따스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그에게서 거두지 마시고⋯⋯.”
마침내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고요해졌다.
데 마레 추기경은 주름진 손가락으로 루도비코 법황의 눈을 감겨 주었다.
예삽교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남자는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작은 발코니에서 석양을 보다가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이젠 쓸모가 없겠지만, 추기경은 얇은 양모 이불을 법황의 가슴께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얼굴까지 덮기엔 아직 남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은 복도로 나가 목청을 돋워 크게 외쳤다.
“법황께서― 선종하셨다―!”
흔들림 없이 조용했던 대리석 복도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 인기척들은 동요로 변해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돌 하나하나, 목재 하나하나를 일으켜 깨우는 듯 했다.
추기경은 다시 한번 외쳤다.
“루도비코 1세 법황께서― 선종하셨다―!”
* * *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루도비코 법황과 사전에 약속되어 있던 대로 데 마레 추기경은 즉시 콘클라베의 개최를 알렸다.
“법황께서 선종하신 바로 그 자리가, 차기 콘클라베가 열리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카멜렝고인 데 마레 추기경은 사문화되었던 해묵은 조항을 내밀었다. 기계같이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였다.
“콘클라베는 748년의 하드리아누스 5세 치세 하에 나온 칙령집의 계율대로, 법황 성하께서 선종하신 바로 그 장소에서, 법황 성하의 서거 3일 후에 열겠습니다.”
연도부터 고리타분했다.
먼지 묻은 삼백 년도 더 된 칙령집에는 ‘콘클라베 개회는 3일 후부터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그간의 관례는 서거 후 15일이었다. 관련자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 “참석 자격이 있으신 분 중에 절반도 못 오실 것 같은데.”
- “15일이라도 빠듯해. 3일이면 그냥 불가능이야.”
칙령집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예삽교를 믿는 사람들은 중앙 대륙의 한쪽의 작은 땅덩어리에 모여서 살았다.
이제 예삽교 세계는 산맥을 넘고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에까지 닿았다.
그리고 추기경 직분을 가진 전 세계의 성직자에게 콘클라베의 참석 자격이 있었다.
추기경단은 투표권자이자 동시에 피선거권이 있는 자였다. 공의회 참석차 산 카를로에 왔다가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간단했다.
며칠 더 머물다가 콘클라베에 입실하면 됐다. 그러나 공의회에 아예 참석하지 않은 자는 상황이 곤란했다.
- “3일밖에 없으면 법황 성하께서 서거하셨단 소식이 닿지조차 않는 곳도 은근히 있을걸?”
15일이라도 소식을 듣고 도착까지 하기엔 버거운 시간일 수 있다.
그래서 각지의 추기경들은 법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으면 바로 트레베로로 가서 대기를 타곤 했다.
성지순례라거나 등등의 궁색한 핑계를 대서 말이다.
이번에는 법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전혀 없었고, 위치도 트레베로가 아니었다.
여행까지 할 만큼 정정한 법황이 돌아가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당한 사람들은 판을 엎고자 했다.
- “관례를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데 마레 추기경!”
- “칙령은 칙령이고, 우리가 실제로 하던 일의 방식이 있고!”
- “융통성 있게 합시다 융통성 있게. 이대로면 아무도 콘클라베에 참석을 못 하시지 않습니까!”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자들이 거칠게 항의했지만 본인의 신교파와 법황이 이끌던 구교파 세력의 비호를 받는 데 마레 추기경을 멈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게감 있는 추기경들이 데 마레 추기경을 옹호하며 앞으로 나섰다.
- “칙령에까지 다다르지 못한 관례는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법.”
- “실제로 공의회에 참석하셨던 추기경님들의 숫자가 과반이 넘으니, 절차적으로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 “선대 법황께서 지정한 카멜랭고를 흔들지 마십시오.”
그 외로 선대 법황이 트레베로가 아닌 곳에서 임종을 맞이한 관계로 빠른 차기 선출 이후 시신을 트레베로로 이송해야 할 필요성, 칙령집을 따라야 할 성직자의 의무,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고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은 추기경들에 대한 비난이 맞물렸다.
생각보다 월등한 화력에 반대파들은 뼈도 추리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다 루도비코 법황의 전적인 후원을 받은 데 마레 추기경이 사전에 안배해 놓은 대로였다.
“⋯⋯자. 다녀오마.”
데 마레 추기경은 데 마레 대저택의 현관에 서서 딸에게 말했다.
추기경의 흰 예복과 붉은 모자를 쓴 그의 뒤로, 산 카를로의 강렬한 태양이 비췄다.
역광을 받은 데 마레 추기경은 마치 법황의 황금색 의복을 걸친 것처럼 보였다.
“있잖아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