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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22화 (725/733)

<제422화> 차세대의 주자

데 마레 추기경은 하나 남은 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는 깔끔하게 싼 조그만 보퉁이를 든 채였다.

아리아드네는 아버지가 당장 훨훨 날아서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무심코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를⋯⋯. 사랑하세요?”

이전에 물었던 질문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같은 단어를 사용한 다른 질문이었다.

당시에는, 나를 위해 이폴리토와 가문의 후사를 포기하실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금은 당신이 중앙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되어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겠냐는 질문이었다.

전생의 데 마레 추기경은 권력의 획득이 걸려 있을 때마다 그녀를 버렸다.

“내가 전반적으로 자식 농사를 좀 잘못 지은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데 마레 추기경은 얼굴 가득히 따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데 마레 추기경은 작은딸이 살뜰하게 싸준 보퉁이를 품 안에 꼭 안은 채였다.

남들이 지금 당장 밤새 말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네 없네 하며 난리가 난 상황에 혼자서만 전부터 준비한 정갈한 차림이었다.

“그렇지만 딸 하나는 참 잘 두었어.”

추기경은 재차 중얼거렸다.

“딸 하나는 참 잘 두었어.”

그에게 남은 건 아리아드네 하나였다. 그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추기경은 콘클라베가 열리기 전, 3일간의 막간을 이용해 죽은 루크레치아의 일기장을 읽었다.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그에게는 애틋했던 추억이 그녀에게는 깜냥도 되지 않는 놈이 추근거렸던 불쾌한 사건에 불과했구나, 를 깨닫는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놀라웠고, 인간에 대해 그가 그나마 가졌던 믿음을 낱낱이 꺼내어 부쉈다.

데 마레 추기경이 고해성사를 받는 사제가 아니었다면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는, 누구나 가질만한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이미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과 끔찍한 인간이 몹시 많다는 걸 이미 남의 일로 반복 학습한 뒤였고, 스스로에게 닥쳐온 불행에도 과거의 패턴을 덧씌워 삼킬 내공이 있었다.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지만 너 하나만큼은 남았구나.”

인간관계 면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루크레치아의 일기장을 떠올리니 저 소리가 입 밖으로 절로 나왔다.

“내가 준 것에 비해서 과분하게 돌려받아 너를 볼 낯이 없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올려다보았다기엔 거의 평평한 시선이었다. 부모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동안 아이는 자랐다.

“⋯⋯많이, 주셨어요.”

아버지와 똑같은 초록색 눈동자였다. 그 말에 데 마레 추기경은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내가 너 하나만은 잘 보듬고 가겠다.”

아리아드네는 웃었다. 나를 사랑하냐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한 바는 없으나 데 마레 추기경은 완벽한 답을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는 이제 아버지의 건사가 필요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가는 마음은 항상 소중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 역시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해 농반진반으로 임무를 드렸다.

“법황 되셔서, 딸 시댁 들어가는 길 평탄하게 해 주세요.”

“오냐.”

데 마레 추기경은 숨을 킁, 내쉬었다.

“그 정도야 식은 수프 먹기지.”

그는 머릿속으로 알폰소 왕자와 자기 딸의 결혼에 귀천상혼을 부르짖으며 괴롭힐 자들의 목록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을 효과적으로 분쇄할 열두 가지 방법이 바로 뒤이어 생각났다.

법황의 권력으로 못할 거라고는 없었다. 평생 어떻게 휘두르면 좋을지 사고실험을 반복했던 힘이었다.

누구보다도 더 정교하게 사용할 자신이 있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고심하지 않더라도 파문권 한 방이면 다 끝난다. 가끔은 무식한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일 때도 있다.

“내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고 왕비 만들어 줄 테니까, 자식 많이 낳거라.”

데 마레 추기경은 주문했다.

“최소 둘. 아들로.”

“아빠!”

“넉넉잡아서는 다섯 정도인데 봐준 거야!”

“뭐 잘못 드셨어요? 갑자기 왜 이래요!”

데 마레 추기경은 딸의 타박을 받으며 말도 안 되게 전도유망해질 데 마레 가문에 대해 허풍 섞인 미래상을 줄줄이 나열했다.

우리 가문이 카를로 왕가 뺨치게 커질 테니 우리 집에 할당할 후계자도 꼭 낳아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풋 웃었다.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왜요, 아버지?”

“있잖느냐. 지금 네가 날 최초로 아빠라고 불렀단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그건 아빠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듣기 좋구나.”

데 마레 추기경은 보퉁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손주 셋. 타협은 없다.”

“아 진짜!”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마.”

* * *

법황 선종 후 3일째, 데 마레 추기경은 콘클라베가 개회함을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는 진중한 발걸음으로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인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내의 소형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콘클라베의 참석 자격이 있는 총 46인의 추기경 중, 26명이 참석했다. 데 마레 추기경이 27번째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추기경단을 한 명 한 명 손수 다 헤아린 그는 안에 들어선 후 마지막 사람으로서 예배당의 문을 닫았다.

- 쿵!

석재로 장식된 두꺼운 나무 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멘.”

레오 3세가 성호를 그었다. 아리아드네는 화들짝 놀라 국왕을 쳐다보았다.

그가 문짝에 대고 평소에 긋는, 손 전체를 사용하는 성호 대신 죽은 사람에게 쓰는 손가락 성호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 3세에게는 자기가 뭘 잘못했다는 인식이 없었다.

법황이 죽었으니 문짝에다 대고 성호를 그은 거지 뭐. 그 안에 사람이 있건 말건 내 알 바인가.

그는 되레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자기 아들, 알폰소 왕자를 못마땅한 기색으로 흘겼다.

국왕은 그냥 흘겨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며 끝내 한마디를 던졌다.

“공사다망할 텐데 이런 곳에까지 나오고. 너는 외교에는 관심 없고 왕자궁을 제일 좋아하는 것 아니었느냐.”

레오 3세는 이번 공의회와 연이은 콘클라베로 인해 해외 귀빈들이 산 카를로를 찾자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해서 뽐을 내고자 했다.

최근 에트루스칸 왕국이 가진 것 중 최고는 단연코 알폰소 왕자가 거느린 검은 투구 기사단이었다.

국왕의 연이은 사열 요청에, 처음 한두 번은 기사단을 좋은 마음으로 보내줬던 알폰소 왕자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국왕은 왕자의 기사단을 뽑아다 자기 자랑에 쓰는 거에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별달리 감사를 표할 생각이 없었고, 기사단이 자기 훈련 시간을 빼서 나오는 거라는 점에 대한 인식 역시도 없었다.

일방적으로 시달리던 왕자는 국왕의 가장 최근의 요청을 거절했고 오늘이 그 뒤로 처음 보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내놓은 시비에도 알폰소는 싱그러운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쾌활하게 답했다.

“데 마레 추기경 예하께서 콘클라베에 들어가시는데 당연히 제가 와 봐야지요.”

알폰소에게 묻는다면 맹세코 자기는 레오 3세를 화나게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뭐가 자기 아버지를 제일 화나게 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 같았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온 자리인데요.”

장인어른이시라 인사드리러 왔다는 소리였다.

장인어른이라는 사실 자체는 모르더라도 여자친구 아버지라는 뉘앙스만은 레오 3세에게도 명명백백히 전달되었다.

그 말을 들은 레오 3세는 알폰소에 곁에 서 있는 아리아드네를 아주 마뜩잖은, 10년은 곤 고약 같은 고약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레오 3세의 곁에 서 있던 루비나가 국왕의 의중을 재빨리 받았다.

그녀는 국왕의 심기를 보위할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에게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기도 했다.

“데 마레 여백작.”

자기 남편이 원하던 여자를 내 아들이 채갔다. 남편도, 아들도, 저 여자를 나보다 앞에 두었다.

이건 루비나의 자아존중감의 핵심에 해당하는 아주 깊은 부분에 생긴 스크래치였다.

체자레는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릴 수 없도록’ 따위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지만 루비나는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녀의 아들은 엄마가 목숨을 걸고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저 여자를 구하러 사자 우리에 몸을 던졌을 거라는 걸.

“성직자의 사생아가 되어서는 이런 자리에 오다니.”

깊은 원한과 분노는 난데없는 뾰족한 말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내용물 자체는 일말의 진실이 있었다.

네 존재가 오늘 너희 아버지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집에나 박혀 있으란 질타였다.

“나설 데 안 나설 데 구분도 못 하고.”

공식적으로는 백작에 불과한 아리아드네는 공작부인인 루비나에 대한 순종으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모든 미덕을 다 갖춘, 완벽한 중앙대륙의 여성 귀족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어이가 가출할 지경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저 문이 다시 열리는 날 아주 높은 확률로 법황의 딸이 된다.

에트루스칸 국왕마저 성황청의 주인에게는 고개를 조아려야 할진저, 국왕의 정부가 차세대의 비선 실세로 가장 유력한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알폰소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아직 만천하에 선포하진 못했으나 아리아드네는 천신 앞에서 그의 아내였다. 왕자비라는 소리다.

진실한 신분 관계에 따르자면 아리아드네의 의전 서열이 공작부인에 불과한 루비나에 앞서는 것이 합당했다.

의전 서열뿐이랴, 지금 루비나가 왕궁 안에서 알량하게 잡은 권력은 다 아리아드네에게 이양되는 게 맞았다.

루비나가 가진 것들은 모두 그녀가 왕실의 가장 높은 여자 어른이라는 점에 근거하는데, 그들의 결혼을 발표하는 순간 루비나는 그 정당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꾹 잡았다. 그는 저런 저열한 여자와 얽혀 시시껄렁한 말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왕자는 루비나 공작부인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곧장 레오 3세에게 간단한 예를 취했다.

“저희는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저희’라는 단어조차 레오 3세의 신경을 긁었다. 숨쉬고 움직이는 알폰소의 모든 것이 레오 3세에게는 거슬렸다.

자기 것으로 들이려다 실패한 여자가 이번에는 자기 적자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그의 유일한 후계자, 젊고 강건한 차세대의 주자가 그녀의 손을 붙들고 나타나 교제를 허락해달라 시위한다.

‘어림도 없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도망친 것은 무가치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미소유가 실패가 아니게 된다.

레오 3세는 자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을 떠나는 아들과 그 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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