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새로운 법황
“다 우리 계획대로 될 것이고 말고.”
베비치 주교는 확신에 차서 중얼거렸다.
흑마술을 사용했다는 발고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력한 차기 법황 후보인 예삽교 대교구의 추기경이 자기 집 안에서 무어인 마녀의 도움을 받아 이교도의 제사를 올렸다.
에트루스칸 왕국, 특히 상업이 발달하고 무어인 거주자가 많은 산 카를로에서는 이교도의 점복술 같은 것에 비교적 유하게 굴었다.
그저 부녀자의 심심풀이 같은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살라만타 왕국이나 그레도 왕국처럼 이단 심판이 성행하는 나라, 혹은 북해연합 왕국들처럼 신앙이 차지하는 위치가 절대적인 나라에서는 당장 끌려가서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을 당해도 모자랄 사건이었다.
보통 사람이 했어도 그랬다. 그런데 법황 후보? 말도 안 되는 결격이었다.
그리고 콘클라베는 에트루스칸 왕국뿐이 아니라 전 예삽교 세계에서 모여든 추기경들이 투표한다.
데 마레 추기경이 제거되면 산 카를로 대교구의 추기경은 치리아니 주교인 자신의 몫이 될 것이다.
“흐흐, 흐흐흐.”
물론 데 마레 추기경이 법황이 되어도 산 카를로 대교구는 순리에 따라 공석이 되겠지만, 베비치 주교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베비치는 이를 악물고 단언했다.
“데 마레는. 법황이 되면 안 되는 인간이야.”
실리주의자인 데 마레 추기경은 세를 모아 으스대기 좋아하는 베비치 주교를 중용하지 않았다.
크게 쓰지 않을 뿐인가, 베비치 주교는 자신을 바라보는 데 마레 추기경의 눈빛에서 경멸을 읽었다.
“감히 이 베비치를⋯⋯!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인간 주제에!”
베비치 주교가 보기에 데 마레 추기경은 혼자서 고고한 척하느라 굴러들어온 기회를 썩히는 인간이었다.
현재 레오 3세의 궁정에는 대신으로 쓸 만한 귀족이 전멸이었다. 지난 십여 년간 그랬다. 절대적으로 인재가 없어서가 아니다.
왕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덕을 부리니 강직한 사람은 지방 영지로 도망가고 국왕 아래에서 헌신을 다할 사람이 없어져서 그리 되었다.
보통 이렇게 세속 귀족의 공백이 있을 때는 자수성가형 인물인 고위 성직자가 그 자리를 꿰차곤 했다.
지금 베비치 주교가 레오 3세의 궁내대신이 된다면 부릴 수 있는 위세가 어마어마했다. 착복할 뒷돈도, 횡령할 재물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멍청한 데 마레가 그 빈 공간을 호로록, 했으면 지금 떵떵거리고 잘 살았을 걸, 중립적인 체 잘났다고 고개 쳐들고 다니더니만⋯⋯!”
물론 내밀한 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베비치 주교 본인도 자기 친딸이 왕국의 유일한 왕자와 비밀결혼한 상태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버티지, 국왕에게 끈을 대려 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비치 주교는 그럴만한 자식이 없었고 이런 상황도 몰랐다.
그는 그저 본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데 마레 추기경이 법황 자리에 등극하는 것이 거북스럽고 두려울 따름이었다.
그는 얼마 전, 추기경 아들의 마약 밀매를 전 법황에게 찌른 바 있었다.
파왁 가루를 넣은 연초를 산 카를로에 유통시켜 마약중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은 진지하게 듣는 양하더니 얼마 안 가 다시 데 마레와 희희낙락 어울려 다녔다.
‘그 말인즉슨⋯⋯. 죽은 법황이 데 마레에게 내가 찌른 얘기를 안 했을 리가 없다는 거지.’
베비치 주교는 데 마레 추기경이 산 카를로 대교구의 담당자로 본인이 아닌 다른 자를 영전시키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면 그는 영원히 작은 교구의 주교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저기요.”
이폴리토가 한창 딴생각에 빠져 있던 베비치 주교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베비치 주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 음습한 자식을 쳐다보았다.
제아무리 친아버지는 아니라지만 키워준 제 아비를 욕하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키들거리던 놈이었다. 인상이 아주 좋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질문 수준도 처참했다.
“이 건, 끝나면 나한테도 한턱 떼어주시는 거 맞죠?”
베비치 주교는 속으로 이폴리토의 멍청함을 양껏 비웃었다. 너무 멍청한 나머지 저딴 걸 자식이랍시고 키운 데 마레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데 마레를 제거한 이후에 네 쓸모가 있을 리가 없잖아!’
이번 일이 성공하면 이폴리토의 유일한 뒷배인 추기경 부친이 실각한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흑마술에 의지한다는 고발이 받아들여져 추기경이 법황 등극에 실패한다면 이폴리토는 흑마술을 사용하는 마귀와 마녀의 자식이 된다.
마녀의 자식은 새끼 악마다. 데 마레가 실각하는 날엔 저놈도 세트로 같이 화형대 행이었다.
‘당장 티베리 강에 밀어 넣어 죽이지 않는 걸로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그러나 베비치 주교는 이폴리토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대신 얼굴 가득히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고말고.”
저놈을 곧장 강물에 처박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데 마레의 실각을 확정 짓지 못한 채 콘클라베의 문이 닫혀버려서였다.
만에 하나 나중에 자신의 고변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게 된다면 이폴리토가 필요하다.
이 멍청이도 제깐엔 나름 머리를 쓴다고 증거의 원본을 베비치 주교에게 넘기지 않았다.
그걸 전부 다 베비치 주교에게 바쳤더라면 데 마레 추기경은 콘클라베의 문이 닫히기 전에 이단 심문관에게 끌려갔고 지금 저 안에는 스물여섯 명의 추기경밖에 없었겠지만, 이폴리토는 굳이 귀찮은 길을 택했다.
베비치 주교는 선택권이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흑마술 발고 때문에 표 대결에서 패배하고 다른 사람이 법황이 된다면 새로운 법황은 ‘우리’를 찾을 수밖에 없어.”
베비치 주교는 ‘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폴리토를 속여넘기기 위해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바람에 문장의 리듬이 미묘하게 삐그덕댔다.
현재 가장 유력한 주자인 데 마레 추기경을 누르고 누군가가 승리한다면—베비치 주교는 데 마레 추기경이 패배할 거라는 점에 있어서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콘클라베 투표장 밖으로 나온 새로운 법황은 자신의 가장 큰 적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단 심판이었다.
이단 심문관을 파견해 데 마레 추기경을 고문하고, 그 사이에 베비치 주교를 찾아 흑마술의 구체적인 증거를 넘겨 받아 공개 심판을 내린 후 화형대에서 불태워 버리면 모든 것이 깔끔하다.
완벽한 라이벌 숙청이다.
베비치 주교는 자기에게 딜을 걸러 올 새로운 법황이 누가 될지를 생각하며 입가에 웃음이 크게 걸렸다.
‘아르칸델레? 비텔바우젠?’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서로 다른 이득을 제시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싶은 걸 어떻게 선 제시할지 곰곰이 고민했다.
그때까지만 이 데 마레의 부스러기를 잘 보관해 두면 이놈은 그 이후로는 폐기해 버려도 상관없다.
베비치 주교는 다정한 목소리로 이폴리토에게 말했다.
“걱정일랑 말고, 내가 준비해 준 안가에 잘 숨어 있어. 그⋯⋯. 자네를 쫓아다닌다는 험악한 친구한테 걸리지 말고.”
부두의 뭐라고 했던가? 정말이지 얼굴 볼 일도 없는 희한한 떨거지던데, 집안에서 얌전히 공부만 했으면 만날 일도 없는 상대였다.
잘나가는 추기경의 아들이 어쩌다가 그런 놈한테 원한을 샀는지 베비치 주교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어미를 닮은 피는 못 속인다고 생각하며 베비치 주교는 이폴리토에게 일렀다.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고. 당분간 몸을 낮추고 있어.”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놈이 증거를 다 제 손에 쥔 채로 이상한 놈한테 걸려서 털리면 큰일이다.
“결과는 내가 자네한테 연락을 따로 할 필요도 없이, 만천하에 공개될 걸세.”
법황이 누구로 결정이 날지만 보면 된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 * *
사흘이면 장인어른이 법황이 되어 나오실 거라던 알폰소의 예상은 틀렸다.
3일은커녕 평범한 콘클라베가 끝날만한 기간인 일주일이 되어도 추기경단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열흘, 열하루, 열이틀⋯⋯. 열여드레, 열아흐레⋯⋯.
예배당 뒤에 붙은 발코니에서 오늘의 회의가 결렬되었음을 알리는 검은 연기만 거푸 올라왔을 뿐이다.
그러다 콘클라베의 문이 닫힌 지 정확히 스무날이 지난 날의 오후, 드디어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 “저기 봐요, 발코니에 하얀 연기예요!”
누군가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광장을 찢었다. 콘클라베에서 피워올리는 흰 연기는 새로운 법황이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산 카를로 전체에서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앞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새로운 법황의 탄생을 목도하기 위해서였다.
흥분에 차 주먹을 쥐고 결과를 고대하는 남자도, 고개를 숙이고 묵주 목걸이를 셈하며 기도하는 아낙네도 모두 한 마음이었다.
새로운 법황께서 선출되셔서 우리 힘들고 가여운 자들을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소서.
매일 오전과 오후, 내부에서 선거가 이루어졌을 시간마다 광장으로 나와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한 아리아드네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얀 봉화 연기가 피어오른 것을 알았다.
위험하다는 주세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바로 그 현장에 직접 서 있고 싶었다.
얼굴이 밝아진 아리아드네도 인파를 따라 맨 앞줄로 향했다.
새로운 법황의 얼굴—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흰 대리석으로 마감된 발코니는 하늘을 향해 우뚝 치솟아 있었다.
하얀 연기는 여기에서 났다. 발코니 안쪽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발코니에 누군가가 나왔다. 추기경단 중 가장 젊은 프라베르티 추기경이었다.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새로운 법황께서 선출되셨습니다!”
광장에는 침 삼키는 소리만 가득했다. 젊은 추기경은 목청을 돋워 외쳤다.
- “새로운 법황은⋯⋯. 유스티아누스 8세 성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