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생각지도 않았던
차기 법황이 ‘유스티아누스 8세’라는 외침을 들은 아리아드네의 눈앞이 멍했다.
‘시몬 1세가 아니고?’
아니, 아닐 것이다. 세례명으로 법황의 이름을 쓰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선대 법황 루도비코가 이상한 사람이었던 거지, 보통 법황은 즉위하며 자신의 이름을 새로 골랐다.
시몬 1세로 하기엔 너무 평범한 이름이라 막판에 겸연쩍어서 바꿨을 수도 있다. 그렇고말고.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선출된 법황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법황명을 새로 고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높이 솟은 발코니에서 작은 체구의 추기경이 걸어 나와 손을 들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광장을 메웠다.
- “와!!!”
쿵, 아리아드네의 가슴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데 마레 추기경도 조그만 남자였지만 지금 발코니에 서 있는 저 사람은 노인이 되며 등이 굽어 키가 줄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보다는 열다섯 살은 나이가 많아 보였다.
- “공경하는 우리의 새로운 법황께서는 그레도 왕국, 카스텔루헤얄 대교구를 책임지셨던 로드리고 보르고냐 추기경 예하로⋯⋯.”
단어가 귀에는 들렸으나 머리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어질어질했다. 발코니에 선 새로운 법황의 뒤로 익숙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법황의 황금빛 의복이 아니라 항상 입던 추기경의 백색 예복을 그대로 걸친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 “만장일치로 선출되신 보르고냐 추기경께서는 본인의 새로운 이름을 유스티아누스로 정하사⋯⋯.”
여기까지 들은 아리아드네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법황 등극에 실패했다. 다 차려진 만찬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가.
* * *
루이자 아주머니를 섭외한 이폴리토가 그녀더러 집에서 가져오라고 요구한 물건은 혹여나 어머니의 처소에 남아 있을 수도 있는 흑마술의 원재료와 어머니가 타인과 주고받았던 편지들, 그리고 자기 처소에 남아 있을 귀금속 약간이었다.
루이자는 그녀의 도련님이 시킨 일을 해내려고 이젠 아예 다른 방으로 바뀌어버린 루크레치아 마님의 예전 방을 싹 뒤졌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이미 예전에 아리아드네가 싹싹 긁어 죄다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죽은 개구리의 피도, 유리 플라스크도, 기복을 비는 용도라는 수상한 몰약 병도 가장 화력이 센 난로에 넣어 재로 만든 다음 절구로 찧어 땅에 묻힌 지 오래였다.
루크레치아의 편지들 역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리아드네는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을 전부 다 자기 금고 안에 넣어놨다.
그곳은 철옹성이었다. 루이자 아주머니 아니라 집사 니콜로라도 손을 대기가 불가능했다.
‘이를 어쩌지⋯⋯?’
루이자는 다른 임무라도 완수하기 위해 이폴리토의 방을 뒤졌다. 그러나 도련님이 약속한 귀금속 따위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아리아드네가 치워서가 아니라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자는 자기가 무능해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 거라고 이폴리토가 생각할까 봐 조급해졌다. 그러던 그녀에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아! 마님의 일기장!’
남편으로부터 그 존재를 알게 된 일기장이었다.
죽은 마님이 편지로 남겨놓았을 만한 것이라면 일기장에도 썼을 것이다. 이걸 대신 가져다드리면 되겠다!
루이자는 추기경의 처소에 있는 루크레치아의 일기장에 손을 댈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으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이번엔 추기경이 문제였다. 그는 ‘나중에 읽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일기장을 자기 방구석에 처박아놨다.
당장 안 읽을 거면 창고에라도 두던가, 시야에 닿는 곳에 두고 매일 들락날락했다. 이걸 통째로 들고 나가면 추기경이 다시 읽겠다고 할 때 대번에 들킬 것이다.
루이자 아주머니가 이폴리토 도련님을 위해 챙길 수 있었던 것은 도련님 방에 걸려 있던 옷 두어 벌밖에 없었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두꺼운 옷이라도 잘 입고 다니라는, 50대 아주머니다운 배려가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루이자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빨간 머리 하녀!’
예전에 도련님이 끼고돌던 하녀가 있었다.
바로 생각나지 않은 건 이제 깜박깜박하는 자신의 기억력 탓이다. 루크레치아 마님까지 날려버렸던 큰 사건이었다.
‘이름이 말⋯⋯. 말레나였나.’
이름은 가물가물했지만 들어앉겠다고 나대다가 끝이 좋지 않았던 건 확실하게 기억했다.
보통 하녀가 그런 식으로 없어지면 다른 하녀 아이들이 각다귀 떼처럼 덤벼들어 죽은 애의 소지품을 털어간다.
별 볼 일 없다고 해도 집안 도련님의 눈에 들었던 하녀는 허드렛일하는 하녀 아이들보다는 분명히 귀중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의 물건은 손수건 한 장, 신발 한 짝도 남기지 않고 싹 없어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하녀는 지금 하녀장인 산차의 친언니였다.
그때 하녀 아이들이 하녀장 산차의 눈치를 보느라 그 하녀의 소지품에 손을 못 댔던 것을 루이자 아주머니는 기억해냈다.
‘그걸 하녀장이 가져갔을까?’
그녀는 조마조마해 하며 예전에 말레타가 마지막으로 썼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고 평범한 방이었고 그 방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물건들이 있었다.
비싸다고 해도 보석이나 귀금속처럼 값나가는 건 이미 다 사라진 지 오래고, 유행이 지난 공단 모자, 보통 여자 치수보다 한참이나 커서 새 주인을 찾지 못한 굽 높은 신발,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자주 입은 레이스 속옷 따위의 물건들 위에 먼지가 더께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저런 잡스러운 물건들이 남아 있는 걸 보아하니 아리아드네의 하녀장은 자기와 원수 사이였던 친언니의 유품을 거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인들은 하녀장의 눈치를 보느라 비싼 건 쏙쏙 훔쳐 갔어도 대놓고 물건을 털지는 못했다. 루이자 아주머니의 손에 땀이 났다.
‘쓸모 있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 땀에 젖은 손바닥에 비단 주머니 속 질긴 종이 같은 것이 잡혔다.
“⋯⋯!”
비단 주머니 그 안에서 나온 건 편지 뭉치였다. 정확하게는 ‘편지였던 쓰레기’다.
죽은 말레타는 글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동물적인 감은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이폴리토에 대한 레버리지로 사용하거나, 여의찮으면 남에게 팔아버릴 작정으로 이폴리토의 편지나 기록 같은 것을 훔쳐서 모았다.
그러나 이폴리토는 편지나 일기 따위를 꼼꼼히 쓸 위인은 아니었다.
이폴리토가 쓴 것은 친구들에게 도박 자금을 빌린 내역 같은 허드레 영수증이었다. 낙서나, 누군지 모를 불특정 다수에 대한 욕설 같은 것도 있었다.
내용을 분간 못하는 말레타는 똑같이 다 소중하게 모아 놓았다.
자기 욕이 쓰인 쪽지 같은 것도 함께 들어 있는 게 우스우면서도 슬펐다.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물건들 외에, 이폴리토가 수신인인 편지도 그 안에 같이 있었다. 거기에는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이폴리토에게,
언제나 보고 싶은 사랑하는 우리 아들아⋯⋯(후략)⋯⋯.」
루크레치아가 쓴 편지였다. 루이자의 눈이 급하게 내용을 훑었다.
「엄마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어. 너희 아버지가 엄청나게 화를 냈단다. ⋯⋯(중략)⋯⋯엄마가 막 이상한 일을 한 건 아니고, 그냥 무어인 집시에게 부탁해서 점을 보고 작게 제사를 올렸어. 그냥 집에 조그마한 오망성을 그리고 제물을 조금 올리는? 그냥 복을 비는 거지.(후략)」
흑마술 사건 때문에 이폴리토에게 구명을 요청하며 보냈던 편지였다. ‘오망성’이라는 단어를 본 루이자의 동공이 커졌다.
「진짜 별일 아니었어. 우리 집에 있는 푸른 심해의 심장이라는 보석의 기운이 나랑 너희랑 상극이라고 하더라.
사람을 죽이는 대신 간단한 방법으로 하자고, 죽은 개구리의 피, 독각사의 내단, 몰약과 유향, 납처럼 녹인 황금을 섞어 오망성을 그리면 된다고, 제사를 올려서 귀보석의 기운을 누르면 너도 우리도 잘 풀리고, 그 망할 계집애한테 흘러갈 푸른 피와의 혼사 운이 다시 이사벨라에게로 돌아온다지 뭐니!
내가 누구를 해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저주를 내리려고 한 것도 아니야! 그저 정당히 우리 것이었던 걸 되찾아오려고 했었을 뿐이야.
하물며 상대는 우리 가문 애인 아리아드네인 바에야⋯⋯(중략)⋯⋯너희 아버지가 길길이 날뛰어서 베르가모 영지로 쫓겨가게 되었다.
⋯⋯(중략)⋯⋯
이제 곧 방학이니 돌아와 있는 동안에 어떻게 좀 손을 써 주지 않겠니⋯⋯(후략)⋯⋯.」
‘이거다!’
* * *
루이자 아주머니가 득달같이 가져온 결과물을 받아본 이폴리토는 벌컥 화부터 냈다.
“이거밖에 없다고? 흑마술사의 램프는? 처녀의 피를 고아 만든 독약은?”
그의 머릿속에는 계산이 이미 다 서 있었다.
루이자가 증거물을 잔뜩 가져오면 그 중 찌끄러기 증거물 몇 개는 베비치 주교에게 넘겨주고 제일 중요한 건 자기가 껴안고 있는다.
그리고 내 방에서 귀중품을 들고 오면 그걸로 신나게 한탕 마신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옷 나부랭이를 가져다가 어디다 쓰라고!”
루이자 아주머니가 들고 온 건 금덩이 대신 낡은 옷가지 두어 벌, 그리고 전 대륙이 놀라 자빠질 이교도의 악신 대신에 엄마가 자기한테 쓴 편지 한 장이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아이고, 도련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루이자는 대신 자기가 베껴온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루크레치아의 일기장을 메모 형식으로 드문드문 필사한 거였다.
“마님의 일기장을 발췌해 왔어요.”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이는 이폴리토의 화를 더욱 돋웠다.
“가져올 거면 일기장을 통째로 가져와야지, 아줌마 따위가 끄적댄 글씨를 내가 어디에다가 써!”
이단심판관한테 내밀어도 증거가 안 될 것이다.
막말로 루이자 아줌마가 흑마술 증거를 위조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도련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던 루이자는 당황했다.
“아니, 그게, 추기경 예하께서 일기장을 꼭 끼고 안 놓으시는 바람에⋯⋯.”
“아 됐어, 다 필요 없어!”
이폴리토는 루이자 아주머니가 베껴온 종이의 내용을 보지도 않은 채 버럭 성을 냈다.
“썩 꺼져! 당장 꺼져!”
* * *
‘오늘 루이자가 가져온 물건 중 유일하게 쓸모 있는 건 어머니의 편지다.’
이폴리토는 루이자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겨울 솜옷을 둘둘 감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렇다면 증거를 둘로 나누겠다고 결심했다.
루이자 아주머니가 찾아온 어머니의 편지를 옆에 펴 놓고, 이폴리토는 그 내용을 베껴 적기 시작했다.
전부 다 적은 게 아니라 데 마레 추기경이 흑마술을 종용했다는 식으로, 아버지가 등장하는 부분은 또박또박, 어머니가 혼자서 일을 저지른 부분은 흘려 적었다.
이폴리토의 괴발개발 손글씨는 이 작업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는 콘클라베 직전에 추기경들에게 전달되었다.
- “시몬 데 마레는 예삽교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베비치 주교의 확언과 함께였다.
그는 이폴리토의 손목을 비틀어 정확한 증거를 확보하는 대신 본인의 이름으로 보증을 서서 데 마레 추기경의 흑마술 사실을 알렸다.
일 잘 못 하는 사람의 한계였다. 그러나 나쁜 일처리로 통째로 망하기엔 재료가 너무 좋았다.
- ‘변명하면 할수록 증거가 튀어나올 텐데, 흑마술을 무슨 수로 묻어.’
이폴리토 데 마레는 몹시 적극적이었다.
자기가 직접 증언할 용의도 있으며, 아버지가 자기를 가문에서 쫓아낸 것 때문에 자기 증언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면 가문에서 오래 일한 다른 사람의 증언과 서면 증거도 보충할 수 있다고 했다.
- “대신 저한테 합당한 대가를 마련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짜증 나는 놈이긴 했다.
베비치 주교는 이 짜증 나고 멍청한 놈과의 거래로 얻은 자료를 콘클라베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추기경단 중 두 명에게 전달했다.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었다. 일단 베비치 주교 본인과 안면이 있어야 했고, 데 마레 추기경을 끌어내릴 이유가 있어야 했다.
베비치 주교가 고른 첫 번째 상대는 북해 연합 쪽, 안하임 교구의 비텔바우젠 추기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