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화> 패배하지 않을 자신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베비치 주교가 아는 한 데 마레 추기경과 일절 안면이 없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죽은 루도비코 교황이 이끌던 구교파에 속한 자였다.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죽은 루도비코 법황의 세력 안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데 마레 추기경이 급작스레 루도비코 법황의 최측근으로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베비치 주교는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부슈뒤렌 대주교의 실각 이후 법황의 후계자 후보 중 하나로 입에 올랐던 만큼, 데 마레 추기경의 부상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론했다.
구교파가 신교파와 갈라져 자기 갈 길을 가게 되면 최선이다.
데 마레 추기경이 이끄는 일파만으로는 법황이 될 수 없었다. 베비치 주교는 비텔바우젠 추기경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다.
그렇게 ‘데 마레 추기경이 자기 집안에서 흑마술을 부렸다’는 고발과 베비치 주교가 전달해 준 증거자료를 받은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곧장 데 마레 추기경 본인을 만나러 갔다.
그는 증거자료 전체를 데 마레 추기경에게 내밀었다.
- “데 마레 추기경 예하. 저는 이런 문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추궁하는 사람치고는 태도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덮어줄 테니 보상을 달라는 거래를 거는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도와주는 것에 가까웠다.
- “베비치 주교가 건네더군요. 자료의 출처는 귀댁의 전 자제분이라고 했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폴리토의 성품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자기의 뒤통수를 칠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이 무슨⋯⋯!”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괴로워하는 데 마레 추기경을 보고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격려의 손길이었다.
- “저한테 변명하실 필요도 없고 해명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제가 이걸 받은 유일한 사람이라면 추기경께서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침묵을 지킬 겁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차기 법황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니더라도 서너 번째로 입에 올라올 만한 사람은 되었다.
- “도대체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겁니까?”
법황의 위가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모두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찬찬히 대답했다.
- “이번 공의회 참석차 산 카를로에 난생처음으로 방문하며, 귀국의 알폰소 왕자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사위에게 지나치는 말처럼 들은 것도 같았다.
레오 3세가 길길이 날뛰었다고 하긴 했지만, 의례적인 만남이었고 길거나 중요한 만남도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여전히 자기 사위의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사위가 북국의 추기경에게 무슨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알폰소 왕자님께서는 저희 슈테른하임 공국의 율덴부르크 대공과 성전에서 함께 싸우셨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대공께 목숨 빚이 있습니다.”
- “아, 같은 나라 사람이셨죠.”
- “그렇습니다.”
성황청의 종은 국적을 초월해 예삽교에 헌신할 것을 요구받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교구는 국가 단위로 나뉘어 있었고 사용하는 언어, 풍습, 문화가 나라별로 모두 달랐다.
- “제가 만나 뵌 알폰소 왕자님께서는 데 마레 추기경 예하에 대한 깊은 믿음을 말씀하시며, 추기경 예하께 힘을 실어주라고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예하를 돕는 것이 본인을 돕는 것이라며.”
데 마레 추기경은 당황했다. 그는 지금 막 친자식처럼 삼십 년 가까이 키운 아들에게도 배신당했다.
맞아들인 지 며칠 되지도 않는, 심지어 그에게 아쉬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위가 장차 자기가 쓸 수 있는 카드를 희생해가며 본인을 밀어줄 거라곤 생각도 안 해 보았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데 마레 추기경 본인에게 생색은커녕 언질조차도 하지 않았다.
알폰소 왕자는 그의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 “그리고 제가 목숨 빚을 진 율덴부르크 대공 합하께서는 알폰소 왕자를 잘 돌봐달라고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는 중앙대륙의 동량이 될 것이라 하시면서요.”
오늘 그를 도와준 비텔바우젠 추기경 또한 그의 상식에서 아주 멀리 벗어난 사람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 본인이었다면 고민도 없이 바로 이 흑마술 발고장을 들고 곧장 전체 회의에 까발렸을 것이다.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가 살아온 방식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물었다.
- “⋯⋯그것뿐입니까?”
- “물론 아니지요.”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단호박처럼 데 마레 추기경의 질문을 잘랐다.
데 마레 추기경은 약간 자기가 원래 알던 세계로 돌아온 것 같아 내심 안도했다.
- “전 이 문건의 신뢰도 자체를 의심합니다. 내용이 조악하고 교차검증할 거리가 없군요. 아무나 휘갈겨 쓰면 만들어지는 문건 아닙니까.”
이폴리토가 루이자 아주머니가 쓴 어머니의 일기장 요약본을 보고 했던 생각을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이폴리토의 필사본을 보고 똑같이 했다.
게다가 그는 이폴리토에게는 없는 도덕성 내지는 성직자적 강박 역시 가지고 있었다.
- “진작에 나왔으면 검증할 방도를 고민해 보았겠지요. 그러나 검증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콘클라베 입장 두 시간 전에 찌르는 건 방법이 저열합니다.”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데 마레 추기경의 어깨를 토닥였다.
-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첫 번째 투표에 입장하십시다.”
-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텔바우젠 추기경에게 사의를 표하면서도, 데 마레 추기경은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텔바우젠 추기경이 너무 잘 대해줘서만은 아니었다.
이폴리토의 고발장은 루크레치아의 편지 내용을 뭉개어 데 마레 추기경이 직접 무어인 마녀를 데려와서 흑마술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처럼 쓰여 있었다. 그 부분은 허위다.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의 오랜 정부이자 그의 아이들의 어머니인 죽은 루크레치아가 집 안에서 흑마술을 시행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었다.
- ‘이폴리토, 이폴리토⋯⋯.’
그가 키운 아이는 어디까지 갈 셈일까.
비텔바우젠 추기경은 데 마레 추기경에게 근심하지 말고 첫 번째 투표장에 들어가자고 격려해 주었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는 않았다.
베비치 주교가 고른 두 번째 사람, 툴레나 교구의 로욜라 추기경이 사색이 되어 데 마레 추기경에게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 “어떻게 저희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로욜라 추기경은 데 마레 추기경이 이끄는 신교파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아주 열렬한 일원이었다.
살라만타 왕국에 위치한 툴레나 교구를 이끄는 그는 지역적으로나 국적으로나 구교파에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원칙주의자로서의 꼬장꼬장한 면모 탓에 구교파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한 그는 교리해석에 논리학과 엄밀한 신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신교파에 합류했다.
그런 그인 만큼 로욜라 추기경은 이번 고발을 쉬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 “흑마술이라니요! 미쳤습니까, 예하?”
- “로욜라, 로욜라. 오해가 있어. 내 말 좀⋯⋯.”
- “베비치 주교는 본인에게 흑마술에 사용된 도구들과 증인이 모두 있다고 밝혔습니다!”
콘클라베가 시작되고 나면 내부에 있는 추기경단은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다.
- “내가 다 설명할 수 있네. 지금은 일단 비밀로 하고, 나가서 차차⋯⋯.”
- “우리는 지금 차기 법황을 뽑는 투표 중입니다! 투표에 참여하는 추기경 전원은 모든 정보를 안 채로 투표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로욜라 추기경은 지금 당장 모든 의혹을 해소할 수 없다면 최소한 투표에 임하는 추기경단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는 해야 한다, 고 데 마레 추기경에게 맞섰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 “로욜라, 내 얘기 좀 들어보게.”
로욜라 추기경을 향해 개인적 인정에 호소해보려던 데 마레 추기경이 입을 떼자마자, 저쪽에서 회의 진행을 맡은 추기경단 최연소자, 프라베르티 추기경이 해맑게 그들을 불렀다.
- “첫 번째 투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두 분 다, 투표장에 입장하시지요!”
그렇게 콘클라베 개회 후 첫날의 첫 투표가 시행되었다.
- “나무함에 순서대로 기표 용지를 넣으시고⋯⋯.”
익명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공들여 잘 흔든 후 개표한 첫 번째 투표의 결과는 데 마레 21표, 아르칸델레 4표, 보르고냐 2표였다.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그 투표 결과가 공개된 후 로욜라 추기경이 일어섰다.
- “무거운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과 반드시 공유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로욜라 추기경은 손에 든 양피지를 들어올렸다. 데 마레 추기경과 비텔바우젠 추기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데 마레 추기경이 1122년 겨울, 산 카를로에 위치한 추기경의 관저에서 금지된 이교도의 흑마술을 시행했다는 고발이 들어왔습니다.”
로욜라 추기경은 양피지의 내용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크게 술렁였던 장내의 분위기가, 한 문장 한 문장이 낭독될 때마다 점차 싸늘해졌다.
베비치 주교의 투서가 공유된 이후 열린 그날 오후의 투표는 데 마레 13, 아르칸델레 7, 보르고냐 1, 기권 6표였다.
* * *
그 뒤는 지리한 참호전이었다. 데 마레를 지지하는 추기경단은 11인까지 줄었고 그 뒤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데 마레 추기경 바로 뒤의 차점자라는 이유로 8표까지 추격한 아르칸델레 추기경은 거기에서 더 표를 모으지 못했다.
흑마술에 손을 댔다는 데 마레가 법황이 되면 안 되는 이유는 확실했지만, 이단심문관 출신으로 자신의 유명세를 쌓아온 아르칸델레가 되면 안 되는 이유도 확실했기 때문이다.
- “설령 저 발고가 다 거짓이라도 최소한 데 마레의 죽은 정부가 흑마술에 심취한 여자라는 건 사실입니다! 예삽교의 정신적 지도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중앙대륙이 영적인 타락으로 검게 변할 겁니다.”
- “아르칸델레 추기경이 보위에 오르면 영적으로는 깨끗한 중앙대륙이 되겠지요. 티끌 하나라도 묻은 사람이면 다 죽여 없애서요! 대신 대지가 핏빛으로 시커메지겠지.”
이단심판관도 아니라 이단심문관. 아르칸델레 추기경은 고문 기술자 출신이었다.
옴짝달싹 못 하고 자리에서 버티던 데 마레를 설득한 사람은 온건파인 프라베르티 추기경이었다.
추기경단의 최연소 구성원이자 갈리코 남부의 상트이레네오 교구를 맡은 프라베르티 추기경은 누구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둥글둥글했다.
- “예하. 우리는 지금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 “⋯⋯.”
- “콘클라베 개회 후 30일이 도과한 이후에는 전원 찬성이 아니라 과반수 찬성으로 선출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998년도 엡슬롬 공의회 결과에 대한 유권해석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 “⋯⋯.”
- “그렇게 되면 14명을 확보하는 측이 이기게 됩니다. 세 명 더, 자신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