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7화> 가족
콘클라베가 만장일치가 아니라 과반수 찬성제로 바뀌면 데 마레 추기경은 더 이상의 농성이 불가능해진다.
그에게는 열 한 명이 있었다. 상대를 막으려면 열네 명이 필요하다.
패배를 막을 해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데 마레 추기경은 답을 하지 못했다.
- “만일⋯⋯. 아르칸델레 추기경이 집권하게 되면 데 마레 추기경께서는 무사하시기 힘들 겁니다.”
프라베르티 추기경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흑마술과 그 퇴치⋯⋯. 아르칸델레 추기경의 주전공이지 않습니까.”
아르칸델레 추기경은 신교파에도 구교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의 소속을 구분하자면 신흥 세력이다.
그는 아세레토의 사도가 부흥함과 동시에 그 반동으로 명성을 떨친 자로, 이단을 심판하며 자리를 굳혔다.
따르는 세력이 없는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위세를 보여야 하는 아르칸델레 추기경에게 이단을 빌미로 산 카를로 대교구장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심는 일은 임기 초반의 완벽한 첫 업적으로 보일 것이다.
- “위험부담을 무릅쓰시겠다면 전 말릴 수가 없습니다. 법황 자리가 코앞인데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지요. 하오나⋯⋯. 추기경께서는 가족을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가족. 성직자가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족은 굳이 따지자면 그의 원가족이겠으나 그걸 의미한 게 아니었다.
프라베르티 추기경도 정부 하나를 오래 곁에 두었다. 자식들도 있었다.
프라베르티 추기경은 명망 높은 귀족가의 자제였는데, 그의 정부는 숫제 그의 본가에 들어가서 다섯 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며느리 노릇을 하며 살았다.
데 마레와 프라베르티가 별종이었다.
성직자의 정부는 없는 게 최선이었고, 있더라도 한 명당 이삼 년 미만으로 만나며 빨리 정을 떼고 주변에 여자를 두지 않으려 했다.
자식이 생긴다면 정 있는 사람은 멀리 보내서 키웠고 냉혈한들은 수도원에 맡겨 고아 수사처럼 자라게 했다.
한 여자에게서 자식을 여럿 보고 그 어미를 계속 가까이 두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 “⋯⋯예하께서 표 대결에서 패배하신다면 그 가족도 함께 끌려 내려갈 겁니다.”
화형대. 십자가. 매달린 젊은 처녀들. 울부짖는 가족과 환희에 찬 구경꾼들.
- “작은 따님은 여러모로 두각을 나타내고 계시고 큰 따님도 시집가셔서 평온한 가정생활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온 산 카를로를 돌아다니며 원수만 만들고 다닌 이사벨라는 물론이요, 아리아드네도 적이 많았다.
그 아이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데 마레 가문의 딸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불태워지는 꼴에 열광할 것이다. 추기경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 “흑마술에 연루되었다고 공표되면 아직 혼전이신 작은 따님은 물론이고, 큰따님도 그 남편 쪽 가문에서 보호하기 힘들 거예요.”
외국인인 만큼 사소한 디테일에서는 오류가 있었지만 큰 그림만큼은 맞았다. 이사벨라의 남편은 이사벨라를 결코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다.
아리아드네의 남편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흑마술에 연루되어 실각한 추기경의 딸을 왕자비로 앉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숨겨놓은 정부 정도로 죽을 때까지 돌봐주는 것이 선량한 남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데 마레 추기경의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프라베르티 추기경의 이야기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데 마레 추기경은, 갈라진 목소리로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프라베르티 추기경이 의도했던 방향과 반대의 결론을 향해 있었다.
- “내가⋯⋯. 내가 물러선다고 해서 아르칸델레 추기경이 날 살려둘 리 없소.”
패배의 결과가 화형대라면 패배가 불 보듯 뻔해도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손수 싼 보퉁이를 쥐여주며 아빠의 큰일을 응원하던 말간 얼굴의 둘째와, 어디서 뭘 하는지 연락도 닿지 않는 첫째를 생각하면 그는 절대로 무너지면 안 됐다.
그러나 프라베르티 추기경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 “아르칸델레 추기경께서 법황이 되신다면 그렇지요.”
- “⋯⋯?”
- “저희는 보르고냐 추기경 예하를 법황으로 올리고자 합니다. 중용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어느 한 측으로 쏠리지 않으셔서 도리어 믿음직하지요.”
“온건파 하면 본인이시지 않습니까. 프라베르티 추기경께서 왜 직접 안 하시고⋯⋯?”
데 마레 추기경은 말을 하다 입을 닫았다. 프라베르티 추기경은 추기경단 중 막내로, 서임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본인이 하긴 어렵겠지.
데 마레 추기경의 짐작대로 여기에는 어른의 사정이 있었다. 아르칸델레 추기경의 교구는 그레도 왕국 내에 있었다.
외지고 작은, 대부분이 산맥인 척박한 곳이었다.
괜히 아르칸델레 추기경이 이단심문관이 되어 ‘마녀’와 ‘마귀’를 처단하고 전재산 몰수형에 처하는 게 아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보르고냐 추기경의 카스텔루헤얄 대교구가 바로 근처였다.
보르고냐 추기경이 법황이 된다면 아르칸델레 추기경은 비어 있는 옆 대교구로 영전하거나, 두 교구를 모두 관할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보르고냐 추기경과 아르칸델레 추기경 예하는 관할하시는 교구가 바로 근처이시지요. 두 분 사이에서는 양보의 대가로 대교구를 이어받으시는 협상이 가능해 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르고냐 추기경은 80이 코앞인 노인이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중앙대륙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프라베르티 추기경은 미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 “아르칸델레 추기경께서는 다음 투표때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단의 구성이 본인에게 더 호의적일 수 있다고 믿으시는 모양입니다.”
이번 콘클라베의 구성원은 사실 데 마레를 위해 차려진 만찬이었다. 아르칸델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데 마레 추기경에게 다음 기회는 없다는 소리였다. 데 마레 추기경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나에겐⋯⋯. 나에겐 다음 기회는 없네.”
프라베르티 추기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서 용퇴를 권유드리기가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르고냐 추기경 측은 아르칸델레 추기경과 상당 부분 협상이 진전되는 중이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이 둘이 힘을 완전히 합치고 나면 데 마레 추기경은 협상의 상대가 아니라 잡아먹고 치울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번은 본인을 찾아와 용퇴를 촉구하는 만남이었다. 다음에는 만남이 없다.
데 마레 추기경 본인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의 파벌을 찾아가 한두 명을 빼오려는 시도를 하겠지. 그러고 나면 데 마레는 완전히 몰락한다.
프라베르티 추기경은 가만히 말했다.
- “⋯⋯가족을 생각하십시오, 예하.”
프라베르티의 말이 맞았다. 아르칸델레가 집권한다면 데 마레 대저택은 화염에 휩싸일 것이다.
추기경은 우선 아리아드네를 생각했다. 아리아드네는 신 앞에서 알폰소의 신부이지만 속세에서는 그저 데 마레 추기경의 딸이었다.
왕자는⋯⋯. 선량한 사람이다. 좋은 남자다. 비텔바우젠 추기경과의 일화에서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하지만 좋은 남자인 것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남자인 건 별개의 일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가 알폰소 왕자의 측근이라도 성난 군중이 흑마술사 추기경의 딸을 잡으러 몰려오면 입 꾹 다물고 모르는 체하라고 권할 것 같았다.
부인과 사별해서 다시 홀몸으로 시장에 나가면 이혼 문제도 없고 깔끔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사벨라가 있었다. 추기경은 겉으로는 자신과 이사벨라의 사이가 복원된 것 같았으나 큰딸이 전혀 마음을 내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 ‘꼭 제 어미 같군.’
자기 성에 차지 않는 배우자를 맞이한 것도 제 어미와 똑 닮았다. ⋯⋯그 배우자가 그녀를 보호하지 않고 포기할 거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이사벨라의 남편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는 결코 자기 아내를 비호하지 않을 것이다.
데 마레 추기경은 죽은 루도비코 법황과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 “죽을 날이 다가오니까, 그냥 다 고마워. 그냥 다 고맙고 또 미안해.”
참으로 맞는 말이었다. 죽은 루도비코의 말이 이제는 절절히 뼈에 와 닿았다.
해준 것이 없는데도 그에게 곁을 내어준 아리아드네가 너무나 고마웠다.
어린 시절 고사리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아빠’ 소리를 들어보았는데⋯⋯.
그가 이번 투표에서 패배한다면 그 뽀얀, 아직 꽃피워보지도 못한 젊은이는 화형대의 연기로 스러질 것이다.
이사벨라는 말할 것도 없다. 제 남편의 집에서 쫓겨나 형장으로 직행하지 않는다면 비참하게 거리를 헤매다가 죽겠지.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고 곧장 죽으면 그게 요행일 정도였다.
그의 큰딸은 아기 엄마가 된 이후로도 그 대단한 미모가 전혀 시들지 않았다.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는 모든 게 다 잘 풀릴 때는 엄청난 무기이지만 그녀를 보호해 줄 뒷배가 없을 때는 주인을 죽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독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심지어 이 모든 상황을 가져온 원흉인 이폴리토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바쁘다고 제 어미와 버려놓았던 그 시간을 아비로서 좀 더 채워주었다면 이놈이 덜 비뚤어졌을까? 날 죽이고 나면 저는 어쩌려고 이런 일을 저질렀나?
그리고 결국 죽은 루크레치아에게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는 처음 루크레치아의 일기장을 보고 기겁했다.
그 일기장의 기술에 따르면, 그의 행복한 가정은 본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루크레치아가 데 마레 추기경의 손길 하나하나에도 소름 끼쳐 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 ‘그렇지만 임자도⋯⋯. 고생 많았어.’
패배와 그에 이은 죽음의 가능성과 마주하고 나니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허망했다.
싫어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손가락도 닿기 싫은 그 남자의 자식을 낳고 자신의 혐오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짜 웃음을 짓는 인생은 오죽 힘들었으랴.
그게 전부 다 연기라면 루크레치아는 중앙대륙 연극배우협회에서 상 하나쯤은 받아야 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도, 그 전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으려니 하는, 그래도 그 수많은 세월 속에 나에게 보여줬던 웃음 중 몇 개는 진짜였으리라 하는, 의외로 사실에 꽤 가까운 결론에 다다랐다.
결코 패배할 수는 없다는, 그러나 이 판이 과반수 찬성제로 넘어간다면 본인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데 마레 추기경이 씹어 삼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때 프라베르티 추기경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 “예하. 보르고냐 추기경께서는 본인이 법황에 등극하시게 되면 이 모든 흑마술 사태를 불문에 부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