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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428화 (731/733)

<제428화> 나의 쓸모

흑마술 사태를 없던 일로 하겠다는 프라베르티 추기경의 말에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들었다.

- “예?”

- “보르고냐 추기경께서는, 데 마레 추기경 예하께서 협조해주신다면 말이지만, 이번 흑마술과 관련된 일체의 발고를 다 덮으실 생각이 있으십니다.”

이건 한 번 들어보기는 해야 하는 제안이었다.

결국 데 마레 추기경은 노 추기경, 카스텔루헤얄의 로드리고 보르고냐와 대면 만남을 가졌다.

- “어려운 발걸음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 예하.”

보르고냐 추기경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인자하게 웃으며 데 마레 추기경을 맞이했다.

그는 이번 법황 선출의 기회를 늘그막에 온 깜짝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드시 자기가 무엇을 얻어야 한다,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자기 확신이나 집권의 당위, 타인에 대한 피해의식이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

노 추기경은 예의를 깍듯하게 지켰고 협상의 디테일에 있어 아주 유연했다.

그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흑마술 발고를 일체 불문에 부칠 것을 확약했고, 데 마레 추기경이 이를 믿을 수 있도록 적절한 보증도 세웠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건은 결코 데 마레 추기경에게 후하지만은 않았다.

- “자리는 비켜 주셔야겠습니다.”

- “⋯⋯그렇다면 후임은⋯⋯.”

- “그 부분에 있어서는 추기경 예하의 의견을⋯⋯.”

그들은 단둘이 세부 사항을 오래 논한 후 결론을 냈다.

보르고냐 추기경과의 대타결 이후,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를 따르는 파벌을 따라가 이 내용을 전달했다.

- “⋯⋯미안하게 되었네, 다들.”

이러한 정리 후, 콘클라베 스무날째의 막이 올랐다.

- “보르고냐 20, 아르칸델레 5, 기권 2.”

그다음 날 아침 투표는 위와 같았다. 급변한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란 아르칸델레 추기경은 회의 직후 보르고냐 추기경과 독대에 들어갔다.

그는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나절에 드디어 보르고냐 추기경 측과 아르칸델레 추기경 사이에서도 마지막 조율이 이뤄졌다.

그날 오후 투표에서 최종 결론이 났다.

- “보르고냐 만장일치!”

스물일곱 명의 추기경들이 각자 다른 의미의 탄식을 내뱉었다.

누군가는 자유의 몸이 된 것이 기뻐서, 누군가는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누군가는 몸이 고생스러워서, 누군가는 감격스러워서.

- “고생 많으셨습니다.”

- “새로운 법황께 영광 있으리!”

* * *

“⋯⋯그렇게 됐다.”

데 마레 대저택에 돌아온 추기경은 눈을 감았다. 삽시간에 20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는 내심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두려움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식이었다. 다 큰 자식은 언제나 어려웠지만 단순히 그 문제는 아니었다.

‘이 애가 나한테 바라는 건 무엇이었을까.’

데 마레 추기경은 항상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

돈, 사치품, 선생, 인맥, 기회, 무어가 됐든 좋은 것들은 추기경으로부터 자녀에게로 편면적으로 흘러 들어갔다.

거기에 살뜰한 배려나 애정이 없었다는 반성적 고려가 의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 진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사벨라는 아버지가 자기에게는 관심이 없다며 절규했었고 아리아드네도 아버지의 사랑에 의구심을 품었다.

관심과 사랑이 도움이 될 거라는 건 자명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돈에 추가로 얹힌 애정을 좋아하리란 것과는 별개로, 돈이나 이득 없이 애정‘만’ 주는 걸 좋아할지 여부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네 쓸모가 뭐냐고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는 딸을 위한다는 마음에 보르고냐 추기경 측, 이제는 유스티아누스 8세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족을 구하기 위한 결단이었으나 생각해보니 막상 그 딸은 그더러 법황 되어서 자기 혼삿길을 탄탄히 다져달라고 당부하고 보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고, 뒤이어 후회가 물밀듯이 닥쳐왔다.

공포에 질려 눈을 감은 추기경의 귓전을 젊은 딸아이의 목소리가 때렸다.

“바보 아니에요?”

‘법황이 될 기회를 던져버린 바보? 자식 꽃길 걷게 해줄 기회를 두려움 때문에 차 버린 바보?’

스무날 동안 상해버린 몸에 한기가 들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른 채였다.

그러나 뒤따른 건 매서운 질타가 아니라 따스한 사람의 온기였다. 딸아이가 그를 껴안은 것이다.

“진짜!”

초겨울의, 냉한 기운이 바람에 섞여 불기 시작한 산 카를로의 날씨 사이에 피부에 와 닿은 한 줄기 온기는 마법 같았다.

마치 현실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는 의미다.

“그걸 뭘 스무날씩이나 버텨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는 까랑까랑했다. 그러나 추기경은 분명히 그 안에 서린 물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일주일 지나면 난방도 안 때 주고 물이랑 빵만 준다면서요!”

마음 터놓고 상의할 사람도 없는 콘클라베 내부에서 데 마레 추기경이 공포로 떨며 홀로 견뎠을 생각을 하니 늙은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법황 자리, 정확히는 상승 그 자체에 대한 데 마레 추기경의 집착을 기억했다.

이번 생에서라고 그의 권력욕이 식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생의 데 마레 추기경은 바야흐로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그의 권력욕은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서려는 차원의 욕망이 아니었다. 그거보다 더 본질적이었다.

그는 그저 나아지지 않는 삶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상승하지 않는 본인은 쓸모가 없는 사람인 양.

“그냥 바로 주고 나오지, 그게 도대체 뭐라고!”

아리아드네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권력을 향한 욕망과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내적인 갈등 끝에 오늘의 선택을 한 것이다.

쉬웠을 리가 없다. 추기경의 폭삭 늙어버린 얼굴이 그의 마음고생을 대변했다.

똑같은 녹색 눈 두 쌍이 마주했다. 늙은 홍채에 두려움이 있었다면 젊은 홍채에는 그득한 진심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숨을 두 번 들이쉴 시간이 지난 순간, 데 마레 추기경은 그만 왈칵, 눈물을 터트려 버렸다.

그는 채신머리없게도 한참 어린 딸에게 안겨 펑펑 울었다.

그러나 이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후련함, 반가움, 고마움, 그리고 드디어 다 끝났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성공 가도에서 떨어졌다. 이제 그는 그만 달려도 되었다.

* * *

- “새로운 법황은⋯⋯. 유스티아누스 8세 성하!”

이 말은 새로운 시대 개막의 선언이자 이폴리토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광장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폴리토는 허공에 어퍼컷을 해 보였다.

‘이거지!’

광장은 기뻐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새로운 법황이 무사히 선출되었음에 대한 감사였다.

이폴리토처럼 내기에서 승리한 기쁨에 취해 있는 사람은 없었으나 인파는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이었다.

이폴리토는 자기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새 법황 선출 소식을 확인한 후 곧장 잰 발걸음을 놀렸다. 베비치 주교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베비치 주교는 치리아니 교구의 목회자였다.

치리아니 교구는 산 카를로의 서남쪽에 붙어 있었지만 엄연히 독립된 교구로, 그 말인즉슨 이폴리토가 상당히 많이 이동해야 했다는 말이다.

곤궁한 사정으로 말까지 다 팔아버린 바람에 노새를 빌려 타고 왔으나 이폴리토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이봐.”

베비치 주교에게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지은 공을 치하받아 한 몫을 쪼개 받으면⋯⋯! 이제는 그와 제대로 척을 졌을 데 마레도 끈 떨어진 연일 테니 그의 승진을 가로막는 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치리아니 교구의 문지기가 그의 부름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이봐!”

이폴리토는 성이 났으나,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수행한 몫은 베비치 주교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수 있을만 한 기여가 아니었다.

비밀스러운 임무였다. 일종의 스파이 같은. 문지기 같은 하급 사용인한테 본인에 대해 알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암, 그렇고말고.

“이봐. 베비치 주교님을 만나러 왔어.”

문지기는 별 웃기는 놈 다 보겠다는 듯이 이폴리토를 바라보았다. 이폴리토는 그 노골적인 경멸에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냈다.

“야, 내 말 안 들려? 문이나 지키는 새끼 주제에⋯⋯! 베비치 주교를 만나러 왔다니까!”

문지기가 뒤늦게 진력해서 이폴리토를 쳐다보았다.

벽에 기대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는데 똑바로 선 걸 보니 생각보다 덩치가 좋아서 이폴리토는 순간 겁을 먹었다.

한낱 문지기에게 이폴리토가 압도된 것은 순전히 덩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지기는 분명히 얼굴 가득히 이폴리토를 하찮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씨. 좋은 말 할 때 돌아가라.”

“이, 이⋯⋯!”

이폴리토는 뭐라고 화를 내려다가, 문지기의 기세에 압도된 나머지 공손하게 물었다.

“베비치 주교님 안 계시냐⋯⋯고 묻지 않습니까.”

문지기는 하찮은 무언가를 보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주교님 갈렸어.”

“예?”

이폴리토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위에서 사람 내려와서, 주교님 어디로 끌려가시고 지금 사제장님이 주교 대리 하고 계신다고.”

데 마레 추기경이 보르고냐 추기경, 아니, 법황 유스티아누스 8세와 승부를 본 건 바로 이 부분에서였다.

유스티아누스 법황은 추기경의 흑마술을 덮어주는 구체적 방안으로 발고를 들고 온 베비치 주교를 아예 면직시켜버리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에 따라 콘클라베가 종료하자마자 성황청 내사원 직속 규율관이 새벽에 들이닥쳐 베비치 주교의 사지를 잡아서 끌고 나갔다.

새 법황은 흑마술의 ‘흑’자도 나오지 못하게 이 고발과 관련 있는 사람들을 확실히 솎아내기로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문지기는 이죽이죽 웃으며 이폴리토를 비웃었다.

“그렇게 위세 좋게 베비치 베비치 하던데, 베비치 주교 친척이라도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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