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화> 인간사 모두 새옹지마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열과 성을 다한 위로 끝에 머리를 깨끗하게 비우고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알폰소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고민 있을 땐 운동이 최고지?”
그녀는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이거 운동이었어?”
“운동이 안 돼?”
알폰소는 치아가 하얗게 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번엔 자기가⋯⋯.”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새빨개져서 알폰소의 팔을 짝! 때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저렇게 잘못한 거 하나 없다는 듯 해맑게 웃는 게 제일 얄미웠다. 알폰소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생각하지 마.”
그런 의미에서 운동은 가장 좋은 처방이었다.
“단순하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지내면 돼.”
“으응⋯⋯.”
그녀가 자발적으로 운동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아주 많이 시켜줄 작정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알폰소의 품에 안긴 채 과연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제 곧 추기경 직위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그 말인즉슨 이 대저택도 비워 줘야 한다는 뜻이다.
이 집은 서까래 하나 기둥 하나 다 데 마레 추기경의 손길을 거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관저였다.
알폰소가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다 잘 될 거야.”
그녀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으나 굳이 거기에 반박하진 않았다.
순전히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모처럼 차려입고 수하들까지 전부 끌고 나타난 남자였다.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다만 저택을 비워줘야 하는 것도 아는 남자가 어쩜 저렇게 속 편한 이야기일까, 라는 생각에 약간 짜증이 올라왔다.
아리아드네는 싸움을 거는 대신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똑똑.
그때 문에 조심스러운 노크가 있었다.
“백작님, 산차입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지금 밖에서 급하다고 해서요.”
아리아드네가 안에서 허겁지겁 걸칠 거리를 찾았다.
나오라는 주인은 나오지 않고 우당탕 부스럭대는 소리만 들리자 대충 상황을 파악한 산차가 얼굴을 붉힌 채 밖에서 용건만 전달했다.
“그냥 여기서 말할게요! 왕궁에서 추수 감사 무도회에 참석 여부를 확답 달라고 하는데요.”
“뭐? 초대장이 온 게 없는데?”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서 초대장이 안 왔다고 했는데⋯⋯.”
레오 3세의 관리들은 막무가내였다.
“올해는 예전처럼 왕궁에서 초대장을 보내고 거기에 대한 가부의 답장을 받는 게 아니라, 백작위 이상 가문은 반드시 참석이고 참석하지 않을 가문은 빠진다고 본인들이 따로 통보하라네요.”
산차의 곤란함이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지금 현관에 왕궁 관리가 와서 서 있어요. 지금 당장 확답을 달랍니다. 어쩌죠?”
산차도 이제는 제법 잔뼈가 굵은 관리직이었다. 웬만한 상황은 그녀 선에서 처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 관리들이 쳐들어와서 어깃장을 놓는 사태는 처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들은 바 있느냐는 눈으로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알폰소는 아버지의 기행에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 이건 엄밀히 따지자면 레오 3세의 고약함에 그 수하들의 무능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었다.
최근 수도에서 지내던 귀족들이 가문의 영지로 내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대역병시대를 거치며 일어난 일이었지만 흑사병이 잦아든 다음에도 그들은 귀도(歸都)하지 않았다.
대귀족들은 대영주를 적대하는 레오 3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귀향 행렬의 선봉에 섰다.
우나이솔라의 자유도시 선언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의 세력권에 들어있는 중소귀족도 뒤를 따랐다.
그리고 사실 우나이솔라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레오 3세는 다종다양한 방면에서 꾸준히 점수를 잃었다.
대역병을 핑계로 내려가 아직까지 귀성하지 않고 버티는 중인 살바티 후작, 와병을 이유로 내려간 구아티에리 후작, 노환을 사유로 댄 몬테펠트로 노후작까지, 수도를 떠난 자들이 각양각색의 결을 지닌 사람들인 것만 봐도 그랬다.
지금 수도에는 지방에 영지가 따로이 없는 궁정귀족을 제외하면 항시 거주 중인 귀족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그렇다고 수도에 남은 자들이 레오 3세에게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다.
국왕과 얽히기만 하면 귀찮은 일만 생긴다는 걸 깨달은 귀족들은 시집보내야 할 딸이나 반드시 만나야 할 사업 파트너 같은 급한 현안이 없다면 큰 모임에 나오지 않으려 들었다.
남자들은 시음회, 여자들은 티파티에서 삼삼오오 모였다.
이렇게 국왕이 개최하는 무도회의 인기는 퍽 떨어진 상태에서, 레오 3세는 아랫사람들에게 ‘이번 추수 감사 무도회에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고 콘타리니 백작이 빠지고 마르케즈와 발데사르가 모두 바쁜 상황에 혼자 독박 쓴 델피아노사 경만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일손이 모자란 델피아노사 경은 그만 아랫사람들에게 정제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던져 버렸다.
레오 3세로부터 옮아 버린 고약한 버릇이었다.
- “무조건 오는 거고 안 오는 사람이 따로 통보해야 하는 걸로 바꾸면 어때?”
이걸 국왕의 무능한 스태프는 그냥 초대장조차도 없이 안 오면 끌고 갈 기세로, ‘불참하면 찍힐 테니 알아서 해라’를 뿌리라는 이야기로 해석해 버렸다.
평범하게 초대장을 보낸 후 ‘참석하실 예정이시면 답장을 보내 주십시오’를 ‘참석하지 않으실 예정이시면 답장을 보내 주십시오’ 정도로 쓸 생각이었던 델피아노사 경은 바빠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블체크할 시간이 없었고⋯⋯.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었다.
“⋯⋯안 간다고 해도 뭐 끌고 가거나 하진 않을 거야.”
아리아드네가 참말이냐는 얼굴로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알폰소는 한숨을 쉬며 산차에게 대신 대답했다.
“특이점은 없네!”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눈으로 물었다. ‘불참할 예정은 아니었지?’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남들과 다른 짓을 해서 눈에 띌 생각은 없었다. 알폰소가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간다고 전해.”
아리아드네는 약간의 불안감에 휩싸여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알폰소는 침대 시트만 두른 아리아드네를 지그시 마주 쳐다보았다.
홑겹 시트는 몸의 굴곡을 따라 유려하게 흘렀다.
극적인 음영을 지나 쏙 들어간 허리를 넘어 시트가 갈라진 틈 사이로 아리아드네의 늘씬한 넓적다리가 드러났다.
알폰소는 입맛을 다셨다. 침대 시트가 아무리 얇다고 해도 드레스 원단보다는 두꺼울 텐데, 괜찮으려나.
“⋯⋯아무한테도 보여주긴 싫은데.”
그는 거위 털 이불을 당겨 그녀의 턱 바로 밑에까지 덮어버렸다. 궁중에서 여자들이 입는 드레스도 거위 털 이불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일은 해야 하는 거니까.”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슬슬 궁정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우리, 이제 왕자궁으로 들어가서 살자.”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덮고 있던 거위 털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 * *
아고스토는 찌뿌둥한 표정으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또, 그 꿈이었다.
- ‘아흐살 알리하.’ (그녀를 가져.)
꿈에서는 해사하게 웃는 이사벨라가 나왔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의 창을 들여다보면서 웃었다. 현실의 이사벨라와 사뭇 달랐다.
그가 실제로 만나는 이사벨라는 뾰로통한 얼굴로 살았으며 아고스토, 아니, 아키-릴루를 대할 때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을 표출해서가 아니라 침대, 의자, 아고스토, 문짝, 저녁 스튜 같은 중요도로 그를 대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고스토보다 저녁 스튜가 더 앞이다.
‘그녀를 가지라고? 어떻게?’
그러나 이 꿈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 예지몽은 언제나 옳았다.
고국에서 신을 모시는 사제였던 그는 차기 제사장에 가장 가까운 남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키-라운, ‘신의 눈동자’로 암하라 부족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그의 가문은 8대를 이어서 제사장을 지냈다.
아키-릴루 역시 ‘신의 지팡이’로, 계시를 받아 부족을 이끄는 자였다.
그런 그가 무어 제국을, 암하라 부족을 떠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꿈이 속삭였다.
- ‘가더, 엘리옴.’ (떠나, 오늘.)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력한 계시였다. 반신반의하며 그가 수도를 떠났던 날 그의 대적자가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적자는 그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는 꿈에게 반문했다.
‘그가 나를 죽일 운명이었나?’
꿈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고스토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서 아고스토는 그 대적자를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부족으로부터 도망쳤다.
이번 생의 그는 아버지를 희생한 대신 부족으로 돌아갈 길이 트였다.
꿈은 그였고, 그가 꿈이었다.
아고스토, 아키-릴루는 지난 생에서 그가 획득하지 못했던 성공을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손아귀에 넣을 작정이었다.
본인 스스로마저 그 도구로 사용해서 말이다.
* * *
아리아드네는 오랜만에 만난 무녀 할머니에게 불평했다.
“그래서, 당장 짐을 싸서 왕자궁에 들어가자지 뭐에요!”
지금 왕자궁에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왕자궁에 가면 손에 주술을 걸어줄 무녀 할머니를 주기적으로 만나는 일이 훨씬 까다로워진다.
갈리코 루이 왕자의 숙소를 어디로 할 것이냐의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부수적인 일이었다. 일단, 외간 여자의 왕자궁 거주 목적을 뭐라고 밝히는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할머니는 흥미 가득한 얼굴로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그래서, 들어가겠다고 했어?”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무어인 할머니한테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바로 아는 체였다.
무어인 할머니가 그게 무엇이 되었건 항상 ‘나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다’며 거드름을 피우던 거에 꽁해 있던 아리아드네는 받아쳤다.
“천-치-신-미영을 다 아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리아드네는 할머니가 가르쳐 준 ‘천지신명’이라는 단어를 에트루스칸어 특유의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할머니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인생이 그렇게 날로 먹어지는 건 줄 알아?! 천지신명 그렇게 부르지 마!”
“아, 천-치-신-미영은 뭐든지 다 알고 신통방통하다며요! 계피 안 먹어보고도 무슨 맛인지 안다면서요!”
“그거랑 달라! 이해가 안 되면 응용도 하지 마! 무식한 녀석!”
무녀 할머니는 투덜투덜 불평불만을 읊조리며 오래된 절구로 활석 조각을 갈아서 입자 고운 가루를 만들었다.
할머니가 제대로 삐진 것 같자 아리아드네는 찔끔, 겁을 먹었다. 그녀는 화해를 청하는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이스마엘은 잘 지내요?”
이스마엘은 할머니의 손주가 중앙대륙에 와서 새로 지은 에트루스칸 식 이름이었다.
손주 이야기가 나오자 할머니는 대번에 얼굴에 화색이 돌아 손주 자랑을 시작했다.
“학교에선 셈이 가장 빠르다고 해. 운동도 잘하고 칼치오도 잘 차지!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서 아주 집이 북적북적해.”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법도 있는 법이다. 손주는 발라사-오르도의 언어를 잊었고 언어를 제외하더라도 이제 할머니와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속삭이는 선조들과 땅귀신들의 이야기에도 무관심했다. 과거에 사는 할머니와 다르게 새로운 색목인들의 땅에 완벽하게 적응해 버린 탓이다.
아리아드네는 이스마엘의 소식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잘됐네요! 이스마엘이 운동 잘하는 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스쿠올라 데 그레타에서 제일 칼치오를 잘 찬대요.”
“그래?”
“부기보다 운동에 더 재능이 있으면 견습 기사 쪽을 시켜 볼까요?”
“⋯⋯즐거우면 된 거지.”
소년이 된 아이는 축구 대장이 된 사실에 심취해서 중앙대륙의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되고팠던 예전의 소원을 까먹었다.
슬픈 일이지만 노파가 원했던 일이었다. 세상에 일장일단이 없는 일은 없었다.
기사를 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애가 좋아한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노파는 툭, 위로의 말을 던졌다.
“아버지 일도. 너무 낙담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