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 2 이벤트 관리과
2178년 3월 4일.
푸른 들판 한 가운데 수천 여명의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진 채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한 쪽은 (주)테이머에서 만든 가상 현실 멀티유저 게임인 라크세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길드인 블러드 나이츠였고, 또 다른 한 쪽은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블러드 나이츠를 무너트리기 위해 뭉친 길드 연합 윈드였다.
잠시 후, 양쪽 진영에서 깃발을 든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길드 연합 윈드의 임시 마스터 '에디크'와 블러드 나이츠의 길드 마스터 '다이'였다. 길드 워(Guild War) 시작 전의 상견례인 셈이다.
양 진영 사이의 빈 공간. 그 중앙에서 딱 마주친 두 사람은 묵묵히 말을 멈춰 세웠다.
나란히 서자 둘의 외모가 정말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확 느껴진다. 에디크는 은빛 풀 플레이트 메일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정의의 기사 같은 모습인 반면. 다이는 붉디붉은 로브에 거대한 낫을 비껴 들고 있는 어둠의 사신 같은 모습이니 말이다.
긴장감 어린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길드 연합의 에디크였다.
"난 길드 연합 윈드의 임시 마스터를 맡은 에디크다. 오늘 워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서로 깨끗이 ."<."
한없이 진지한 태도의 에디크와 달리 다이는 장난스런 미소를 빙글거리며 대꾸했다.
"그 쪽만 승복해 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수십 번 깨졌으면서도 질리지도 않고 계속 덤비는 것은 그 쪽이잖아?"
"난 아니다."
"그래. 저번에 그 쪽 마스터는 성녀 루나였지. 하지만 똑같은 길드끼리 또 뭉친 거잖아. 마스터만 바뀌면 다냐?"
"......"
에디크도 그 점이 좀 찔리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이는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길드가 조금. 아주 쬐금 악명을 떨쳤기로서니 거의 매주 길드 워를 신청하다니. 너무한 것 아냐?"
에디크는 당장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걸 조금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블러드 나이츠의 악명은 드높기 그지없다. 자신들이 점령한 도시에서는 거의 80%나 되는 엄청난 세금을 물리고, 도시 주변의 사냥터 독점에 던전마다 통행료 징수원을 세워 엄청난 통행료를 물린다.
게다가 길드에 거역하는 자는 PK에 납치, 감금, 협박조차 주저하지 않으며, 거역하는 길드는 그 날로 바로 박살을 내버렸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저주와 두려움을 느낄 만한 것이 블러드 나이츠인 것이다.
그야말로 폭군, 폭정이랄까.
그런 악명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블러드 나이츠에 가입하길 간절히 원하고, 맹목적으로 다이를 따르는 것은 순전히 그가 가진 강렬한 카리스마 때문이었다. 그의 저돌적인 과감함과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결단력, 상쾌하다 못해 통쾌하기까지 한 행동성에 모두가 매료된 것이다.
극악(劇惡)한 성품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와 유머를 잃지 않는 유쾌한 사신. 그게 바로 다이였다.
"약간이잖아. 그 정도야 뭐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여전히 장난기 어린 태도를 고수하는 다이에게 에디크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잉~ 냉정해."
"......"
난데없이 튀어나온 다이의 애교에 에디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원해서가 아니라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그렇게 된 그였다.
사실 그는 다이를 직접 만난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저 그 지독한 악명만을 들었을 뿐. 그 악랄하기 그지없는 블러드 나이츠의 길마가 이런 성격일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다이를 향해 블러드 나이츠의 부길마인 로이드로부터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반투명한 창이 눈앞에 떴고 다이는 차분히 그 것을 읽어 내려갔다.
[적당히 하시죠. 다이님. 또 장난쳐서 상대방 엿 먹이셨죠? 여기서도 저쪽 길마가 굳어버린 것이 다 보이네요.]
다이는 바로 답변을 날렸다.
[시끄러워. 내 사소한 즐거움을 방해하지마.]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저도 없는데 말입니다. 여기 잔뜩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생각도 좀 해주시죠. 저번에 나온 여자 길마도 다이님이 속을 벅벅 긁어놓는 바람에 제대로 지휘도 못하고 광분해서 날뛰다 죽었지 않습니까. 우리도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해봅시다. 네? 항상 허무하게 이겨버리니 어디 손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어야지요.]
다시 돌아온 로이드의 메시지를 다 읽은 다이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길마는 이렇게 열심히 확실한 승리를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부길마라는 놈이 태클을 거니 속이 좋을 리 없는 것이다.
[그래. 이 녀석들이야 껌이니 어디 멋대로 날뛰어 봐라. 대신 나중에 둘이 면담 좀 하자.]
순간 로이드는 메시지를 날린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의 주군 다이의 면담이란 것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가 막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날리기도 전에 다이의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과 안 받는다. 도망가면 죽을 줄 알아.]
"......"
로이드의 정신은 그대로 아득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에디크."
어느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싹 지워버린 다이는 아직도 굳어있는 에디크의 어깨를 낫으로 툭툭 쳤다. 그러자 에디크는 부르르 몸을 떨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다이는 싸늘하게 웃었다.
"싸워야지?"
이제야 좀 블러드 나이츠의 사신답다는 생각을 한 에디크는 검을 뽑아 들었다. 다이 역시 낫을 앞으로 내밀었고 둘은 서로의 무기를 엇갈려 맞댔다.
이 두 무기가 떨어지는 순간이 바로 길드 워의 시작이었다.
"좋은 승부를 바란다."
에디크의 말에 다이는 그가 정말 고지식한 사내라는 생각을 했다. 맞장구를 쳐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는 그고 다이는 다이였다.
"박살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