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8화 (8/74)

1. 제 2 이벤트 관리과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잠깐의 교육 시간이 지나고 지원은 아버지에게 롤플레잉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간단히 그 요구를 묵살한 승익은 지원에게 조기 퇴근을 명했다.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부터 새로운 부서로 출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세한 얘기?거기 가서 들으라고 덧붙였다.

그 결과 거의 쫓기듯 (주)테이머의 본사 건물을 나온 지원은 어리둥절함에 머리만 긁적이며 집으로 향했다.

그의 어머니는 외출이라도 한 모양인지 집에서 그를 반겨주는 것은 저택의 총체적인 관리를 맡고 있는 하급 A.I였다.

[어서 오십시오. 지원님.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커피."

간단히 대답한 지원은 곧장 자신만의 공간인 2층으로 올라섰다. 곧 커피가 배달되었고 지원은 소파에 기대앉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가 잘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너무 좋은 조건에 혹해 아무 말도 못했는데 사실 딱 잘라 거절하고 일반 플레이어로 돌아오는 것이 刮?좋았을지도 모른다.

"안 맞으면 그만 두면 되는 일이지. 사표를 안 받아주면 쫓아내도록 큰 사고를 쳐버리면 되는 거고. 후후."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지원이었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는 아직 뜨거운 커피를 홀랑 마셔버리곤 넷룸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는 백수가 아니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길드를 운영하긴 힘들거라 생각되었다. 라크세인 제일의 길드 블러드 나이츠는 어쩌다 한번 접속하는 것으로 유지하기엔 너무 거대했고 또 적이 많다. 결국 길드 마스터 자리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원은 현재의 부길마인 로이드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아니다. 2인자의 자리에는 너무나 잘 어울릴지 몰라도 마스터 감은 아닌 그였다. 대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원은 길드 서열 3위인 미레느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니다. 악명 높은 블러드 나이츠의 길마가 빛의 성직자라는 것도 우습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너무 물렀다. 아마 길드를 맡긴다면 일주일 안에 말아먹고 말리라.

그 후로 지원은 몇몇 인물들을 더 떠올려 보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이가 없었다. 블러드 나이츠를 너무 크게 키운 것이 실수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그냥 로이드에게 떠맡겨 버려도 되었는데 말이다.

"후. 결국 해체밖에 길이 없나?"

그가 키워놓은 길드가 이대로 다른 길드에 먹혀버리거나 밟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명성이 높을 때 깨끗이 해산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러면 불패의 신화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가장 오래 여러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에 남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결심한 지원은 잠시 넷 서핑을 즐긴 후 캡슐 안에 몸을 뉘였다. 아주 미세한 저림이 느껴지고 지원은 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어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라크세인."

게임 이름을 말하자 곧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며 익숙한 그의 길드 성 집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 인식과 자동 로그인.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이 자동이다.

지원의 분신인 다이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아주 원만하게 길드를 해체할 수 있을까를 고민중인 것이다.

만약 그가 그냥 길드 해체를 선언한다면 수천 명의 길드원들이 그의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지도 몰랐다. 뭔가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들이 수긍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그냥 취업했어!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직장, 혹은 학교를 다니며 게임을 즐기는 사람도 많으니 그런 이유는 수긍되지 못할 것이다. 길드라는 것이 그런 사람들의 캐릭터처럼 몇 일에 한번. 잠깐의 접속만으로 유지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똑똑.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다이의 귀에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것은 제피. 마법사단을 맡고있는 미녀다. 여성 유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다이를 대놓고 싫어하기로 유명한 여자이기도 하다. 다이는 그 이유가 자신이 그녀의 애인과 정반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녀의 애인은 바로 이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크리스라는 차분한 느낌의 성직자였다.

"무슨 일이지?"

제피는 아무말없이 들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어제의 길 워로 입은 마법사단의 피해상황을 알리고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문서였다. 다이는 참 말을 아끼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때 문득 다이의 머릿속에서 무척 황당한 하나의 생각이 스쳐갔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길드 마스터.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연인이 있고 더구나 바로 그의 수하다. 다정한 둘을 매일 보면서 뜨거운 질투의 불길에 자신의 심장을 태우는 길드 마스터. 그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냉정히 거부한다. 실연의 아픔을 이誰?못한 길드 마스터는 길드를 해체한 후 이 세계를 떠난다.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빌면서.

한 편의 소설이랄까. 미담이랄까. 애틋한 무언가가 절절히 느껴지는 스토리다. 만약 이런 이야기가 유저들 사이에 퍼진다면 길드 해체의 합리화는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영 기억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고로 명성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다이는 눈앞의 제피를 빤히 쳐다보았다. 애인도 있고 그를 싫어하는...... 가장 적절한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점점 그 스토리를 실행하는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그였다.

원래 다이. 즉 지원 자체 성격이 좀 이렇다. 예측 불허. 이해 불가. 엽기 발랄. 이 세 가지 단어로 표현될 수 있으며, 애초에 누군가를 속이거나 괴롭히는데 죄책감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바로 다이가 그런 인간이다.

"제피."

다이는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의자에서 일어나 섰다. 언제나 그의 입가에 머물던 장난기 어린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한없는 진지함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네?"

제피는 의아한 시선으로 다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무척 따듯하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나...... 너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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