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27화 (27/74)

3. 누구를 위한 운영자인가

2178년 10월 17일.

삼일만에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출근한 지원. 그는 과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 앞에 앉더니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아버지와 라크세인, 블러드 나이츠, 그리고 에피소드와 EM. 집에서도 내내 생각했지만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생각 같아서는. 그리고 성격대로라면 라크세인에서의 일이 알려지던가 말던가 그냥 멋대로 하고 싶었다. 그를 협박해서 억누르려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싫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회사에서 해고되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은 지원이다.

하지만 단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욕이야 그동안도 많이 먹어봤으니 별 상관없었지만, 만약 진실이 알려지면 '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다는 것 때문이다. 결국 자존심 문제랄까. 아버지한테 굽히기도 싫고. 그 일이 알려져서 라크세인 유저들에게 망신살이 뻗치기도 싫다는 얘기다.

그러니 어서 빨리 결론을 내긴 해야 했다. 이게 아니면 저 것. 굽히느냐. 망신당하느냐. 아니면......

[지원님. 안 현주님으로부터 화상 연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지원은 문득 들려온 엠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안 현주? 난 그런 이름 모르는데. 엠. 그 요청 어디서 들어온 거야?"

[롤플레잉 프로젝트팀 운영부 소속. 온라인 운영과의 안 현주님이십니다.]

온라인 운영과. 바로 게임 내에서 활동하는 GM들이 속해있는 과다. 지원은 왜 거기서 연락이 왔는지 의아해했지만 굳이 거부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연결해."

곧 책상 위에 안 현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인은 아니지만 동글동글한 얼굴이라 인상이 참 좋아 보인다. 그녀는 지원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서 과장님. 온라인 운영과의 안 현주라고 합니다. GM 로이니아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그녀의 인사를 듣는 듯 마는 듯한 지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현주는 조금 미안한 듯 웃으며 말을 끊었다 다시 천천히 이었다.

"바쁘신 것은 알지만 이벤트를 하나 부탁드리기 위해서예요."

"이벤트요?"

"네. 제가 방금 전에 상담한 유저분께서 기분이 상당히 안 좋으신 듯 해서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이벤트로나마 기분을 좀 풀어드렸으면 해서......"

지원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는 이벤트를 열 상황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생각의 정리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바빠서 안되겠습니다."

지원이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자 현주는 간절한 표정으로 재차 부탁했다.

"그냥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러니까 한 십분. 아니, 오분만에 끝나는 거라도 좋으니까 한번만 해주시면 안될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일이 좀 있어서요."

"서 과장님. 한번만 부탁드릴게요. 네?"

지원은 현주가 왜 저렇게까지 간절하게 부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GM 으로 직접 활동해 보지는 않았지만, EM 업무 파악 중 GM 활동일지를 연구한 적이 있기에 지원은 GM과 유저의 불편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GM을 부를 정도면 대부분 기분 좋은 일보다 기분 나쁜 일 때문인 경우가 많다. 버그 신고나 불법 플레이어 신고 등의 각종 신고. 사기나 PK. 욕설. 각종 요청 등. 하지만 이 중에서 실질적으로 GM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적기 때문에 GM과의 상담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유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또한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직원이란 이유만으로 항의와 욕설이 시달려야 하는 GM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상한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항의나 듣고 유저에게 사과하는 일이 업무 대부분인 GM이 유저를 위해 이벤트를 부탁한다? 그 것도 생전 알지도 못하고 나이까지 어린 상급자에게?

"그 유저에게 무슨 실수라도 저지르셨나요? 그래서 수습하기 위해 이벤트를?"

지원의 물음에 현주는 금새 뾰로통한 얼굴이 되었다. 그 눈에 띄는 표정 변화에 지원은 그녀가 상당히 솔직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실수라니요. 다른 것은 몰라도 전 제가 담당한 유저분들만은 항상 즐겁게 에피소드를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라고요."

지원은 순간 머릿속에 어떤 하나의 생각이 휙 스쳐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워낙 빨리. 희미한 윤곽만이 스쳐 지나갔기에 뭐라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유저가 GM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대뜸 지원이 그렇게 묻자 현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아, 네. 사실은 그 분이 아이템 사기를 당하셨는데요. 증거도 없고 또 아시다시피 GM 규칙상 그런 게임 상의 본인 실수를 해결해주지는 못하게 되어 있어서요. 그냥 사과만 하고 끝내긴 했는데. 아직 어린 유저시고 또 V.M.G 초보이신데 그런 일을 당하셔서 참 안타까웠답니다. 그래서 기분이나마......"

그제야 지원은 순식간에 스쳐간 생각의 윤곽을 더듬어낼 수 있었다. 유저와 운영자의 관계. 회사와 유저의 관계. 또 운영자와 회사의 관계까지. 거기에 진영이 조언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대입해보자 망신도, 아버지에게 굴복한 것도 아닐 수 있는 꽤 괜찮은 결론이 나왔다. 그 痼?그도 유저도 즐거울 수 있고 또 회사도 나름대로. 어디까지나 나름대로 이익을 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해보죠."

지원의 승락에 현주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어머. 정말요? 감사합니다. 서 과장님."

지원은 도리어 고민의 돌파구를 찾아준 현주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 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까.

"그 유저의 어카운트 넘버를 알려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지금 텍스트 메시지로 보낼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부탁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EM이나 GM이나 유저의 즐거움과 서비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

기분 좋게 웃으며 태연히 그렇게 말하는 지원. 역시 언제나 말은 번드르르하다.

"와, 저와 생각이 비슷하시네요. 다음에 제가 한번 찾아뵙고 커피라도 대접할게요."

"기대하겠습니다."

"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현주의 인사를 끝으로 홀로그램이 사라지자 지원은 표정을 180도 바꿨다. 부드러운 미소에서 싸늘해 보이는 미소로 말이다.

"그래. 유저를 위한 EM이지. 굳이 회사를 위할 필요가 없잖아? 훗."

지원이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그의 중얼거림 그대로. 회사를 위해 존재하는 직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저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EM이 되겠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굽히지도 망신당하지도 않는 결론이 되느냐고 묻는 이도 있으리라. 그건 두고 보면 안다.

푸른 들판 한 가운데. 아무도 없는 그 곳에 주저앉은 채 멍해있는 한 소년이 있다. 에피소드 내에서의 이름은 레오넬. 올해 나이 열 다섯의 초보 게이머다.

방금 전 그는 생애 처음으로 접한 V.M.G에서. 역시 생애 처음으로 사기를 당해 멍해 있는 상태였다. 게임 내 시스템 중에 교환창이란 것이 있고 물건을 사거나 팔 때는 그걸 이용해야만 사기를 방지할 수 있다. 허나 레오넬은 그걸 몰랐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그냥 손으?돈을 건넸고, 상대는 그 돈만 받아들고 아이템은 주지도 않은 채 도망가 버린 것이다.

돌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상대는 무시. 결국 GM 까지 불러서 상담해봤지만 전적으로 그의 부주의 탓이라는 말밖에 못 들었기에 마냥 멍하고 허탈하기만 한 그였다.

"그냥 접을까......"

남들이 보면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그러느냐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들에게는 작은 액수지만 오픈 첫날부터 고생해서 힘들여 모은 돈이기에 레오넬에게는 무척 큰돈이었다. 또 어린 마음의 상처는 컸고 그 것은 에피소드에 대한 흥미를 앗아갔다.

"성급한 결론은 금물이랍니다. 레오넬님."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레오넬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모를 황금빛 마스크와 로브의 남자가 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원. 즉 EM 다크였다.

"누. 누구? 아, 운영자님?"

다크는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EM 다크라고 합니다."

레오넬은 퉁퉁 부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랑 다른 분이군요. 근데 왜 또 오셨나요. 제 실수란 거 저도 이제 이해하는데."

"조금 전에 왔던 GM과 제가 다른 사람이듯이 할 말도 다르답니다. 실수하신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기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 법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말끔히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구입하려고 하셨던 아이템은 물론 돈까지 찾아서 돌려드리지요."

레오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갑기도 했지만 사실 믿기 힘들기도 했다.

"아까 오신 운영자님은 규칙상 절대 안 된다던데요? 스크린샷이나 동영상 녹화 같은 증거가 있어도 힘든데 증거도 없다고......"

"전 한다면 합니다. 제가 레오넬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레오넬로서는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정말이죠? 정말 되찾을 수 있는 거예요?"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레오넬을 향해 다크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탁탁 쳐 보였다.

"물론입니다. 레오넬님. 더불어 사기를 친 그 유저에게 약간의 벌까지 줄 예정입니다. 삼십 분에서 한 시간정도 걸릴지도 모르니 여유 있게 기다려주세요. 여기 안 계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셔서 딴 일을 하고 계셔도 됩니다. 기다려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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