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누구를 위한 운영자인가
루키아를 홀랑 벗기고 그 자리를 떠난 다크는 곧장 레오넬에게 이동했다.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레오넬. 그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크는 그런 그의 앞에 하이딩 상태로 선 채,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럼 어떻게 해볼까......"
루키아에게서 뺏어온 아이템을 레오넬에게 그냥 줄 수는 없다. 별다른 이유 없이 유저에게 아이템이나 돈을 줘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했다고는 하나 동영상 등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정식 사건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버그 아이템이 아닌 이상 유저의 아이템이나 돈을 뺏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도 있다. 루키아의 경우, 다크는 단지 퀘스트 스타일 이벤트를 열었고 그 퀘스트를 유저가 해결하지 못해서 잃은 아이템을 가져왔을 뿐인 것이다. 규칙을 어겼으면서도 교묘하게 어기지 않은 것처럼 만들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이벤트를 열고,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레오넬에게 돈과 아이템을 줘야 한다는 얘기다.
"엠. 이벤트 기획 목록."
곧 눈앞에 떠오른 목록을 보며 다크는 적당한 이벤트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건 좀 괴로울 테고...... 이건 성인용이고...... 이건 너무 난이도가 높고...... 으음."
한참 목록을 들여다보던 다크는 딱히 이 상황에 어울리는 것이 안 보이자 그냥 목록을 닫았다. 굳이 만들어놓은 기획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든 이벤트이기만 하면 되지 않은가.
그렇게 결론 내린 다크는 지엠 전용 툴을 불러들여 주사위 두 개와 배낭을 생성했다. 그리고 루키아의 아이템들을 모두 배낭 안에 쑤셔 넣고 엠에게 몇 가지 상황 보조를 지시한 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외모와 옷차림으로 변환하고 하이딩을 풀었다.
"앗?"
갑자기 나타난 낮선 청년의 모습에 레오넬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크는 그런 레오넬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네? 아. 안녕하세요."
엉겁결에 따라서 인사하고만 레오넬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다크는 레오넬 앞에 마주 앉으며 대답했다.
"난 페르야. 그냥 펠이라고 불러라."
"아, 네."
"심심하지 않니?"
"에? 아. 아뇨. 별로......"
레오넬의 소극적이고 경계 어린 태도에 살짝 눈살을 찌푸린 다크는 딱 잘라 말했다.
"넌 심심할 거야. 아니, 심심해야돼."
"에?"
"지금까지 심심하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는 심심한 거야. ok?"
"무. 무슨?"
"심심한 널 위해서 이 착하고 멋지고 맘씨 좋은 펠님께서 놀아주시겠다 이거다. 고맙지?"
레오넬은 뭐라 대답하지도 못한 채 입만 쩍 벌렸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허나 그가 입을 벌리든 다물든 상관없이 다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뭘하고 놀까. 어라? 내 주머니에 웬 주사위가 있네."
다크는 능청스럽게 주사위를 꺼내 들었다.
"그래. 이 주사위를 가지고 놀자. 내기를 하면 되겠다. 그치?"
레오넬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다크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무언의 긍정이냐? 알았어. 그럼 허락한 걸로 알게."
"아니, 전......"
"쉿! 가만히 있어봐. 내가 내기의 규칙을 설명할 테니까."
"그게 아니고......"
"조용히 하라니까. 주사위 놀이를 어떻게 하는 지는 알지? 던져서 높은 숫자가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내기에서 지면 서로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나 돈 중에 하나를 주면 되는 거고. 뭘 주든지 상관은 없다. ok?"
"전 그런 내기는 별로......"
"나도 나이가 들었나. 요즘 귀가 가끔 안 들린단 말야. 뭐라고 했지? 아, 당연히 한다고 했던가?"
"......"
레오넬은 이제 될 대로 되라라는 심정이 되었다. 자신의 말은 깨끗이 무시한 채 자기 할 말만 하는 그에게 질려버린 것이다. 어차피 다크가 돌아올 때까지는 할 일도 없으니, 그와 놀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페르가 바로 다크라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이어진 다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오넬에게 주사위 퀘스트가 시작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헉. 퀘스트? 그럼 아저씨 NPC에요?"
레오넬의 물음에 다크는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는 곧장 주사위를 던졌다. 나온 숫자는 3과 4. 결코 낮다고도 할 수 없지만 높은 숫자도 아니었다.
"너도 어서 굴려."
"네? 아, 네......"
레오넬은 머뭇거리며 주사위를 집어 굴렸다. 5와 5. 사실 지금 주사위는 엠이 조종하고 있다.
"졌군."
담담하게 그렇게 말한 다크는 배낭 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레오넬에게 던져 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돈주머니가 상상외로 묵직하자 레오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걸 다 주시는 거예요?"
"이겼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 많지 않나요."
"그럼 다음 판부터 나한테 져줄래?"
"에? 아, 아니. 그건......"
"그럼 잔소리말고 그냥 받아 챙겨."
"......"
간단히 레오넬의 말문을 막아버린 다크는 다시 주사위를 굴렸다. 그 모습에 레오넬은 뭐라고 말을 해봐야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게임에 임했다.
굴리고 숫자를 보고 아이템을 넘겨주고.
굴리고 숫자를 보고 아이템을 넘겨주고......
다크의 배낭은 점점 가벼워지고 레오넬의 옆엔 여러 가지 아이템들이 쌓여갔다. 일부러 져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결국 그 침묵의 내기는 다크의 배낭이 텅 비자 끝났다.
"음. 재밌었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표정으로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다크. 그런 그를 보며 레오넬은 뭐라 말해야 할지 헷갈렸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퀘스트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야 하는지......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게 남아있었군."
다크는 품속에서 포이즌 대거를 꺼내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걸 본 레오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전 사기 당한 물품이니 못 알아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포이즌 대거?!"
다크는 피식 웃었다.
"그래. 포이즌 대거다. 이걸로 우리 마지막 게임을 벌여 보자고."
레오넬은 그제야 다크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웠기 때문이다.
"아까 오신 운영자님이죠? 맞죠?"
다크는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운영자가 뭔데?"
레오넬은 순간 당황했지만 그가 정체를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좀 어리버리하기는 해도 숨기려 하는 것을 굳이 캐물을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이다. 사실 진짜 다크와 페르가 동일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네. 그럼 어서 하죠. 제가 먼저 굴릴까요?"
지금까지의 얼떨떨한 표정은 어딘가로 날려 버리고 연신 싱글벙글 웃는 레오넬이었다. 그 미소에 마주 웃어준 다크는 간단히 대답했다.
"먼저 해."
"네~"
레오넬은 얼른 주사위를 굴렸다. 6과 6이었다.
"와!"
단번에 나와 버린 최고 숫자. 레오넬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고 다크는 더 이상 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냉큼 포이즌 대거를 넘겼다. 곧 각자에게 이벤트 완료와 퀘스트 종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이 일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포이즌 대거를 받아들고 만지작거려본 레오넬은 정말 환하게 웃었다. 사기를 당했었다는 기억은 아직도 기분이 나쁘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아이템과 돈을 얻었다. 게다가 운영자도 바쁘리라 짐작되는데 그 하나만을 위해 이렇게 해줬다는 것이 그로선 정말 기뻤던 것이다.
"난 내기를 했고 거기서 졌을 뿐이야. 고마워할 것 없어."
다크는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레오넬도 얼른 따라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크는 손을 흔들어 그를 막았다.
"됐어. 일어나지마. 난 갈 거니까."
"그럼 또 뵐 수 있을까요?"
레오넬은 동경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다크를 올려다보았다. 다크는 피식 웃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엽게 느껴져서다.
"글세. 기회가 된다면?"
아마 어렵겠지만...... 이라는 뒷말은 꿀꺽 삼킨 다크였다. 유저는 수백만이고 그는 하나이니 말이다. 모든 유저에게 단 한번씩 이벤트를 열어 준다해도 몇 년은 걸릴 터였다.
"그럼 잘 있어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레오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크는 바로 로그아웃했다.
캐릭터 정보 저장 같은 것도 없이 금새 지원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캡슐을 나오자마자 바로 책상 앞에 앉더니 에피소드의 넷홈 화면을 열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지금쯤 올라와 있을 거라 생각해서다. 뭐냐고? 바로 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