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누구를 위한 운영자인가
에피소드에 접속한 다크는 1과의 EM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수근거리고 있는 휴게실을 벗어나 곧장 그만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유저들이 찾아내지 못한 비밀 던전 한 구석에 작게나마 꾸며놓은 아지트. 사실 꾸몄다고는 하지만 별다른 것은 아니다. 그냥 어둠침침한 던전 한 귀퉁이에 영구 마법 랜턴을 걸고, 그 밑에 소파와 탁자를 가져다 놓았을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를 꺼려하는 1과의 EM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는 다크에겐 훌륭한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접속 장소를 변경할 수는 없는 건가. 귀찮게 왜 항상 EM 휴게실로 접속되는지......"
다크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하자 엠이 즉각 대답했다.
[그 것은 운영진뿐만 아니라 유저도 마찬가지로 처음 접속 장소에서 항상 접속됩니다. 접속 장소 자유 지정은 정식 서비스 때부터이니까요.]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인 다크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진영에게 한 말은 아버지의 협박에 대한, 또 그의 취미 생활-유저 괴롭히기-보장을 위한 대비책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진심이기도 하다. 물론 GM들 중에도 정말 유저를 위하려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들에겐 GM 행동 수칙이라는 굴레가 있다. 정말 유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어도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크에게는 그걸 무시할 빽이 있고 또 잔머리가 있다. 이벤트라는 적당한 핑계거리도 있고 말이다.
"차근차근 해나가야겠지. 우선 초반 활동 방식은 역시......"
다른 유저들에게 피해를 주는 악질 유저들에게 악랄한 이벤트를,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일반 유저들에겐 즐거운 이벤트를 선사한다. 취미 생활도 즐기고 유저들의 칭찬과 존경도 받고. 꿩도 먹고 알도 먹는......
"후후. 입장이 이렇게 바뀔 줄은 예전엔 생각도 못했지."
지원도 얼마 전까지는 꽤나 악랄한 플레이를 하는 유저였는데 지금은 그런 악질 유저들을 골탕 먹이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뀐 입장이 되자 상당히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직접 해봤기 때문에 그런 악질 유저들의 패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누가 악질 유저고 누가 당한 유저인지 그가 재빨리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사람 많은 도시 같은 곳에 죽치며 그런 유저들을 찾아 헤매거나 묻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엠. 나도 GM 콜을 받을 수 있으려나?"
다크가 말한 콜(Call)은 유저들이 시스템의 헬프 메뉴를 통해 GM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각종 문의나 상담, 신고나 항의 등을 받을 수 있도록 GM들이 항시 에피소드 내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콜을 보내는 것은 유저. GM은 받는다고 표현한다.
[받을 수 있습니다.]
다크는 잠시 생각해보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콜을 받아 유저들을 찾아 다니다보면 그가 원하는 악질 유저 신고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외의 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상담 같은 것을 요청하면 귀찮아진다. 더불어 항의나 요청을 받는 것도 싫고.
"어떻게 하면...... 아!"
문득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에 다크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엠. GM 로이니아가 접속해있는지 알아봐. 있으면 위치도 검색해 보고."
검색이 금방 완료되었는지 엠의 대답은 거의 바로 나왔다.
[현재 접속중이며. 위치 좌표는 E3733. T2721. T4447. E1111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다크는 바로 그 좌표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초보자 사냥터라 불리는 매크랜드 숲 옆의 커다란 호숫가. 다크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옆에 보이는 GM 로이니아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하이딩 상태라 하더라도 GM이나 EM들끼리는 서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저가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투명)마법 같은 것을 사용해도 다 보인다.
"아......"
로이니아는 갑작스런 다크의 등장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별다른 말이나 행동 없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원래대로라면 인사를 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그녀는 지금 유저의 콜을 받고 와 있는 상태기에 다크의 존재를 티내지 않는 것이다. 다크 역시 그런 상황을 눈치채고 묵묵히 콜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냥 얼른 들어갔다 나오면 되는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메드님."
"그 죄송이란 말이 몇 번째인지 아세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진짜 죄송하면 좀 꺼내줘요. 운영자님껜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 아녀요. 잠깐이면 되잖아요. 네?"
"유저분의 실수로 인한 아이템 분실은 규칙상 보상해 드리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더군다나 플레이에 직접 영향을 주는 도움은 절대 금지입니다. 죄송합니다."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아이템 분실에 대한 대화. 다크는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저 메드라는 이름의 유저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 중 하나를 호수에 빠트렸고, 그걸 좀 꺼내달라고 GM 콜을 했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GM은 어디까지나 유저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도움만 가능하기에 로이니아는 메드를 도우려야 도울 수가 없다. 에피소드에는 다이빙(Diving:잠수)이란 스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스킬만 배운다면 호수에 빠트린 아이템을 유저가 직접 찾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좀 해주면 어디 덧나요? 뭐가 이래. 정말."
"죄송합니다. 메드님. 현재 상황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조언뿐입니다."
로이니아는 사과에 사과를 거듭했지만 메드는 아랑곳없이 검을 꺼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 다이빙인지 뭔지 하는 기술을 익혀서 직접 하라고 한 것이 조언이라는 거예요? 누가 그걸 몰라서 운영자를 불렀겠어요? 알잖아요. 그 기술을 익히는데 얼마나 오래 시간이 걸리는지요. 그동안이면 제 검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 아닙니까! 대체 운영자가 왜 존재하는 거예요? 네? NPC도 아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하면서 월급 받는 거예요? 서비스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할 것 아녀요!"
"네. 죄송합니다. 메드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똑같은 얘기가 한참을 계속 되고, 결국 메드는 신경질을 팍 내며 로그아웃해버렸다. 어디나 저런 유저는 있다. 해줄 수 없는. 해줘서는 안될 일을 제멋대로 요구하고 해주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들 말이다.
로이니아는 가상 현실이라 흐를 리가 없는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다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꾸했다.
"별 말씀을. 일하시는 도중에 찾아온 것이니 이 정도 기다림이야 당연하지요."
"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로이니아는 다크가 누구인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운영자 캐릭터는 정보를 볼 수도 없고 또 EM이나 GM의 복장이 하나로 통일된데다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금색의 EM과 달리 GM은 눈처럼 새하얀 색의 로브와 마스크를 사용한다.
"제 2 이벤트 관리과의 EM 다크입니다."
"어머, 서 과장님?"
다크는 대답대신 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자 로이니아 역시 마스크를 벗으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선 처음 뵙는군요. 그런데 어쩐 일이신지?"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의아한 눈빛을 띄운 로이니아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어떤 부탁인가요?"
GM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EM도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에 로이니아의 이런 의문은 당연하다. 다크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사기나 PK 같은 악질 플레이어 신고가 들어오면 저에게도 좀 알려주셨으면 해서요. 로이니아님께서 해결하실 수 있는 것말고 규칙상 해결해줄 수 없는 사건들 같은 것 말입니다."
잠시 말을 끊었던 다크는 매력적인 미소와 윙크를 날리며 말을 이었다.
"쉬운 일이죠?"
순간 로이니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 나이 이제 스물 셋. 게다가 현재 애인도 없다. 다크 같은 미청년의 유혹적인 윙크에 가슴이 떨리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자신을 돕게 만들기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다크의 행동이다. 이젠 빽과 여론 조작에 이어 미남계까지 사용하려는 뻔뻔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