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버그?
2178년 11월 2일.
에피소드의 오픈 베타 서비스가 시작된 10월 13일로부터 20여 일이 흘렀다. 시일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아서일까. 어쩐지 메인 스토리의 진행이 무척 더뎠다. 전과 달리 확연한 목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이벤트 1과의 EM들이 바쁘게 뛰어 다니며 여러 힌트를 뿌려知藪?조금씩 진행 속도에 박차가 가해지고는 있었다.
현재 메인 스토리에 따라 제국 내를 돌아다니는 드래곤은 총 100마리. 그 중 71마리가 정체를 감춘 채 유저들과 어울려 다녔고 나머지는 홀로 떠돌거나, 도시 혹은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에 정착해 유유자적하고 있다. EM이 이벤트용으로 쓰는 하급 A.I와 달리 메인 스토리의 주だ?드래곤의 A.I는 상급 중에서도 최상급이기에, 또 20% 정도는 EM이 직접 분장한 것이기에 그들의 정체를 눈치챈 유저가 아직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가출한 그 해츨링은 제국의 수도 자이렌에 있는 '머리 세 개 달린 표범'이란 펍에서 매일 같이 술 파티를 벌이며 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이벤트 1과의 어느 술 좋아하는 EM이 그 해츨링으로 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EM들은 일이 아니라 노는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그 EM을 부러워했지만 이건 1과의 이야기. 더 잘 놀고 있는 이가 바로 2과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서 지원이다.
EM 다크. 그는 지금 외모를 변환한 채 어느 한적한 마을 광장에 앉아 아리따운 NPC 무희들을 춤추게 하며 십여 명의 유저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마을 근처 산 속의 늑대들 때문에 연달아 이십여 번의 사망을 경험한 어느 요령 없는 유저를 위로하기 위해 연 무희들의 공연 이Ζ?? 악질 유저 골탕 먹이기가 취미지만 이렇게 일반 유저들을 위로하는 착한 짓도 가끔은 하는 그였다.
"휘익~!"
"이야! 멋진걸?"
정작 위로하려했던 유저보다 지나가던 유저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에 다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안 좋아하느냐 하면 그 것도 아니다. 현재 다크가 타겟으로 했던 유저는 입을 헤~ 벌린 채 무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치지도 않는 NPC 무희들의 공연은 끝날 줄을 모르고 누군가 가져온 술병이 광장 내의 사람들에게 돌려졌다.
정열적이고 격렬한 움직임, 그리고 빠른 템포의 음악. 광장은 마치 작은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마냥 떠들썩했다.
그렇게 한참 무희들의 공연이 분위기를 고조시켜 가던 때, 다크는 문득 들려온 엠의 목소리에 놀라 막 받아든 술병을 도로 내려놨다.
[EM 다크님. 코드 식스 상황입니다. 현재 접속중인 운영진은 모두 현장으로 모이라는 전체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Code 6. NPC A.I의 오류 버그가 일어난 상황을 가리킨다. 주변에 모여있는 유저들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다크는 엠에게 메시지를 띄웠다.
[버그는 GM들 관할이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까지 소집 명령이 와?]
엠의 대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EM도 분명 운영자니까요. 하지만 안 가셔도 무관합니다.]
안 가도 된다는 엠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크는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름을 느꼈다. 에피소드에서 운영진 전체 소집을 할 만큼 큰 버그가 일어난 것은 처음이니 말이다. 그리고 무희들의 공연은 그가 없어도 진행에 무리가 없을 테니 가봐도 상관없으리라.
[위치 좌표 좀 불러봐.]
[A8886. F2121. H1213. S5555 입니다.]
주변을 슥 둘러보며 자신에게 크게 신경을 쓰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광장 저편으로 은근슬쩍 걸음을 옮겼다. 하긴 잘빠진 무희들의 화려한 댄스 공연이 펼쳐지는데 평범한 외모의 그에게 신경 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광장 끝까지 걸어온 다크는 바로 건물 그늘 아래로 몸을 숨기며 하이딩을 발동시켰다. 더불어 외모 변환도 풀어버리곤 곧장 엠이 불러준 좌표로 이동했다.
크롸롸롸롸!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귀를 찢을 듯한 괴성에 다크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인 것은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채 울부짖고 있는 정말 거대한 블랙 드래곤이었다.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두터운 비늘로 둘러싸인 검은 몸체, 슬쩍 스치기만 해도 뼈가 바스러질 것 같은 육중한 꼬리, 그리고 몸체의 두 배는 될 듯한 커다란 날개까지. 흉흉한 눈빛을 번뜩이는 그 드래곤은 정말 강렬한 존재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멋진 놈이네. 한번 잡아보고 싶군."
다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드래곤에게서 시선을 떼어 주변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이딩 상태로 몰려 서 있는 수십 개의 흰 로브와 황금색 로브. 이렇게 많은 GM과 EM들이 모인 것은 처음 본 그였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운영진만이 아니었다. 이 곳은 바티안 제국의 키아른시. 유명한 상업도시인만큼 상당히 많은 유저들이 오고가는 곳이다. 당연히 난데없이 나타난 드래곤의 모습을 구경하려 몰려온 수없이 많은 유저들이 있었다.
"우와~ 정말 크다."
"뭐야. 저거 갑자기 왜 나타난 거야? 메인 이벤트인가?"
"야! 포션 있는 대로 다 사와! 드래곤 함 잡아보자."
긴장감 없는 유저들의 반응에 잠시 쓴웃음을 짓던 다크는 GM들이 몰려선 채 수군거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냥 저 드래곤의 데이터를 삭제해 버리죠."
"안 됩니다. 일단 삭제되면 복구가 힘들어요. 게다가 이미 유저들 눈에 띈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나중에 유저들이 그게 뭐였냐고 물으면 뭐라 할 말이 없지요. 어떻게든 버그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원만하게 수습해야해요."
열심히 의논중인 GM들을 슥 둘러보던 다크는 묵묵히 서 있는 한 GM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저도 좀 알 수 있겠습니까?"
EM이든 GM이든 일단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서로가 누군지 알 수 없다. 그랬기에 GM 다루니는 그가 그 유명한 EM 다크라는 것을 모른 채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메인 스토리 때문에 풀어놨던 블랙 드래곤 아이다콘의 A.I가 꼬여서 난폭해진 거랍니다."
다크는 아이다콘이라는 이름의 블랙 드래곤을 흘깃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얌전해지라고 명령하면 되지 않습니까?"
"다른 몬스터들이나 NPC들에겐 지금도 여전히 GM 명령어가 먹힙니다만. 저건 A.I가 꼬여서인지 명령어가 전혀 안 먹힙니다."
"흐음. A.I를 복구할 방법이 없는 건가요?"
"복구할 수 있습니다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려서 문제입니다. 복구하려고 하는 동안 이 도시의 유저들은 모두 학살당해 버릴 테니까요. 어쩌면 다른 도시까지도 그 여파가......"
다루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성을 지르는 것을 멈춘 블랙 드래곤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듯한 눈빛으로 유저들을 쓸어 보았다. 운영진들 모두가 그 모습을 보았지만 다들 어떻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냥 유저들이 없는 곳으로 강제 이동시킨 다음에 천천히 A.I를 복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드래곤이 갑자기 사라지면 유저들이 무척 이상하게 여길 것 아녀요. 그건 절대 안돼요."
"버그가 생겼다는 것이 알려지면 골 아프다고. 넷이 난리가 날걸. 경쟁사들은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마구 비방해댈 거고."
다크는 똑같은 의논만 반복하고 있는 그들이 조금 한심해 보였다. 유저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까지 소극적인 자세라니. 하긴 GM 규칙상 직접적인 해결 방법을 사용하기 힘들긴 하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나는 다르지."
그렇게 중얼거린 다크는 GM과 EM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좀 떨어져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