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38화 (38/74)

4. 버그?

"엠. 이 근처에 다른 드래곤이 있나 찾아봐."

[도시 내에 다른 드래곤은 없습니다.]

"그럼 가장 가까이 있는 드래곤은?"

[가장 가까이 있는 드래곤이라면 북쪽의 다룬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레드 드래곤 세이어스가 있습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다크는 아이다콘을 힐끔 쳐다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블랙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의 능력치를 비교하면 어때?"

[비슷합니다. 하지만 세이어스의 경우 육천 살이 넘은 고룡이기에 이제 삼천 살이 된 아이다콘에 비하면 훨씬 강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다크는 떠올린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며 명령했다.

"세이어스를 하이딩 상태로 강제 소환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붉은 머리의 미남 마법사 하나가 다크의 앞에 나타났다. 역시 엠의 빠른 반응과 일 처리는 인정할 만하다.

"어? 내가 왜 여기에?"

상급 A.I의 세이어스는 자연스런 의아함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아이다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검둥이는 왜 저래?"

세이어스의 의문에 다크는 이죽거리며 대답 아닌 대답을 해줬다.

"넌 몰라도 돼."

그 건방진 대답에 세이어스는 눈을 치켜 뜨며 다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나 다크의 황금빛 로브를 보고는 금새 눈을 내리깔았다. 에피소드 내에서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은 상급 A.I이기는 하지만 운영자에게는 절대 복종하라는 명령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EM님이셨군요. 저를 소환하신 것이 EM님이십니까?"

세이어스의 공손한 물음에 다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차 질문했다.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다크는 빙긋이 웃었다.

"있지."

"말씀하시지요."

"아, 별 일은 아니고......"

다크는 세이어스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며 말을 이었다.

"잠깐만 네 몸 좀 빌리자."

몸을 빌린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에, 세이어스는 약간 착각을 하고 말았다.

"제 성인 서비스 모드에 동성애는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설정을 추가하시겠습니까?"

"......"

다크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것을 아주 약간 반성했다.

"난 여자가 좋아."

"그럼 여성체로 폴리모프하길 원하십니까?"

"......"

세이어스의 아무 거리낌이 없는 담담한 표정과 정중한 말투.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절대 그게 아니란 것을 다크는 깨달았다.

"...... 내가 몸을 빌린다는 것은 그 말 그대로의 뜻이야."

그때 막 근처 건물들을 때려부수며 발광을 하는 아이다콘의 모습을 본 다크는 세이어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엠. 외모 변환 준비해."

다크는 빠르게 명령하고는 세이어스를 그 자리에 고정시켰다. 마법으로 치자면 석화라고 불러야 할까. 움직이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마네킹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다크의 계획에 세이어스는 잠시 그 존재가 사라져 줘야 했기 때문이다.

[EM 다크님. 목록 중에서 변환할 외모를 선택해 주십시오.]

미리 설정해둔 수백 개의 얼굴이 다크의 눈앞에 떠올랐다. 허나 다크는 손을 휘휘 내저어 그걸 모두 지워버리며 말했다.

"인간이 아냐. 레드 드래곤으로 변환한다."

EM은 에피소드 내에 존재하는 몬스터라면 무엇으로든 변신이 가능하고 또 조종이 가능하다. 물론 규칙상 사용할 수 없을 뿐 GM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는 있다.

[변환하실 레드 드래곤의 능력치를 설정해 주십시오.]

다크는 피식 웃으며 세이어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언제 다 설정하고 있어. 이 녀석 복제해."

[알겠습니다. 변환 시작합니다.]

외모 변환은 언제나 그랬듯이 거의 순식간에 끝났고, 다크의 모습은 세이어스와 완전히 동일하게 변했다.

"엠. 수동 이벤트 온 시켜."

[이벤트 온 되었습니다.]

다크는 바뀐 자신의 정보를 슬쩍 훑어보고는 바로 하이딩을 풀며 소리쳤다.

"멈춰라! 아이다콘!"

역시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몸이기 때문일까. 다크가 마음먹고 소리치자 도시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로 인해 주변의 유저들은 물론. EM과 GM들에 아이다콘까지. 모두의 시선이 다크에게 집중되었다.

그 시선들에 상큼한 미소로 보답해준 다크는 천천히 폴리모프를 풀었다. 순간 새하얀 빛이 그의 몸에서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눈부심에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가렸다. 그러는 사이 그 빛은 점점 커져, 어느 덧 아이다콘보다 더 큰 크기로 변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그 곳엔 피처럼 붉은 비늘을 가진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이 나타났다.

"맙소사. 저건 누구야!?"

"드래곤이 둘?"

"설마 꼬인 A.I가 하나가 아니었단 말인가?"

GM들은 저마다 떠들어대며 황급히 다크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다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의 정보를 열어 보려 했지만 당연히 볼 수 없었다. 같은 운영진들끼리는 서로의 정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크는 황당해하는 GM들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어 주고는 다시 크게 소리쳤다. 이번엔 드래곤 고유 능력으로 설정되어 있는 드래곤 피어도 적절히 섞어본 그였다.

"인간들은 당장 이 곳을 떠나라! 이 것은 우리 종족간의 일. 관여하려 하는 자나 섣불리 가까이 다가오는 자의 안전은 장담치 않으리라!"

엄중한 경고로서 피해자들의 항의를 막아보려는 속셈. 나중에 이 사건 때문에 죽거나 다친 유저가 항의를 한다면, 경고했는데 안 떠난 당신 잘못이라고 말해주려는 다크였다.

허나 멀리 도망은 칠지언정 아예 이 도시를 떠나는 유저는 없었다. 이런 대단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예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동영상 녹화를 시작하는 유저도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일이다.

그리고 다크는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재차 경고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번 일을 이벤트처럼 꾸며 구경거리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과 드래곤의 결투. 유저들에게 꽤 즐거운 이벤트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유저나 운영진들만이 아니라 아이다콘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레드 드래곤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크르르. 그대는 누구인가?"

아이다콘의 물음에 다크는 그 커다란 머리를 갸웃했다. A.I가 꼬였다더니 말은 제대로 하네? 라는 생각에서다.

"난 레드 드래곤 일족의 세이어스다."

아이다콘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설정을 떠올려 보았다는 것이 정답이리라. 그 설정 속에서 그는 세이어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고 나와 있었다. 정확히 6171살의 고룡. 과격한 성정으로 유명하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되어 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고룡이시여. 허나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크는 의외로 아이다콘과의 대화가 재미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 인해 이 상황을 즐겨보고 싶어진 그였지만, 이번 일을 얼른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미친 짓 그만하고 얌전히 레어로 돌아가라. 아이다콘."

아이다콘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일족의 율법을 잊으셨습니까. 고룡이시여. 아무리 당신이시라 하더라도 다른 드래곤의 유희에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룡께서는 제 유희에 관여하려 하시는 겁니까?"

그 정확한 설정 지적에 속으로나마 혀를 내두르는 다크였다. A.I가 정말 꼬인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허나 다크는 이 정도로 물러설 사람. 아니, 드래곤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왜 이 나라에 와 있는지를 잊었느냐. 해츨링에 대한 일은 일족의 율법을 앞선다. 그 중대한 일을 젖혀 두고 어떻게 이런 과격한 유희를 즐기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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