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버그?
꼼지락거리며 분사 분량을 조정한 스핀은 바로 조앤을 향해 독을 분사했다.
"이젠 제발 죽어라!"
스핀의 외침과 동시에 붉은 안개와도 같은 레드 포이즌이 확 뿜어져 나왔다. 과연 이 독은 그렇게도 죽고 싶어하는 조앤을 죽일 수 있을 것인가? 며느리는커녕 시어머니도 알 수 없는 상황!
허나 결과는 참담했다. 다크가 만들어낸 바람이 그 붉은 안개를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독 안개는 조앤의 근처도 가지 못한 것이다.
"제길! 독도 안 통하잖아!"
스핀은 크게 좌절하여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바람이 하필 스핀 쪽으로 부는 것이 아닌가?
"허억!"
스핀은 놀란 숨을 내뱉으며 얼른 일어나, 자신을 덮쳐오는 붉은 안개를 피하려했다. 차라리 앉은 채로 옆으로 굴러 버리던가 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바람은 그가 일어서는 것보다 더 빨랐다.
"빌어먹......"
붉은 안개에 휘감긴 스핀은 마지막 한 마디 욕설조차 다 끝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속으로 'x 됐다!'를 연신 외치면서......
뿌린 대로 거둔다고나 할까. 본래 그 말이 뜻하는 바와는 틀린 상황이지만, 스핀은 자기가 뿌린 독에 자기가 당하는 불행한 사태를 빚고 말았다.
"쯔쯔. 그러게 좀 조심하지."
다크는 무척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정말 가증스러운 연기가 아닐 수 없다. 일부러 그 쪽으로 바람이 가게끔 계산해서 한 것이면서 말이다. 이래놓고 누가 뭐라고 하면, 퀘스트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다 발생한 유저의 실수라고 당당히 말해주려는 다크였으니, 정말 뻔뻔스럽?아니할 수 없다.
이때 스핀은 사망하자마자 바로 리스타트를 하여 자신의 시체가 있는 곳을 향해 정말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가 서두르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사망 후 이십분이 지나면 시체가 필드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던전과 필드 곳곳엔 사망한 유저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으리라. 몬스터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내 아이템! 내 돈! 내 독!"
스핀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정신 없이 뛰었다. 정해진 접속 장소에서만 리스타트 되기에, 또 그의 접속 장소가 꽤 멀기에, 시체가 있는 곳에 도착하려면 한 삼십분은 걸린다.
시체가 사라지는 시간이 이십분. 도착 시간은 삼십분 후. 가히 절망적인 상황이다.
결국 시간은 흘러흘러 대망의 이십분 후, 이 모든 상황을 의도한 다크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스핀의 시체가 사라졌다. 당연히 시체에 있던 아이템들과 돈도 같이 사라졌으니, 독 분사기와 레드 포이즌도 깨끗이 사라졌음은 말 안 해도 알리라.
스핀은 그로부터 십분 후에야 겨우 다크 앞에 도착했다.
"크아악! 왜 벌써? 왜 벌써 사라진 거야!?"
자신이 무척 빨리 왔다고 믿고 싶은 스핀은 이 상황을 인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시체만 기준 시간보다 빨리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연히 아니지만 그의 참담한 심정은 꼭 그런 것만 같았다.
"운영자. 운영자를 불러서 따지고 말겠어!"
스핀은 다급히 GM에게 콜을 넣었다.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한 다크는 나직하게 말했다.
"엠. 남은 이벤트 진행은 네가 맡아서 해라."
[알겠습니다. EM 다크님.]
다크는 엠의 대답을 들으며 얼른 자신의 아지트로 이동했다. 콜을 받고 온 GM과 마주치는 것도 반갑지 않았고, 또 애초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굳이 이벤트를 끝까지 지켜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지트에 도착해 자신의 전용 소파에 기대앉은 다크는 문득 든 생각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과연 스핀이 저 퀘스트를 깰 수 있을까?"
'죽고 싶어하는 남자' 퀘스트의 해결 방법. 그 것은 조앤에게 자신이 공격당한다는 것을 모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게 하는 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볼까? 죽이려고 하는 것을 조앤이 모르게 '암살'해 버리면 된다 이 말이다.
"후후. 아마 아주 운이 좋아서 우연히 맞추지 않는 한 절대 못 깨겠지?"
역시 독 뺏은 대신 퀘스트 보상으로 돈준다~ 라는 착한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다크다.
"자, 그러면 다음 유저를......"
뽑아놨던 유저 리스트를 살피던 그는 문득 한 이름에서 시선을 고정시켰다.
"쉐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잘 기억이 안 나네."
예전에 그의 아지트를 빼앗은 세 명중 홍일점.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저 정보도 본 적이 있는 다크지만, 그냥 스쳐지나간 것이라 제대로 기억하질 못했다.
더불어 쉐나는 이벤트 1과에서 특별 감시중인 버그 플레이어중 하나이기도 하다. 임 동원 부장이 노리고 있으니 엉뚱한 누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만나면 안되지만, 우연이란 묘한 놈은 결국 다크를 그들에게로 이끄는 것 같다.
"아이템 사기범이라...... 흐음. 그럼 이번엔 이 쉐나라는 유저에게 가볼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결정하고만 다크는 쉐나를 타겟으로 이동 명령어를 사용했다.
검붉은 용암이 이글거린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리고 이 곳이 현실이라면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곳. 쉐나와 쉐반, 쉐인은 바로 그런 활화산 깊숙한 곳에 와있다. 그들은 지글지글 끓고 있는 용암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마법 다리 위를 지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저기 들어가서 수영 한번 해보고 싶다."
붉디붉은 색의 전신 갑옷을 입은 쉐반이 용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날렵한 몸매를 검은 옷으로 휘감은 쉐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참아라. 아마 뼈까지 녹는데 일분도 안 걸릴걸?"
"불 속성에 강한 레드 드래곤의 스케일 아머(Scale Armor:비늘 갑옷)를 입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쉐반의 의문에 쉐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도 장담할 수 없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해봐. 겁나면 내가 밀어줄까?"
그동안 내내 가만히 있던 쉐나의 말에 쉐반은 찔끔하며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맙지 않지만 사양할게."
쉐인과 쉐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쉐반의 행동이 익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들 셋은 버추얼 스쿨에 입학했던 아홉 살 때부터 지금껏 사귀어온 절친한 친구 사이다. 그야말로 서로에 대해 몰라야 할 것까지 다 아는 사이랄까. 매번 서로 티격태격하지만 말로만 그럴 뿐, 서로를 끔찍이 위하는 멋진 우정을 가진 이들이다.
사실 이들은 임 동원 부장 외의 몇몇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듯이 타 회사의 직원들이 맞다. (주)메모리즈 사의 메인 프로그래머들이자, 취미로 해커 일도 하는 이들인 것이다. 단지 그 의심에 틀린 점이 있다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에피소드에 잠입한 것이 아니라, 진짜 에피소드?즐기고 싶어서 왔다는 점이다. 단지 그 즐기는 방법에 문제가 있어 지금 특별 감시를 받고 있지만 말이다.
"하여튼 내가 쉐반 때문에 웃고 산다니까."
"동감이다."
쉐나의 말에 쉐인이 긍정을 표했고, 쉐반은 그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을 쑥 내밀었다. 그가 그러던 말던 쉐나와 쉐인은 깨끗이 무시하며 둘이서만 희희덕거렸다.
이때쯤 이동 명령어 사용을 완료한 다크가 그들 옆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셋을 힐끔 쳐다보고는 역시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일단 어떤 이벤트를 열어줄 것인지 생각해내야 하니 말이다. 동료들도 있으니 더욱 계획이 철저해야만 했다.
"아, 빨간 문 저기 있다."
그들이 목적했던 곳을 가장 먼저 발견해낸 쉐인은 호들갑스럽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3미터 높이의 붉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오, 꽤 큰문이네. 게다가 의외로 찾기 쉽잖아? 난 좀 더 깊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쉐인의 감탄 섞인 말에 쉐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게 말야. 비밀 던전치고는 의외인걸? 그냥 지나치다가 찾아낼 수도 있었겠다."
"그냥? 설마 활화산 속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지나치기 위해 들어오는 인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 하냐?"
"하긴 그런가?"
둘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하던 다크는 엠을 부르며 물었다. 스핀의 이벤트에 아직 신경 쓰고 있을 테지만, 이 정도 멀티 기능은 당연히 있는 엠이기 때문이다.
"엠. 저 앞에 보이는 문에 대해 말해봐. 비밀 던전인가?"
[맞습니다. EM 다크님. 저 곳은 난이도 A급의 비밀 던전으로 드래곤 슬레이어 퀘스트를 완료해야만 장소 힌트가 주어지는 곳입니다. 주로 등장하는 몬스터는 언데드 계열이며 라스트 보스로 데미 리치(Demi Lich)와 드라코 리치(Draco Lich)가 랜덤으로 나옵니다. 던전을 최초로 클리어하면 데빌 네크리스(Devil Necklace:악마의 목걸이)를. 그리고 던전을 클리어한 모두에게 데스 시티(Death City:죽음의 도시)에 갈 수 있는 게이트 스크롤이 주어집니다.]
난이도 A급에 데미 리치니 드라코 리치 같은 것은 둘째치고, 드래곤 슬레이어 퀘스트 완료라는 소리만으로도 기가 막히는 다크였다.
현재 에피소드에선 반쯤 완성된 캐릭터가 주어지긴 해도, 수백 명이 모여야만 겨우 드래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 헌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드래곤 사냥을 했다면 그 소식을 다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넷홈이 그 소식으로 떠들썩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넷홈에 소문이 나지 않을 정도의 소수 인원이 드래곤을 잡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의 눈앞엔 비밀 던전을 찾아온 세 명의 유저가 있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드래곤을 잡았다는 것. 딸랑 세 명이 그랬다니 다크로서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다.
"쉐나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예전 아지트였군. 거기도 비밀 던전이었는데...... 한 파티가 비밀 던전을 2개나 발견했다? 뭔가 이상한데?"
그리 길지 않은 오픈 베타 기간에 한 파티가 2개의 비밀 던전을 발견한다는 것은 확률이 너무 적은 일이다. 다크는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느끼며 이들 파티의 플레이 정보를 수집했다. 물론 엠에게 시켰다. 에피소드를 플레이하는 수십 만 유저의 방대한 정보를 그가 다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어느덧 쉐자 돌림 파티는 붉은 문 앞에 도착했고, 알 수 없는 재질로 된 문을 툭툭 두드려본 쉐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또 보람찬 비밀 던전 털이를 시작해 볼까?"
"야호!"
쉐반과 쉐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웃었다. 남들이 해보지 못한 일. 이들은 그런 일을 해보는 것에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곧 도적인 쉐인이 대표로 나서 문을 살폈다. 함정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정사각형 형태로 이루어진 네모반듯한 긴 통로. 벽과 천장은 붉은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듯 반질반질했고, 벽에 횃불 하나 걸리지 않아 어두 침침했다.
"분위기 죽이는데?"
쉐나의 말대로 통로의 분위기는 야릇했다. 온통 붉은 돌로 이루어져서일까. 왠지 철철 흘러 넘치는 피가 떠오르는 듯한 느낌. 문밖은 용암이라 뜨거운데 통로에선 등골 시린 냉기가 흘러나오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음산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쉐자 돌림 파티는 겁도 없는지, 희희낙락하며 통로 안쪽으로 선뜻 걸음을 옮겼다. 물론 쉐인이 가장 앞이었고 그 뒤에 쉐나, 쉐반 순이었다. 끄트머리는 하이딩 상태인 다크다.
철컹!
갑작스런 소리에 모두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들어서는 순간, 던전의 문이 자동으로 닫혀버린 것이다.
"갇힌 것 같네."
"천상 끝까지 깨야 나갈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죽어서 나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