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벤트마스터-46화 (46/74)

5. 휴가

2178년 11월 4일.

(주)테이머의 롤플레잉 프로젝트팀 운영부 부장 임 동원은 언제나처럼 정각 10시에 출근하여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임 동원 부장님.]

A.I 킨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는 책상 앞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 일정은?"

[오전 11시에 에피소드 운영 회의가 있으며 1시에는 오프라인 운영과 최 동현 과장님과 점심 식사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 4시 14분에 들어온 제 1 이벤트 관리과 김 진혁 과장님의 화상 메시지가 있습니다.]

김 진혁 과장의 메시지라는 말에 순간 임 동원의 눈이 번뜩였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바로 그 소식이 아닐까 추측되어서다.

"열어봐."

곧 김 진혁 과장의 얼굴이 책상 위에 떠올랐다. 그는 밤을 꼬박 새기라도 한 듯 무척 초췌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버그 플레이어 파티와 서 과장님에 대한 조사와 감시 중. 약간의 혐의점을 포착했습니다. 어제 정오쯤의 일입니다만,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치느라 보고가 늦었습니다.

일단 상황을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오후 12시 5분쯤 그 파티원들 모두의 로그 아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후 12시 49분쯤, 서 과장님과 그들이 마주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분명 그때 그 파티 모두는 로그 아웃 상태였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직접 ?것이라면 착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영상에 찍힌 것이라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동영상을 찍을 수 있었던 까닭은 12시 30분쯤 점심 식사를 위해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느라 서 과장님에 대한 녹화를 실행해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파티와 서 과장님이 마주치는 순간, 확인되지 않는 이유로 서 과장님도 로그 아웃 상태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동영상 녹화가 끊겨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파티가 있던 곳에 서 과장님이 이동된 순간 끊겨 버린 겁니다. 그 후 서 과장님이 다시 로그인 상째?된 것은 20분 후인데, 서 과장님의 업무 보조 A.I인 엠의 기록을 확인해본 결과, 중간에 로그 아웃했다가 재접속한 일은 전혀 없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알 수 없는 그 20분간 서 과장님과 그 파티 사이에 오고간 대화 내용 등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이로 인해 서 과장님이 그들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료되며, 그 파티원들에 대한 제재도 가능하게 될 것 같습니다. 분명 로그 아웃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접속중이었다?동영상 증거가 있기에 버그 플레이 혐의를 씌울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상 중간 보고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감시와 조사를 병행하여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좋은 하루 되십시오."

임 동원은 꽤 길었던 메시지가 끝나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정말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애초에 사회 생활 한번 못해 보고 아버지 빽으로 과장 자리를 꿰찬 어린놈이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거라 걱정했었다. 그러니 정식 서비스를 하기 전에 쫓아낼 구실이 생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김 진혁은 아직 더 증거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 정도 상황 증거면 아무리 부사장이 뒤를 봐주려 해도 별 수 없으리라. 게다가 부사장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김 도진 전무에게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린다면 더욱 더......

"킨. 김 전무님과 화상 연결해."

화상 연결 전의 대기 시간 동안, 임 동원은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지 잠깐 고민했다. 여기서 효과적이란 것은 지원을 보다 빠르고 깔끔하게 내쫓을 수 있도록 하는 효과다.

그 짧은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나이에 비해 상당히 젊어 보이는 김 도진의 얼굴이 책상 위에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임 부장?"

무뚝뚝한 물음에 얼른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 임 동원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다름이 아니라......"

임 동원은 김 진혁의 보고를 토대로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그 위에 약간의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낙하산 인사와 너무도 독특한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지원에 대한 편견 섞인 비판이었다.

"......해서 서 과장에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게 이어졌던 보고를 끝낸 임 동원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김 도진의 반응을 기다렸다. 김 도진은 상당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일을 무척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이게 사실이었다면 정말 심각한 것이 맞다. 단지 오해와 누명이라서 문제지.

"확실한가?"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겨우 나온 김 도진의 물음에 임 동원은 잽싸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김 과장이 증거도 가지고 있을 테니 원하시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걸 아는 사람은?"

"저와 김 과장. 그리고 전무님뿐입니다."

김 도진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그와 지원의 아버지인 서 승익 부사장은 상당히 사이가 안 좋다. 서 승익은 사장 파벌에 속했고 김 도진은 회장 파벌에 속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좋은 건수가 자신에게 가장 먼저 걸려들다니. 이걸 어떻게 잘 이용하면 파벌 싸움에서 그가 상당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임 동원의 둥글넓적한 얼굴이 무척 예뻐 보이는 김 도진이었다.

"알았네. 이 일을 가장 먼저 내게 알린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내 나중에 개인적으로 사례하겠네."

은근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한 김 도진이었지만 임 동원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팍 났다. 애초에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 그저 지원이 보기 싫었을 뿐인데 개인적인 사례라니. 마치 그가 김 전무에게 잘 보이려고 꼬리라도 친 것 같은 꼴이 아닌가.

임 동원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돈 많고 빽 있다는 티를 팍팍 내는 인간이다.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이 돈 많고 빽 있는 놈에게 아부하는 인간이고 말이다. 그래서 지원을 더욱 싫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 전무가 자신이 두 번째로 싫어하는 꼴을 만들려 하니, 그에게 알린 것이 실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네."

대답은 평범하게 했으나 표정은 영 아닌 임 동원이었지만, 김 도진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럼 수고하게."

곧 둘의 화상 연결이 끊어졌고 임 동원은 찜찜함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기에, 일단 그는 꼴 보기 싫은 지원을 쫓아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김 전무가 알아버린 이상, 지원은 잘 되야 좌천. 못 되면 당연히 해고이리?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기분이 좋아진 임 동원은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곧 다가올 회의 시간을 기다렸다.

"아~ 미운 사람~"

이렇게 임 동원이 아주 오래된 가요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 우리의 주인공 지원은 왠지 모를 한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감이라는 걸까.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를 아는지 몸이 먼저 반응한다.

"으음, 요즘 내가 너무 무리했나?"

고개를 갸웃하며 그렇게 중얼거린 지원은 찌뿌드드한 몸을 가벼운 체조로 풀었다. 하긴 그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무지 열심히 일하긴 했다.

"좀 쉬고 싶네. 하루쯤은 이벤트를 열지 않아도 되려나?"

당연히 안될 말이지만, 지원은 태연스럽게 땡땡이를 자기 합리화시켰다. 열심히 일한 당신. 놀아라~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동안 내내 머리 아프게 이벤트를 기획하고 또 실행한 채 구경만 했으니 하루쯤은 그냥 에피소드를 즐기며 놀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오늘 하루만큼은 일 안하고 놀기로 작정한 지원은 무엇을 하고 놀까 궁리해 보았다.

"퀘스트형 수동 이벤트를 하나 만들어서. NPC대신 내가 직접 연기하면서 유저들과 어울려 플레이해볼까?"

무심코 중얼거리던 지원은 문득 자신이 직업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노는 일을 생각하는데 왜 이벤트가 생각나는가? 허나 업무의 연장이라고는 해도 그 것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으음. 으으음...... 에라, 모르겠다. 엠! 외모 변환 준비해."

[네. 지원님.]

결국 놀기(?) 위해 수동 이벤트를 선택하고만 지원은 자신이 플레이할 캐릭터의 외모와 능력치. 백스토리와 직업, 장비 등을 꼼꼼히 설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 보면 EM은 지원의 천직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얼마 후, 모든 설정이 완료되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짧은 커트 머리에 적당한 근육이 자리잡은 늘씬한 체격. 굳이 못 생긴 캐릭터를 만들 필요는 없기에 얼굴 역시 남자답게 생긴 미남이다.

이름은 딘 코렐, 나이는 22살, 직업은 용병에 검사이며 모든 능력치가 골고루 높은 전천후 캐릭터다. 특히 민첩만큼은 최고 수준으로 올려놨기에 그가 뛰면 텔레포트가 아닌 이상 쫓아오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운영자의 권한을 마음껏 사용한 지원이 몇몇 희귀 아이템들을 챙겨 장비 시켰기 때문에 잘만하면 솔로로 데미 리치까지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에피소드 내에서는 당해낼 유저가 없는 최강 캐릭터이리라.

"좀 과한가?"

'좀'이 아니라 '상당히' 과하지만, 어차피 놀기 위해서인데 뭐 어떠랴 하고 생각한 지원은 그냥 그 설정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좋아. 그럼 가볼까."

작성한 설정을 엠에게 넘기고 캡슐 안으로 들어간 지원은 느긋하게 에피소드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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